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칼을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닐까...?
'헬리쉬 쿼트(Hellish Quart)'는 지난 2월 17일, 얼리 억세스 딱지를 달고 세상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온갖 게임 장르 중에서도 이젠 꽤 매니악해져버린 대전 액션 게임이면서, 동시에 '극사실주의 검술'이라는 흥행과는 영 먼 거리에 있는 컨셉을 달고 나타났죠. 영상을 봤을 때 까지만 해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주의를 표방한 게임 치고 대중적 재미까지 휘어잡은 게임은 지극히 드무니 말이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 이거 생각보다 더 재밌습니다?
게임명 : 헬리쉬 쿼트 | 개발사 : 쿠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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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칼은 공평하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헬리쉬 쿼트는 극사실주의를 표방합니다. 체력 바 따위는 없습니다. 세상 어느 싸움에 체력 바가 있겠습니까? 집에서 석달 열흘을 자다 나온 사람도 잘못 맞으면 주먹 한 방에 뻗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은 체력바가 필요 없습니다. 등장 인물 모두가 사실적인 '인간'들이고, 이들이 쥐고 있는 칼도 장난감이 아니니까요.
헬리쉬 쿼트는 짧게는 한 방에 승부가 갈립니다. 내가 공격한 부위, 공격 당할 시 상대방의 움직임, 공격 방향 등에 의해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긴 합니다만, 제대로 카운터가 터지면 찌르기 한방에 상대가 누워 버립니다. 엄청난 쾌감이죠. 물론, 반대로 그 한 방에 내가 누울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허망함이죠.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대전 액션 게임인 '모탈 컴뱃'을 봅시다. 각종 신체 부위가 뎅겅뎅겅 날아다니는 게임이지만, 모탈 컴뱃의 등장인물들은 웬만한 초인보다 더 엄청난 내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기 두세개쯤 파열되도 잽싸게 움직이고, 무릎뼈가 아작이 나도 발차기를 날립니다. 모탈 컴뱃의 페이탈리티가 잔인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상대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분명 다시 일어나서 덤빌 테니까요.
반면 헬리쉬 쿼트의 등장인물들은 개복치가 따로 없습니다. 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얕은 칼 몇 대 정도는 맞고도 몸으로 때우는 용감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공중 콤보를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나고, 몸이 반으로 접혀도 입 한번 쓱 닦고 다시 자세를 잡으며, 불에 태워지고 전기 찜질을 당해도 멀쩡하게 일어나는 다른 대전 액션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이런 하루살이가 따로 없습니다.
게다가 칼질은 또 얼마나 휘적휘적하는지, 다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칼부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초라함이 있습니다. 저 휘적거림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정교한 검술이며, 인류 역사의 위대한 싸움꾼들이 쌓아올린 금자탑이란 건 머리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잖아요. 게임에서는 그냥 휘적거림으로 보일 뿐입니다.
굳이 게임을 하지 않아도, 영상으로만 봐도 이 정도는 보입니다. 한 방 맞으면 지는 게임이고, 검술 또한 사실주의로 만들어져 뭔가 안 멋진 게임. 그 때문에, 사실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긴 힘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1500개가 넘는 리뷰 중 95%를 넘는 리뷰가 이 게임을 긍정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눈으로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재미가 분명 있다는 뜻이죠. 지금부터 설명할 부분이 바로 그 '재미'입니다.
대전 액션의 '근본'으로
'모르면 맞아야지'
대전 액션에 입문하는 게이머들이, 자신을 꼬신 고인물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그만 하라고 애원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두들겨 맞는 말이죠. 숱한 게이머에게 공포를 심어준 게임 '철권'을 예로 들어 봅시다.
'철권7' 기준으로 캐릭터가 50종입니다. 각 캐릭터가 적게는 60개부터 많게는 150개가 넘는 기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기술에는 애니메이션과 피격, 방어 딜레이 프레임이 있습니다. 내 공격을 적이 막았을 때 발생하는 빈틈, 맞았을 때 발생하는 빈틈이 있죠. 반대로, 기술을 헛쳤을 때는 내 캐릭터에 딜레이 프레임이 발생합니다.
이걸 잡아채는 딜레이 캐치 기술들이 있습니다. 발동이 빠른 기술은 10프레임, 0.17초만에 발동되며, 캐릭터마다 11프레임, 12프레임, 13프레임 등 상대의 헛점을 노릴 기술들이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상대가 공중에 뜨면? 이 때는 빡세게 외운 공중 콤보를 써야 합니다. 운이 더 좋아서 상대가 벽으로 몰리면? 벽 콤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야 할 게 많은데 모르면 맞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복잡함을 근본까지 파고들면 결국 가위바위보입니다. 공격이냐, 방어냐, 헛점을 노리고 반격이냐의 반복이죠. '헬리쉬 쿼트'는 이 근본을 강조합니다. 상대를 공격하지 않을 땐, 상대의 공격을 알아서 방어합니다. 내가 공격할 때는 빈틈이 드러나며, 상대의 방어가 어느 쪽에 집중되는지를 살피면 상대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격은 방향별로 나뉘며, 커맨드 입력에 따라 기본 공격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공격하는 기술들이 있습니다.
기술의 수는 20가지를 조금 넘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술을 모른다 할지라도 기본기를 제대로 맞으면 게임은 한 방에 끝이 납니다. 한방에 끝이 나기에 전투 시간이 짧고, 전투 시간이 짧기에 헬리쉬 쿼트의 게이머들은 짧은 시간 안에 집중력을 폭발시킵니다. 상대의 미묘한 움직임까지 살피며, 상대가 어디를 공격할지, 나는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야 하죠.
이 집중의 순간에, 헬리쉬 쿼트의 재미가 다가옵니다. 철권이든, KOF든, 대다수의 대전 액션 게임은 일정 수준에 이르기 전까진 게임을 얼마나 잘 '하느냐'보다 얼마나 잘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모르면 맞는 거죠. 하지만 헬리쉬 쿼트는 이 '알아가는 시간'을 최소화했습니다.
게임 시작 후 30분이면 모든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이 때부터는 얼마나 게임을 잘 아느냐가 아닌, 누가 더 본능적으로 싸움을 잘 하느냐가 승패를 가릅니다. 그리고 내 본능과 상대의 본능이 충돌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웬만한 게임에서 느끼기 힘든 진한 풍미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 맛에 게임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 과정에서, 실력이 점점 늘어나는게 느껴집니다. 게임 조작이 퍽 간단한 편이기에 새로운 기술을 알아간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기술을 쓰는가?'가 아닌, '언제 기술을 써야 하는가?'를 알아가는 기분이 들죠.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재고, 상대의 주력기를 파악한 후 벼락같이 빈틈을 노려 승리를 따낼 때의 기분은 다른 대전 액션 게임보다 훨씬 강렬한 승리감을 줍니다. 피하고, 막고, 공격하기. 대전 액션의 '근본'입니다.
다만, 여기까지가 지금의 '헬리쉬 쿼트'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얼리 억세스 상태이기에 스토리 모드는 영상밖에 존재하지 않고, 캐릭터는 다섯 뿐이며, 캐릭터 별 커맨드 리스트도 아직 미비합니다. 게다가 온라인 멀티 플레이도 외부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할 정도죠. 그만큼 가격이 싸긴 하지만, 혼자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에겐 딱히 메리트가 없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정식 출시가 이뤄져 온라인 매칭이 가능해진다면 분명 지금의 값어치 이상은 할 게임입니다. 헬리쉬 쿼트는 게임 실력보단, 싸움 실력을 겨루는 게임에 가깝습니다. 온라인 매칭이 열린다면 게임상의 내가 아닌, 날것의 내가 어느정도의 싸움 실력을 지녔는지 알게 된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