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본인, 글에서의 1인칭 주어

칼럼 | 서명종 기자 |
내가 학교를 다닐때는 한문은 필수 과목이었고, 대학에서도 한문을 3강좌 정도 들었었다.

처음에는 시간표 때문에 부득이하게 들을 수 밖에 없었지만,

한번 듣고 나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부분도 있어서 2 강좌 정도를 차례로 더 들은 적이 있었다.

아, 물론 학점은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라.





그 중에서 재미를 돋군 것 중 하나가 바로 문자의 유래에 관한 것이다.

몇몇 개의 한자에 얽혀 있는 사연을 듣노라면 이는 문자에 관한 공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역사에 관한 수업을 듣는 것만 같아서 은근히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쉬운 예로 중국의 천자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짐(朕)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열국지나 초한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진시황이 통일하기 이전까지 짐 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1인칭 단어였을 뿐이며

누구든지 스스로를 짐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이 중국 최초로 통일을 하고 나서 짐이라는 글자를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로 못박아버렸다.

그래서 진시황을 기점으로 해서 짐이라는 단어의 용법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시기부터 새로운 뜻이 추가된 한자, 용법이 달라진 한자들이 있어서

이런 한자들이 문헌 고증의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때 한민족의 숨겨진 고대의 책이라 하여 시중에서 유행했던 몇몇 책들의 경우

그 안에 기재된 단어와 문장들이 현대적인 것들이라 하여 신뢰성이 떨어진 일도 있었다.





원래 문자나 언어라는 것 자체가 시대를 거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런 현상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변화를 겪기도 한다.





비근한 예로, 에/애/의 라는 글자의 발음이 있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글자들의 발성법을 별도로 강조하여 익히기까지 하였으나

90년대 들어서 이 세글자의 발음이 모두 “에”[é]로 통일화되는 현상이 발생을 했다.

(한글은 문자우선이기에 발음상 같더라도 문자는 달리 표기되는 것이 맞다)

발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애”나 “의”로 표기하여야 할 곳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에”가 사용되는 모습을 게시판상에서 자주 볼 수 있기도 하다.





이와 함께, 최근에 자주 쓰이는 단어중의 하나가 “필자”라는 단어이다.

그와 함께 “본인”이라는 단어도 심심찮게 사용되기도 한다.

이 두개의 단어는 3인칭으로도 사용될 수 있으나,

최근의 글들에서는 1인칭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더욱 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두 단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본인이 선택한 건데 뭘 어쩌겠어”

“이 책을 지은 필자는 그런 조류와는 생각을 좀 달리하는 듯 하다” 같은 문장들처럼

3인칭으로 사용될 때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 단어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1인칭으로 사용될 때 그러하다.





“본인” 이라는 단어는, 전두환이 유행(!)을 시켰다는 억울한 원죄도 있긴 하지만

듣는(=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자가 더 우위에 있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읽어보라고 써서 보여주는 글인데, 글쓴이가 더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면

그 글을 보는 사람의 감정이 결코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본” 이라는 글자 자체가 가진 어감이기도 한데,

무협지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본좌”라는 단어가 어떨 때 쓰이는지 알 것이다.

“본”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단어는 1인칭에서 가급적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번째로 “필자” 라는 단어인데, 글자 그대로를 풀이하자면

글쓴이 즉 Writer 라는 뜻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커뮤니티 사이트들에 올라오는 기사들 중에서도 필자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고

게시판의 간단한 글까지도 필자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형편이다.





개인적인 호불호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라는 단어가 1인칭으로 쓰인 글을 보는 경우, 무언가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아직까지 내 머리속에 “1인칭으로서의 필자”라는 단어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가지고 있거나

글만을 가지고 먹고 사는 Professional 한 글쟁이인 경우에 한정된다” 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1인칭으로서의 본인과 필자”라는 단어는

글쓴이가 스스로를 높이는 경우, 화자에 비해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경우에

사용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다.





스스로의 이런 인식 때문인지, 그간 몇몇 사이트들에 글을 꾸준히 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사이트에 글을 쓰기 이전, 몇몇 사이트에서 종종 글을 쓰기도 했었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1인칭 대명사로 필자나 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내가, 나는, 이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생각해자면 등등

여타의 무수한 대체어들을 활용하기도 했고 종종 주어를 생략한 문장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기자들이 쓴 글을 교정볼 때면, 본인이나 필자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모두 다른 형태의 문장으로 고치곤 했었다.





짐이라는 단어의 변화처럼 혹은 에라는 글자의 변화처럼

필자나 본인이라는 단어 역시 언어의 변화를 반영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자어를 직역한 순수한 단어의 뜻 그대로 보편적인 1인칭 대명사로 정착할지

아니면 내가 느끼는 개념들이 내재된 1인칭 대명사로 남을지는 모르겠다.

현재의 흐름을 보자면, 아무래도 전자쪽이 방향이 아닌가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 이 두개의 단어는 상당기간 금지 목록에 올라가 있을 듯 하다.





한때 생제르망백작 닉네임도 썼었던 iNVEN - LuPin

(lupin@inv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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