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용하는 물건 중에 가장 깨끗한 제품을 꼽으라면 키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줄기차게 바꿨으니까. 키보드에 관심이 생기기 전을 제외한다면 리얼포스 45g을 1년 좀 넘게 사용했었으며 그게 가장 오래 사용한 키보드다. 물론 지금은 다른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새로 구입하는, 소위 얼리어답터 재질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키보드만큼은 정말 많이 바꿨다. 관심의 척도겠지. 그만큼 사용해 보고 싶은 제품들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커스텀 키보드에 살짝 발을 담갔다가 겨우 빠져나온 시절도 있었다. 1개에 천 원 정도 하는 스위치 100알을 윤활한 후 정확히 3주 만에 모두 처분했다. 재밌긴 한데 자칫하면 일상과 통장 잔고가 위험해질 것 같았다.
다만 1년 남짓 잘 쓰던 리얼포스 45g을 바꾸게 된 계기는 확실하다. 예전에야 내게 키보드란 타자를 친다기 보다 게임기 스위치에 가까운 도구였기에 무접점 50g이라던가 키압이 높기로 소문난 흑축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타자를 치는 직업에 종사하다 보니 열심히 일한 날의 특별한 훈장과도 같았던 뻐근한 손가락이 이내 일상이 되어버리더라.
"30g? 그거 하드 코딩하는 개발자들이 쓰는 거 아니야?"라며 일반 적축도 오히려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고 코웃음을 치던 나인데. 어느덧 순한 맛 30g에 익숙해지고 사무실과 집에 각각 한 대씩 마련하여 잘 쓰고 있다. 덕분에 온종일 기사를 써도 손이 아프지 않지만 가벼운 스위치에 익숙해진 만큼 더 이상 독특한 키보드와의 접점이 없어지고 있다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었다.
그러던 중, 직장 동료 책상에 놓인 게이밍 브랜드의 펜타그래프 키보드를 발견했다. 그래 이거야. 기계식 스위치 계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체리(Cherry)에서도 로우 프로파일 스위치를 생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렇게 'CHERRY MX BOARD 10.0 Low Profile RGB(이하 체리 MX BOARD 10.0 로우 프로파일)' 게이밍 키보드를 만져볼 수 있게 되었다.
■ 제품 정보
※ 리뷰는 실버 모델로 진행하였습니다.
체리 MX BOARD 10.0 로우 프로파일 RGB 기계식 게이밍 키보드
구분 : 유선 풀배열 기계식 게이밍 키보드 (109키)
스위치 : 체리 MX LP RED (45g, 적축) / 체리 MX LP SPEED (45g, 스피드축, 국내 입고 X)
색상 : 실버 / 블랙
키캡 재질 : ABS
소프트웨어 : 전용 유틸리티 지원 (ESC키와 F1 사이에 위치한 CHERRY ASSISTANT 키 지원)
조명 : 1,600만 가지 색상 표현이 가능한 RGB 백라이트
케이블 : 1.6m 탈착식 분리형 케이블 (USB Type-A to USB Type C)
크기 및 무게 : 430 x 130 x 22 (mm) / 960g
구성품 : 키보드 / 탈착식 케이블(A to C) / 알루미늄 전용 케이스
보증기간 : 2년
기타 기능 : 안티고스팅 / 폴링레이트(1,000Hz) / 매크로 등
가격 : 233,000원 (22.05.00 기준)
체리 MX LP(Low Profile) RED 스위치(이하 체리 LP 적축)를 짧고 굵게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짧고 굵은 체리 적축이었다. 일반적인 체리 적축과 동일한 리니어 방식을 따르며 입력을 위해 필요한 작동력(Actuation Force) 또한 같다. 차이점은 로우 프로파일을 따르는 만큼 총 이동거리(Actuator Travel, Total Travel Distance)가 짧고 입력 지점(Pretravel, Actuation Point)이 낮으며,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필요한 초기 압력(Initial Force)이 약간 높다는 특징이 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키 입력을 위해 필요한 힘은 45g으로 동일하지만 총 이동거리가 짧기 때문에 힘이 덜 들어간다. 여기서 덜 들어간다는 것은 힘을 주는 시간이 짧다는 뜻이다. 얕게 눌러도 동작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입력 지점이 더 낮다. 그리고 스위치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압력은 일반 체리 적축과의 차별점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짝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더 나아가 물리적 움직임이 줄어들기 때문에 스위치의 내구성이 2배, 게이밍 광축 키보드의 스위치와 비슷한 1억 회 프레스 수명을 갖춘 스위치라는 강점도 있다.
개인적으로 체리 적축만 5번 정도 구매와 방출을 반복했었는데, 이유는 체리 적축의 소리가 너무 내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방출했던 이유는 손에서 억지로 힘을 빼는 구름 타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리 적축은 특성상 필요 압력 이상으로 힘을 주면 걸리는 것 없이 쑥 눌리는 선형 방식의 리니어 스위치인데 내가 사용할 때 스위치가 키보드의 하부, 즉 보강판을 때려 울리는 소리와 촉각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유년 시절부터 멤브레인 키보드에 익숙한, 내 선배부터 동년배들은 특별한 계기로 인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을 경우 나처럼 파워 타건러 일 것이다. 손끝마디로 걸쇠를 느끼거나 혹은 무언갈 허물어뜨리며 타자를 치는 것에 익숙하지, 스위치를 누르는 것엔 익숙하지 않다. 구름 타법을 연습하기 위해 얕게 누르다 보니 작동 지점까지 스위치가 내려가지 않아 오타가 심해지고, 이게 일의 효율과 직결되니 방출했었다. 하지만 감성이 넘치는 새벽에 유튜브에 업로드된 적축 키보드의 ASMR을 들으면 또 그것만큼 그리운 소리가 없어서 들이고 내보내고를 반복했던 것 같다.
체리 LP 적축은 일반 체리 적축에 비해 초기 압력이 약간 높은 편이라서 그랬을까, 이 스위치는 내게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과거에 체리 적축을 처음 영상으로 봤을 때의 생각했던 타건감과 비슷했다. 윤활을 해보고도 싶었고 보다 더 굵직하고 고가의 하우징과 결합된 커스텀 키보드도 도전해 보고 싶지만 일단 제품에 대한 리뷰가 먼저다.
■ 제품 사진
■ 마치며
체리 MX BOARD 10.0 로우 프로파일 기계식 게이밍 키보드는 내게 너무 만족스러운 제품이었다. 많은 영상에서 본 내 상상 속의 체리 적축 만의 타건감과 소리, 하지만 현실에선 만족스럽게 체험할 수 없었던 그 감각을 온전히 표현하는 키보드다. 다른 로우 프로파일의 키보드들이 새로운 타건감을 준다면 체리 LP 적축은 기계식 스위치의 선두이자 대표주자인 체리사에서 제작한 스위치답게 정말 일반 적축을 짧고 굵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테스트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은 점만 얘기했으니 아쉬운 점도 몇 개 뽑아보겠다. 일단 가격이 꽤 높은 편이다. 물론 게이밍 키보드라는 분야를 한정으로 한다면 중상급 정도 되는 가격대지만 일반적인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20만 원이 넘어가는 키보드가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기사를 작성하는 22년 5월 00일 기준으로 풀배열 모델밖에 없다는 것도 아쉽다. 추후 넘버패드가 없는 텐키리스 모델이 나온다면 진지하게 게임 용도로 구입할 생각이 있다.
마지막으로 국내에서는 체리 LP 적축 모델만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체리 LP 적축 스위치가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키보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스위치가 있는데 국내에서는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는 체리 LP SPEED(스피드축)을 취급하고 있는데, 이는 체리 은축의 로우 프로파일 버전인 스위치이기 때문에 더 궁금하다.
나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적축은 이게 아닌데.."라며 적축 키보드에 큰 만족을 못 한 유저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또한 세월에 쌓여가는 연륜, 인덕과는 정반대로 삐그덕 거리는 손가락 및 손목 통증 등으로 고민하고 있는 게이머들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정식 명칭은 실버지만 백색에 가까운 게이밍 키보드는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에 화이트 감성의 데스크 셋업을 추구하는 게이머들도 참고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