[칼럼] 작렬하는 기습의 일격, 뒷치기개론

칼럼 | 남중훈 기자 | 댓글: 7개 |
뒷치기란 무엇인가


뒷치기, 혹은 뒤치기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종의 은어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보통 배후로부터 가하는 공격을 지칭하지만 실상은 경우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가 약간씩 모두 다르다. 비행 청소년에게는 교실을 휘어잡기 전에 미리 현재 교실을 휘어잡고 있는 현임 일진들에게 가해 주어야 하는 적절한 수준의 기꺾기 행위를 가리키고,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 맨이라면 믿는 사람에게 돈을 떼어먹히고 배신을 당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온라인게임에서 뒤치기라고 하면, 두가지의 상황을 일컫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배후로부터의 공격. 즉 캐릭터가 방어나 반격을 하기 어려운, 캐릭터의 뒤쪽로부터의 공격을 일컫고 또 하나는 캐릭터가 전혀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 즉 마나를 채우고 있다던가, 아니면 한창 사냥 중일 때 적대진영이나 PK 카오스캐릭으로부터 당하는 공격을 가리킨다.


사실 이것은 정면에서의 1vs1 PVP 만을 정당하다 고집하는 일단의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비겁한 행위로 낙인찍혀 있다. 실상 PK가 가능한 각 MMORPG 에서는 이 뒷치기에 당해서 죽어버린 유저들의 아우성이 한시간이 멀다 않고 들려오고, 각 서버의 게시판은 뒷치기를 가한 유저나 진영, 길드에 대한 비방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그 모든 백안시와 경멸에도 불구하고 뒷치기는 끊이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뒷치기의 유래부터 파악해 나가야 한다.





유명 검색엔진에서 검색을 하려면 성인인증을 거쳐야만 한다




뒷치기의 기원과 정신


뒤치기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낙원에서 쫒겨난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어떻게 살해했을까? 뒷치기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등장하는 게르만의 영웅 지그프리드는 어떻게 죽었는가? 그는 사촌에게 뒷치기를 당하고 최후를 마쳤다.

햄릿의 아버지는 동생에게 뒷치기 당하고 햄릿의 앞을 유령이 되어 배회해야만 했고, 브루투스는 시저가 내지르는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 어쩌고를 한 귀로 흘리며 통렬한 뒷치기를 먹였다.

인중여포 마중적토라 불리며 난세를 주름잡던 여포도 부하들에게 뒷치기 당하고 백문루에서 죽었고,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통일의 기반을 닦았던 오다 노부나가 역시 막하의 명장 아케치 미스히데에게 뒷치기 당하고 게임을 접었으며,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는 신경도 안쓰던 허접조직 지구교도에게 뒷치기당하고 인생 종쳤다.




이 정도면 인류의 굵직한 역사는 뒷치기에서 시작되어 뒷치기를 통하여 흐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뒷치기에는 무슨 매력이 있기에, 끈덕지게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열쇠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오딧세이의 한 장면에 있다. 지상 최초로 도구, 즉 한손둔기를 득템한 원시인류가 음식 뺏아먹는 동료에게 가한 행위는 바로 이 뒷치기이다. 여기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남긴 수많은 명장면 가운데 수작으로 이름높은 장면 하나가 나온다. 원시인이 괴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치켜올린 그 허벅지 뼈, 동료의 피가 발려져 있는 뒷치기에 사용된 그 둔기는 첨단문명의 상징인 우주선으로 변하며 장면이 이어진다. 이는 뒷치기의 도구는 변했어도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불굴의 정신은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아벨의 뒷머리를 강타한 카인의 짱돌 속에는 낙원에서 쫒겨나 험한 세파에 내던져진 창세기의 인간이 느꼈을 막막한 심정과 불안함, 신에게 버림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참함과 초조함이 묻어나고, 자기 밥그릇 털어먹는 다른 원시인의 뒷통수를 후려갈긴 원시인의 도구에는 스스로의 것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민초들의 피맺힌 결의가 담겨있다.


인류가 스스로의 위치를 깨닫게 됨에 따라서 손에 쥐어져 있던 도구는 자연스레 뒷치기의 무기로서 발전한 것이다.





태초의 '한 방'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변질된 뒷치기 정신


물론 그 시절에는 뒷치기가 자랑스럽지 못했다. 그건 스스로 약자임을 자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뒤치기란 것이 참으로 오묘한 짓이라,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점차 스스로 발전해 갔다. 단지 욱하는 심정에 저지르는 충동적인 짓거리에서, 점차 스스로의 묘용을 파악하여 전술적으로 업데이트 되어간 것이다.


상대가 완전 무방비 상태일때 가하는 불의의 일격은 대개 크리티컬 데미지가 떠 버린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강력한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이 뒷치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대일 대장전이 가지는 고대 전투의 낭만을 사정없이 뭉개놓는, 지탄받아 마땅한 비열하기 짝이 없던 이 전략전술은 위대한 군사이론가 손자의 명성을 등에 업고 변태하여, 승리를 거머쥐고 싶은 장수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가장 적은 힘으로 강력한 적을 타도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발전해 버렸다.


적군이 강을 건너는 와중에, 즉 전세를 가다듬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설파하던 송나라의 왕은 바보의 표상이 되었고, 어느새 뒷치기(좀 멋진 말로는 기습이라고 하는)는 병가에서도 손꼽히는 승리의 기본 메뉴얼이 되었다.


이렇게 창세에 이루어지던,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아 내리치던 뒤치기의 정신은 전술사상 제일의 병법가 손자에 의하여 형편없이 변질되었다. 뒷치기의 정신은 이제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고래로 백전백승을 부르짖던 수많은 명장들, 한니발이나 악비, 나폴레옹 등에 의하여 필승애국의 정신으로 둔갑하며 면면히 계승되어 내려오게 되어 버렸다.


제세구민 홍익인간. 세상을 구하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뒷치기의 기본 이념과 함께 오로지 약자만이 당당히 사용할 수 있었던 단말마의 발버둥이었던 뒷치기는 그 때부터 강자에 의해 점유되었고, 이는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극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비단 정의하건대, 강자도 뒷치기를 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남발한 작자는 바로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다.





이 책을 읽으면 효율적인 뒷치기는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뒤치기가 백안시되는 진정한 이유


가하는 사람은 오로지 승리만이 당당할 뿐이라는 논리를 앞세우지만, 막상 뒤통수를 맞고 고꾸라지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뒤치기에 반대한다. 그들은 그것이 환상이던 아니던 스스로의 힘을 부인하고 싶지 않기에, 자신들이 뒤치기를 맞지 않았을 경우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패자의 입장에서는 뒤치기라는 녀석이 정당화되기란 요원한 일이며, 사회적으로 이 뒤치기가 경원당하고 백안시되는 이유는, 승자보다 패자가 훨씬 많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미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외줄로 이루어진 가느다란 전장 위에서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밑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물론 과거에도 불안은 끊이지 않았지만, 호환마마같이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마음이 편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작금의 세태는 우리에게 정당한 패배와 과정의 미덕을 외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면해버린 정당한 과정의 미덕이 떠나간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고래로부터 수많은 명장들이 전파해 온 '정당한' 뒷치기의 문화, 손자의 망령이 채운다. 뒤치기의 문화는 이 시점에서 만개할 대로 만개하여, 직장인 손자병법과 같은 처세술을 기록한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사회적 강자일 수록 더욱 더 능수능란한 뒤치기를 구사하게 되었다.





뒷치기를 잘 하는 자가 강자이던 시대에서 강자일 수록 뒷치기에 능숙한 시대가 되어 간다



발달한 사회일 수록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고, 뒷치기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현대의 심벌이자 첨단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에서의 뒤치기는 여전히 논란거리 일순위를 지키고 있다. 믿기지 않게도 뒷치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승리 제일주의, 패배 불가주의에 따르면 인생의 낙오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정정당당한 승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지난 이천년간 세뇌되어 왔던 바에 의하면 뒷치기, 기습이란 승리를 위한 전술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들이 실제로 삶의 패배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온라인 게임이 '스포츠'의 형태에 한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 지상주의가 파고들지 못한 단 하나의 분야


그것은 바로 이 뒷치기가 전술, 즉 전쟁의 기술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엄연한 한계 때문이다. 즉 승리가 지상명제가 되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뒷치기가 맥을 추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가열된 경쟁을 요구해 가고 있고, 이제 삶의 80%가 넘는 부분이 송두리째 전쟁터가 되어버린, 실로 환장할 시대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이 승리제일주의, 결과제일주의가 침범하여 완벽히 점령하지 못한 분야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 몇 남지 않은 분야는 바로 미술,음악,춤,철학과 스포츠이다. 이곳은 인간의 순수성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성역들이다.


물론 이 분야들에서도 결과제일주의에 매달려 아동바동 기를 쓰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십년 넘게 찌든 가난을 감싸안고도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가 아직 우리 시대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어두운 골목에서 손을 씻고자 주린 배를 감싸안고 샌드백을 두드리던 복서가 남아있는 한, 돈도 되지 않을게 뻔한 순수 철학같은 것을 전공하면서 산사 암자에 틀어박혀 이십년 넘게 공부를 하는 철학도가 있는 한 손자의 뒷치기는 영원히 이 계통을 점령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뒷치기를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된다.


아까 그 여가수,복서 지망생, 고적한 암자의 철학도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런 계통의 사람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는 아직 뒷치기로 상징되는 승리 지상주의가 점령하지 못한 공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온라인 게임은 그 특유의 익명성으로 인하여, 제작사나 유저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마치 가면 무도회처럼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분야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군상 속에서 일단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점검하고, 삶의 전쟁터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게임을 하나의 스포츠로 자신도 모르게 인정하고, 승리 제일주의 보다는 정정당당한 승부, 결과에 상관없이 싸워보고 승자가 패자의 손을 잡으며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이상향을 그리게 되었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할 지 몰라도 온라인 게임은 이제 하나의 스포츠가 된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 스포츠와 프로 스포츠는 판이하게 그 면모를 달리한다고 하지만




하지만, 신사적인 스포츠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스포츠의 정의는 무엇인가? 단순히 승패만을 가리는 것이라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스포츠의 존재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나, 미국이 치르고 있는 이라크 전쟁도 그 범주에 포함해 버리는, 실로 믿기지 않는 범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스포츠, 게임의 정의는 '상대를 살상하지 않으려는 의도 안에서 서로 최선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즐길 수 있는 유희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대명제에서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 있어야만 그것이 즐거운 스포츠 게임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멋진 축구게임을 해서 명승부를 펼친다 해도 승자가 패자를 총살한다면 그것은 이미 게임이 아니라는 소리다.


온라인 게임은 일단 이러한 명제에 잘 부응할 수 있다. 아무리 상대에게 칼질해 봐야 죽고 다치는 것은 캐릭터일 뿐, 해당 캐릭터의 유저는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일까? 해당 캐릭터를 수천수만번 죽여서 아이템을 빼앗고 게임 플레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경우 그 유저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게임의 범주를 정하는 지표에는 아직 이 정신적 살인행위가 누락되어 있다. 왜? 게임을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지적인 수준은 아직 그 정도 수준일 뿐이니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익명성의 가상세계는 온라인 게임에게 씻지 못할 원죄도 함께 붙여버렸다. 그것은 바로 익명성이 가지고 있는 양날의 위험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서, 복면을 써버리면 멀쩡한 신사라도 엉뚱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절대 벗겨지지 않는 무적의 복면이라면 아예 홰까닥 돌아버릴 사람들이 즐비하다. 21세기 현대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스트레스의 무게는 이 홰까닥 돌아버리는 사람의 수효에 비례한다.


유저의 집을 대상으로 도둑질과 강도질이 가능했던 MMORPG 울티마 온라인이 어떻게 돌아갔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성관계가 가능한 게임을 만들어놓고 레벨 차이나 아이템의 격차에 따른 성폭행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할 때 그 결과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게임은 분명히 하나의 스포츠이며, 상대의 목을 그어서 완전히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해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전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익명성이 불러올 결과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에 절대로 신사적인 스포츠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빈자리에 끼어드는 것이 바로 손자의 망령, 절대필승주의, 뒷치기인 것이다.





울티마 온라인을 되돌이켜 보면 인간의 머릿속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오늘도 게시판은 난리지만


뒷치기는 온라인 게임이 존재하는 이상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실제 인간일 경우 그것은 퍽치기로 인정되어 징역을 살아야 마땅한 범죄가 성립하지만, 퍽치기의 대상이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3D의 캐릭터인 이상 뒷치기는 아직 건드릴 수 없다.


게임업체들도 돈을 벌어 아내와 자식을 먹여살리고 노부모를 공양해야 하는 사람들의 조직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게임을 최대한 다양하게 상용화하여야, 즉 히트치도록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를 가장 잘 표현하면서 우회적으로 그것을 풀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은 바로 우리의 삶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구도, 전쟁구도를 따르는 것이다.





전쟁 구도를 따르는 것이 곧 현대의 삶을 투영하는 시대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비참하지만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뒷치기는 바로 이 전쟁의 구도를 틈타 침습해 들어와서, 게임은 곧 리얼한 전쟁이라는, 게임사가 부르짖는 모토 뒤에 몸을 숨긴 채 사람들을 현혹한다. 정신적 살인행위 무차별 저지르려는 자들이 몰고오는 그런 당황스러운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념이니 게임매너니 하는, 현실세계의 법을 제법 그럴 듯하게 본딴 각종 제재장치를 만들어 스스로를 제어하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들에는 강제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무하기에 실제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간혹 일탈을 벌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아낼 길이 없는 것이다.



호부호형을 하지 못해 길떠나는 홍길동


고대의 게임들이 막상 유희거나 놀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정받는데 거의 수백 년의 세월이 걸렸다. 천 년 전에는 바둑에서 외통수에 몰린 사람이 화딱지가 나서 사시미 칼을 들고 상대의 포를 뜨려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그건 알 바 아니고, 우리는 놀이나 유희라는 하나의 신개념이 자리잡는 데에 적어도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콘솔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성을 지닌 온라인 게임이 대한민국에 태동한 것은 1993년 9월 나우콤의 단군의 땅이다. 즉 온라인 게임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잘해야 이십 년 정도도 지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


지금이 아무리 고속화 시대가 되어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문화가 발달했다고 우겨도 개념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 그 자체는 고대 그리스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역사에 없던 전혀 새로운 가상현실의 인식과 개념을 이십 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온전히 정립하려 드는 것은 엄연히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게임이되 게임이라 부를 수 없고, 가상의 공간이되 지독하리만큼 현실과 비슷한 이 이상한 공간은 우습게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딜레마와 연장선이 닿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홍길동의 딜레마는 길 떠나면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게임이 지닌 딜레마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뿐이랄까.








※ 이어지는 '피할 수 없는 다구리는 과연 대세인가' 편에서 계속
Inven 대남 - 남중훈 기자
(dainam@inv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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