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하다 접어? 이런 퀘스트, 유저가 화난다

칼럼 | 이동원 기자 | 댓글: 40개 |
분명 시초는 아니었으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등장은 MMORPG 퀘스트 시대의 서막을 여는 의미 깊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와우 이후로 등장한 MMORPG들이 의무사항처럼 도입한 퀘스트들은 와우를 넘기는 커녕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NPC가 느낌표를 띄우고 있고 퀘스트를 받아 수행하며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세계관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가장 큰 방점이 찍혀 있었던 와우와 달리 다른 MMORPG들은 깊이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도, 뭔가를 전달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 이제는 어느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느낌표 NPC ]


그러는 사이 게이머들은 지쳐갔다. 와우를 뛰어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비슷한 수준의 감동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는 게임조차 만나기 힘들었다. 퀘스트의 숫자가 수 천 개에 달해도 와우와 같은 반응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게임사들은 점점 퀘스트를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퀘스트는 이제 끝없는 튜토리얼이 되었다. 게이머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저 일방통행의 퀘스트만 따라하면 성장할 수 있다. 퀘스트는 이제 사냥이라는 과자봉투에 들어있는 반짝이 스티커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차피 사냥하러 가는 것, 그냥 퀘스트는 보너스로 받아 가는 느낌이다.


이제는 어떤 MMORPG에서 ‘이 게임은 세계관을 중요시했다’, ‘이 게임은 풍부한 퀘스트를 자랑한다’는 뻔 한 홍보멘트를 찾아보기도 힘든 시기. (그나마 블레이드 앤 소울이 전투와 함께 ‘퀘스트’를 강조하고 있다.)





[ 새로운 방식의 전투와 함께 퀘스트를 중시하고 있다는 블레이드 앤 소울.
지난 지스타 영상에 컷신 형태의 퀘스트 수행 장면이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


어찌하리. 하지 않으면 모를까, 있는 퀘스트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냥터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대체 이딴 걸 왜 만들었냐’는 절규가 절로 흘러나오는 퀘스트들이 있는데…



리스폰 타임 15분? 이 몬스터는 특별하니까


이번 퀘스트는 늑대 5마리를 사냥하고 오라는 내용. 숲 속 깊은 곳에 은신한 채로 숨어있는 늑대들은 거리가 가까워져 발에 채이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퀘스트에서 요구하는 늑대 5마리는 전체 맵에 딱 5마리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하지만 그냥 일반 몬스터) 놈들이다. 그런데 리스폰 시간도 15분으로 설정되어 있다.


문제는 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가 두 명 이상일 때 발생한다. 어쩌다 한 사람이 4마리를 잡았는데 같은 퀘스트를 하는 다른 사람이 1마리를 잡아버리면 꼼짝없이 둘 다 15분을 멍하니 기다려야 하기 때문. 파티를 하면 되지 않냐고? 파티 공유도 되지 않는다면? 이 퀘스트는 실제로 반지의 제왕 온라인에 있던 것이다.





[ 사실 늑대는 알고 보면 참 매력적인 동물인데... 게임에선 단골 몬스터로 나온다 ]


이런 퀘스트는 “이 늑대는 특별한 몬스터로 오직 세상에 5마리만 존재한다! 이렇게 특별한 몬스터가 죽고 나서 바로 나타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어떤 개발자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물론 가상 세계의 사실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미 죽은 늑대 5형제를 다른 유저에게 또 죽이라고 시키는 마을 NPC는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일까.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말이 안 되기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다.


동시에 퀘스트를 깨려는 게이머들을 마냥 죽치고 앉아있게 만드는 퀘스트의 예는 이 외에도 다양한데, 퀘스트 게임의 모범답안으로 꼽히는 와우에서도 이런 퀘스트를 볼 수 있다.


악명 높았던 공격 신호 퀘스트가 대표적이다. 케리스트라자라는 NPC 용을 타고 비행하는 내용인데, 한 명이 퀘스트를 하는 동안 다른 유저들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주 긴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 부분 즘에 해당하는 퀘스트고, 이 퀘스트를 수행해야 인스턴스 던전에 들어가 보상으로 높은 등급의 파란색 아이템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퀘스트. 그래서 이때만큼은 그 아무리 전쟁이 심한 서버에서도 호드와 얼라이언스 사이에 암묵적인 평화 협정이 맺어질 정도였다.





[ 어제 칼을 맞댔던 사이라도 오늘은 줄을 서서 퀘스트를 한다. 전쟁종결자 케리스트라자 ]


사실 케리스트라자라는 용은 한 마리뿐이므로 사실적이라는 면에서 이게 맞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케리스트라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유저를 만났을 때 마치 ‘난 이런 임무가 처음’이라는 식으로 똑 같은 대사를 할 리도 없다. 이러나저러나 따지고 들었을 때 말이 안 되는 것이라면 유저 편의를 우선시 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다.


30분 기다려서 드디어 자기 차례가 왔는데, 실수로 퀘스트를 다시 해야 한다면? 키보드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



아까 잡았던 몬스터라고? 어쩌라고. 또 잡아!


이번 퀘스트는 ‘하얀 늑대’를 사냥하고 하얀 늑대의 이빨을 가져오는 내용. 퀘스트는 쉬웠다. 하얀 늑대를 사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을 NPC가 요구하는 늑대 이빨을 모두 가져다주자 연계 퀘스트가 뜨는데, 이번에는 하얀 늑대 가죽을 가져오란다.


어쩌랴. 다시 사냥터로 가서 다시 하얀 늑대를 사냥한다. 하얀 늑대는 검은 늑대와 사나운 늑대 사이에 섞여있다. 좀 더 레벨이 높은 검은 늑대와 사나운 늑대를 조심스럽게 피해 하얀 늑대만 골라잡고 싶었지만, 밀집도가 높아 어쩔 수 없이 검은 늑대, 사나운 늑대도 함께 사냥하게 되었다.


마을에 돌아가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니 이번에는 ‘검은 늑대의 이빨’을 가져오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왜 퀘스트를 받기 전에 잡은 검은 늑대는 이빨을 주지 않는 것일까. 하얀 놈, 검은 놈, 사나운 놈 다 싹 쓸어달라고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는 NPC가 그렇게 미울 수 없다. 아마 다음에는 검은 늑대의 가죽을 가져오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사나운 늑대를 잡아오라고 하겠지.





[ 그래... 한 두 번 잡고 말 거라면 리소스가 아까울 수도 있다 ]


이런 퀘스트들은 개발과정에서 지역별 레벨 디자인이 퀘스트에 우선되었을 때 흔히 나타난다. 늑대소굴은 10레벨에서 14레벨까지의 몬스터가 나타나는 곳이고, 그 곳에서 유저들은 14레벨 정도까지 사냥을 하도록 정해놓고 나면 어쩔 수 없이 퀘스트는 그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퀘스트가 몬스터 천 마리를 사냥하라는 내용일 수는 없으니 (물론 그런 게임도 있다) 퀘스트 하나는 20마리 정도의 몬스터 사냥으로 분량이 제한되고 한정된 몬스터에서 정해진 레벨구간을 메우려면 늑대 가죽에서 늑대 뼈의 골수까지 쪽쪽 빨아 재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짜증날 정도로 마을과 사냥터를 왔다갔다 거리게 만드는 연계퀘스트가 너무 빠른 레벨업을 보정하기 위함이거나, 적당히 마을로 돌아와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것까지 고려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은 편이다. 어떤 게임의 퀘스트는 아예 ‘과연 개발자가 이 게임을 플레이 해보았나’ 싶을 정도로 동선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 반지의 제왕 온라인의 호빗 종족 배달 퀘스트 동선은 유명했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유저들이
‘더 이상 호빗은 무리네요. 드워프로 새로 키우겠습니다’라는 채팅글을 올릴 정도. ]


최근에는 여러 명의 퀘스트 기획자가 분업방식의 공장 시스템을 도입해 만든 게 아닐까 싶은 게임도 있었다. 드래곤볼 온라인에서 20레벨 초중반이 되면 부채 재배맨, 엽록 재배맨, 큰부채 재배맨, 왕부채 재배맨이라는 몬스터를 만나게 된다. 몬스터 이름에서부터 감이 오는데, 부채 재배맨을 잡고, 엽록 재배맨을 잡고, 큰부채 재배맨을 잡고, 왕부채 재배맨을 잡는 격동의 퀘스트 수행과정을 모두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다른 NPC가 다시 부채 재배맨을 잡으라고 한다. 역시나 이어서 엽록 재배맨, 큰부채 재배맨, 왕부채 재배맨을 잡아야 한다. 좋다. 두 번까지는 이해한다. 다시 일련의 과정을 모두 끝내고 홀가분한, 그리고 한 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마을을 찾았을 때! 다른 NPC가 다시 부채 재배맨을 잡으라고 한다면? 다시 한 번 키보드에 묵념을…





[ 재배맨을 멸종이라도 시켜야 할 기세... 잊지 않겠다 재배맨 ]


드래곤볼 온라인의 지난 테스트에서 이런 과정을 겪었던 기자는 그만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퀘스트를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을 완화해서 같은 지역, 같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퀘스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해도 유저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조만간 오픈베타를 시작하는 드래곤볼 온라인이 마의 재배맨 코스를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정했으리라 믿어본다.



우리는 즐겁기 위해 퀘스트를 한다


이 외에도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퀘스트의 예들은 많다.


운고로 분화구까지 갔더니 갑자기 주변에서 구할 수 없는 미스릴 형틀을 가져오라고 했던 와우의 에이미 추적 퀘스트는, 예상을 벗어나는 준비물을 구할 수도 없을 때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파티를 맺고 수행하는 퀘스트에 좀처럼 리젠되지 않는 상자를 유독 나만 운이 없어 먹지 못했을 때의 안타까운 심정은 경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와우의 전 수석 디자이너였던 제프리 카플란(Jeffrey Kaplan)은 작년 게임 개발자 회의(GDC)에서 자신들이 와우의 퀘스트에서 저질렀던 실수들과 그로부터 배운 교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동시에 너무 많은 느낌표들이 떠서 퀘스트를 닥치는 대로 쓸어 담게 되는 현상. 퀘스트의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읽지 않고 넘어가는 모습. 해결의 실마리를 주지 않고 너무 미스터리하게 퀘스트를 만드는 것. 연계 퀘스트의 배열이나 퀘스트의 흐름이 좋지 않은 경우. 한 가지 아이템을 너무 많이 모아야 하거나 너무 다양한 아이템을 모으도록 한 퀘스트. 예측할 수 없는 확률로 퀘스트 아이템이 드롭 되는 것.”





[ 와우도 처음부터 퀘스트가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컨텐츠가 추가되면
개발자가 직접 플레이해보는 관행이 '실수'를 찾아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


그가 말한 와우의 ‘실수’들은 대부분 퀘스트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거나 오히려 게이머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되는 내용들이었다. (관련기사 : WoW 수석개발자, 퀘스트 디자인의 실수와 교훈)


우리는 즐겁기 위해 게임을 한다. 그러니 설령 세계관을 충실히 전달하고 세계의 사실적 완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퀘스트를 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퀘스트가 자유로운 플레이의 장애물이 되거나, 유저들의 플레이 패턴을 제한하기 위한 용도일 때는 말할 필요도 없다.


퀘스트가 장대한 대서사시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늘 전달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퀘스트가 불편을 주거나 스트레스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어떤 퀘스트가 그렇냐고? 직접 해보면 안다.


PS. 여러분을 화나게 했던 퀘스트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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