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일정 연기? 늦어져도 이해하마. 제대로만 나와다오!

칼럼 | 서명종 기자 | 댓글: 37개 |
게임업계에서 흔한 일중 하나는, 바로 예정된 일정의 연기입니다. 요 몇년간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 계열에서 당초 목표했던 일정이 연기되지 않았던 게임은, 기자의 기억상 없었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몇개월의 오픈베타 일정 연기가 기본이었기에, 가끔 신작을 준비중인 업체 관계자를 만나 목표 일정을 들을라치면, '그 일정에서 한 1년쯤 뒤로 생각하면 되겠군요'라고 농담반 진담반 회답한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최선의 길은, 당초 목표했던 일정에 계획했던 퀄리티만큼 개발이 이루어져 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IT/SW 산업의 특성상 두개를 모두 맞추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제품들이 일정을 연기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게임업계는 일정의 연기에 대해 관대한 편입니다.

잦은 일정 연기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있습니다. 아이온의 일정 연기에 관한 루머가 떠돌던 2008년 초, 경제전문지였던 머니투데이는 잦은 일정 변경으로 인한 게임사의 신뢰하락을 질타하는 기사를 내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슨, '게임출시 일정을 자주 바꾸다 보니, 상장된 게임사의 발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나아가 이는 게임업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주가 상승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아이온의 일정이 또 뒤로 미루어지네 마네 하는 루머가 돌던 참이었는데, 관련하여 인벤에서는 '아이온의 출시가 더 늦어져도 괜찮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한 바가 있었습니다.

☞ [논평] 아이온, 더 늦어져도 괜찮습니다. (2008.03.27)







그런데 그로부터 만 2년이 조금 더 지난 2010년 4월, 그때의 머니투데이 기사보다 좀 더 강경한 논조로 일정 연기를 질타하는 기사를 하나 접했습니다. 4월 23일 한 경제전문지는, '테라의 잦은 일정 연기는 고객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이로 인해 고객과의 신뢰에 있어서 큰 지적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잦은 일정 변경이 권장할만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고객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정 연기로 인해 게임사가 신뢰도를 잃는다면, 블리자드에 대한 신뢰도는 아마 탄광의 끝바닥에 있어야 할테고 엔씨소프트의 아이온은 지하 10층쯤에서 굴삭기로 땅을 파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게이머들의 신뢰도가 가장 높은 회사는 블리자드이며, 엔씨소프트 역시 아이온의 대성공으로 인해 엔씨표 MMO 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높습니다.

게이머들이 게임회사에 대해 신뢰도를 갖는다는 것은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그 회사가 내놓는 게임이면 내가 할만하게끔 재미있을거야' 라는 완성도와 퀄리티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신뢰도의 첫번째 요소입니다.

블리자드는 내놓은 게임중 실패한 게임이 없으면서도, 반대로 완성도를 이유로 일정 비공개와 연기는 밥먹듯 해왔습니다. 그러나 여태껏 내놓는 족족 성공한 역사를 가진 블리자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전 세계 게이머는 들썩입니다.

엔씨소프트의 아이온 역시 최초 목표 일정부터 실제 오픈베타가 이루어지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을 연기했지만, 정작 아이온은 최대 동접 27만이라는 한국 MMORPG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넥슨의 마비노기영웅전 역시, 서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예정된 오픈 시기를 계속해서 미루다가 지난 겨울에서야 오픈을 했습니다.

만일 블리자드나 엔씨소프트가 일정을 연기하지 않고 지켰다면, 넥슨의 마비노기영웅전이 서버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오픈을 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렸을까요? 아니, 그 회사들에 대한 신뢰도가 더 올라갔을까요?







두번째로는, 게임 런칭 이후 운영 서비스 문제입니다. 이래저래 말도 많지만, 엔씨소프트나 블리자드는 다른 회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운영 서비스가 더 낫다는 평을 들은지도 꽤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한게임의 정욱 대표대행이 지난 3월의 eX 2010 에서 '엔씨의 운영을 따라가는 것이 한게임의 목표'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일정 연기는 신뢰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닙니다. 게이머들도 일정 연기에 대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연기한다고 신뢰도에 그다지 큰 흠이 가지도 않습니다. 미완성인 상태로 오픈을 했다가 뒤안길로 사라진 게임들을 여러번 보아왔기에, 게이머들 역시 '미완성 상태로 나오느니 일정을 연기하더라도 제대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바꾼지 꽤 됩니다.

오픈 이후 접속자가 줄어들다가, 대규모 업데이트로 반전을 꾀하는 게임들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개발팀장이나 기획팀장을 인터뷰하다 보면 꼭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 오픈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정도 만든 상태에서 오픈을 했다면 지금보다 두세배 이상 접속자가 더 많았을텐데... 부족한 상태에서 빨리 오픈한 것 같아, 너무 아쉽다' 라고 말입니다.

게임에 대한, 게임사에 대한 고객의 신뢰를 좌우하는 것은 게임 자체의 완성도와 퀄리티, 그리고 운영 서비스입니다. 게임의 성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대했던 게임이 허접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신뢰도가 지하로 내려갑니다. 일정은 작은 종속변수일 뿐입니다.

이런 것은 게임 콘텐츠가 지니는 특수성에 기인합니다. 일단 게임은 동일한 많은 제품을 규격에 맞추어 생산하는 대량생산품이 아닙니다. 게임은 그 자체로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제품으로, 모든 게임이 다 그렇습니다. 단 하나만 존재하게 되는 창작물을 기계적으로 일정에 맞추어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이치에 맞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게임개발사의 업무 스케줄링 능력을 더욱 강화해서 가급적이면 목표 일정에 맞추는 것이 더 좋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지향해야 할 부분이지만,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크나큰 대미지를 받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게임의 출시 일정은 말 그대로 목표로만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게임은 다른 물건들과 다르게, 후불제 방식입니다. IT 기기든 뭐든 다른 제품들은 일단 선구매를 한 뒤 제품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은 게이머가 일단 게임을 해본 뒤, 게임을 할지 말지, 돈을 낼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애초에 게임의 완성도가 게이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게임을 접거나 돈을 내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또한 휴대폰이나 초고속 인터넷에 관한 소비자 불만을 다루는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중도 해지에 별다른 어려움이 있지도 않습니다. 접속을 하지 않거나 더 이상 결제를 하지 않거나 클라이언트만 삭제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연체 고지서가 날아오는 일도 없고 통장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동이체로 돈이 빠져나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경쟁 게임도 많고 이미 큰 성공을 거두어 자리를 잡은 게임들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대체재나 보완재가 풍부한 것이 게임이 지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온라인 게임은 플레이타임이 무척이나 깁니다. 몇달은 기본이고 일년, 이년 이상 플레이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돈을 내게 됩니다. 만족감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지갑이 닫힙니다. 순간의 만족감이 아니라 서비스 기간 내내 만족감을 채워야 하는 것이 게임 콘텐츠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써본 뒤에도 돈을 지속적으로 내게끔 할려면, 일년이고 이년이고 지속적으로 돈을 내게끔 할려면 게이머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서비스 기간 내내 부여하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 순위에 놓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사들이 게임의 완성도와 퀄리티가 부족하다 싶을때, 출시 강행과 일정 연기중 후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일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가 자주 쓰는 멘트가 있습니다. '일정 지킨다고 빨리 나와 망할 거냐, 아니면 일정을 연기하고서라도 성과를 낼 거냐' 하는 말 하나하고, '빨리 안나온다고 성화 부리는 게이머들은 그 게임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도 기다릴 것이니,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들어서 그 기다림에 대해 실망을 주지 않으면 된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자는 일정 연기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입니다.

비단, 테라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엔씨소프트의 '블레이드앤소울'도 있고, XL게임즈의 '아키에이지'도 있고, IMC게임즈의 '프로젝트 LD' 등 향후 나올 MMORPG 게임 모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게임들도 테라와 비슷하게, 아니 아이온 비슷하게 일정을 여러번 연기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열거한 게임들 말고도 앞으로 나올 많은 MMORPG 들 역시 일정 연기라는, 거의 정형화된 길을 밟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어진 만큼 완성도가 높아지고 더 재미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비판은 일정을 연기했음에도 게임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때 해도 늦지 않고, 기자 역시 그럴 것입니다.

출시 일정이 연기될때마다, 아이온이 연기될 때 그랬던 것처럼, 기자는 단 한마디만을 할 것입니다.

늦어져도 이해하마. 제대로만 나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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