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신화 게임이 되리 #3 호란과 비극의 고장 '경기광주'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6개 |



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 지역 : 광주시(Gwangju-Si)
  • 현황 : 면적: 430.99㎢ / 인구: 총170,414세대/402,527명
  • 설명 : 동부의 태백산맥에서 서쪽으로 빗살같이 뻗은 여러 산줄기 가운데 하나인 광주산맥의 영향권에 있으며, 산악으로 둘러싸인 계곡형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남한산을 중심으로 한 광주산맥은 구릉이 많아 기복이 매우 심하고, 평지가 적어 경지면적(22.16㎢)은 시 전체 면적의 5%에 불과하다. 또한 산지의 경사가 심하여, 지형 발달 과정에서 풍화와 침식이 활발하고 퇴적은 일부 하천 주변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좁게 발달하였다.




  • [경기광주 지역 설화] #전라도 광주가 상대적으로 더 유명하기에 구별을 위해 '경기'를 붙여 '경기광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도시는 현재 성남과 서울 강남지역으로의 접근 용이성 덕분에 직장인들의 베드타운, 그리고 물류의 중심이 되었지만, 병자호란의 최종 방어선이 되면서 한반도 역사의 수많은 지면에 등장한 유적 도시이기도 합니다. 본 기사의 일부 삽화는 그림 AI(Midjourney)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온조 대왕의 혼을 모신 사당 '숭렬전'

    전(前) 왕조의 성현을 기린 조선 8전의 하나
    ●지역: 남한산성면 산성리





    숭렬전은 남한산성에 위치한 여러 건물 중 가장 신화적인 일화를 지닌 건물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비단 조선의 인물들만이 아닌, 한반도에 둥지를 틀었던 한민족의 임금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8곳의 제례 영역이 존재했는데, 이를 '팔전(八殿)'이라 합니다. 이런 조선의 팔전 중 하나이기도 한 숭렬전은 건축 당시 '온조왕사(溫祚王祠)'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는데, 여기서 온조왕은 2천년 전 형제 비류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 그 온조왕입니다.

    여기엔 한 가지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1636년(음력으로는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 개전), 남한산성 행궁에서 잠을 자던 인조는 꿈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벽의 봉암(蜂巖)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라며 일갈했고, 깜짝 놀란 인조가 누구냐 묻자 그는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말하며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잠이 싹 달아난 인조는 바로 산성 북방을 살펴보았고, 몰래 봉암을 오르던 청군을 발견,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죠.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인조는 전후 산성에 이 '온조왕사'를 짓고 봄 가을로 제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1779년 8월, 조선 최후의 명군으로 꼽히는 정조 임금이 남한산성을 방문해 이와 같은 설화를 듣고 격식을 갖추어 제를 지내게 하였고, 1795년, 광주 판관 이시원의 청에 따라 '숭렬전'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게 된 것이죠.

    남한산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백제 온조왕의 도읍지로 시작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과, 신라의 주장성이 시작이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중 신라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었지만 백제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후자로 의견이 쏠리는 경향이 있지만, 아마 조선 시대에는 전자가 더 유력한 추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호란의 비극 속 절개의 상징 '낙화암'

    병자호란 속 비극의 현장
    ●지역: 광주시 쌍령동 도평리





    경기광주의 중심 시가지인 경안동에서 다리를 건너면, 쌍령동이 나옵니다. '쌍령'은 두 개의 고개를 이르는 말로,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바 이는 오래된 지명이죠. 이중 큰 고개를 넘으면 '도평리'로 나아가는데, 이곳에 '낙화암'이 있었습니다.

    낙화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전국에 근왕병을 소집해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경상도의 병권을 다루던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 또한 울산에서 병력을 모아 광주로 향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이들에게 몰려들었고, 난민들과 함께 이동하던 이들은 쌍령리 산 위에 터를 잡고 몰아치는 청군과 싸우게 됩니다.

    허완과 민영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허완이 전사하자 패색이 역력해졌죠. 이때 남아있던 난민 아녀자들은 몰려오는 청군을 보면서 "이제 싸움은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녀자들은 이대로 오랑캐 놈들에게 붙잡혀서 더러운 굴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산 뒤쪽의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결을 택했고, 우병사 민영 또한 이를 보고 분기탱천해 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맙니다. 이때, 이들이 몸을 던진 바위가 바로 '낙화암'입니다.

    오늘날, 낙화암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해당 자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도로를 확장해야 했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낙화암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주보던 곤지암천 또한 수위가 낮아져 옛 모습은 사라져버렸죠.



    ▲ '너른고을 옛이야기2'에 실린 과거의 쌍령동



    ▲ 현재 쌍령동 도평리 일대는 모두 개발되어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인고 장군과 '매바위'

    매 발자국이 찍힌 큰 바위에 얽힌 설화
    ●지역: 남한산성면 청량산 인근




    ▲ 남한산성의 매바위(출처: 문화유산채널)

    남한산성 서장대(수어장대) 근처에는 '매바위'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있습니다. 바위 상단에는 마치 매가 발톱으로 긁은 듯한 홈이 크게 파여 있죠. 이 바위는 남한산성의 개축과 관련된 설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전, 인조는 당시 광주유수인 '이서(추후 상단의 숭렬전에 온조대왕과 함께 추존되는 인물입니다)'에게 남한산성의 개축을 명하고, 이서는 이를 벽암이라는 법명의 스님과 이인고(이회)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때 벽암 스님은 늘 하던대로 성을 쌓아 착착 작업을 진행했으나, 이인고는 보다 튼튼한 성을 축성하기 위해 완벽한 FM에 맞춰 돌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쌓았고, 결과적으로 진척이 늦어지게 됩니다.

    이 소식은 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대노한 인조는 분노의 내리갈굼을 시전, 화가 난 광주 유수 이서가 이인고를 붙잡아 심문하게 되었죠. 이인고는 사실대로 성을 튼튼히 짓다 보니 늦어졌다 답했지만, 이서는 이를 거짓이라 판단, 이인고는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때 이인고는 명이니 죽겠으나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했고, 형이 집행된 후 그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나와 몇 바퀴 돌더니 매바위에 앉아 주변을 훑어보고는 홀연히 날아가버렸죠. 이때 사람들이 놀라 바위를 살펴보니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훗날 그의 무고함이 밝혀지게 되고, 조정은 이인고의 한을 풀기 위해 청량산 기슭에 '청량당'을 지어 무고한 죽음을 당한 이인고와 그의 공사 대금 마련을 돕다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처첩을 위로하게 됩니다. 이때, 이인고가 지은 성벽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 청량당 내부, 좌측 그림이 이인고(이회 장군)와 그의 처, 첩이며, 우측은 함께 성을 개축한 벽암 스님입니다.



    60만 포로들의 비극을 보여준 '진노평'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비극적 설화
    ●지역: 현 위례신도시 지역(추정)





    옛말로는 '진터벌'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남한산성에서 광나루쪽을 향하는 평야입니다. 오늘날은 위례 신도시가 들어온 곳으로 과거 광주 권역(과거엔 서울 송파구쪽도 모두 광주에 속해 있었습니다)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아닌 곳이죠. 이 지역에는 '김승지 부인'에 대한 설화가 내려오는데, 차마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면서도 슬픈 설화입니다.

    때는 1636년 봄, 병자호란의 전조 증상이 한창 드러나고 있을 때, 영의정 '김유'의 부인이 생일을 맞이하면서 조정대신들의 부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전쟁의 열기가 눈앞에 다가온 상태였기에 당연히 부인들 사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논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부인들은 잡혀 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했고, 이참판의 부인은 더 강력히 이를 주장했으나 김승지 부인은 그때가 되어 판단하겠다고 말해 많은 이들의 눈총을 샀습니다.

    그해 말 전쟁이 시작되고, 고관대작의 부인들은 피난길에 청나라 장군 용골대의 군사에게 모조리 잡히게 됩니다. 이때 김승지 부인은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며 술도 마시고 연기를 한 끝에 용골대의 가장 아끼는 부하장수의 목을 은장도로 찔러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곤 본인도 칼을 맞아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용골대는 대노하여 김승지 부인의 시신을 까마귀 밥으로 주라 명했고, 청군은 김승지 부인의 시신을 토막내 진터벌에 흩뿌리게 됩니다. 앞선 생일잔치에서 정절을 주장했던 이참판 부인은 막상 잡혀가자 온갖 아양을 부리며 용골대의 첩이 되어 청나라로 가버렸고 말이죠.

    역사적 사실을 덧붙이자면, 이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60만에 달합니다. 그중 50만은 여인이었고, 조선은 이들의 귀환을 위해 막대한 재산을 바쳐야 했죠. 그렇게 돌아온 이들은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환향녀(還鄕女, 훗날 '화냥년'이란 욕설이 됩니다)'로 불리며 멸시당했고 이들 중 임신했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는 오랑캐의 아이라는 이유로 '호로(胡虜, 오랑캐의 포로)'라는 이름이 붙어 '호로새끼'라는 욕으로 쓰이게 됩니다. 원치않게 끌려갔고, 어렵게 고향을 밟았지만 끝내 멸시받는 삶을 살게 된 아녀자들의 슬픔 속에서 내려온 설화가 바로 진노평 설화죠.



    ▲ 오늘날 위례 신도시가 들어선 곳으로 추정되는 진노평



    송도삼절 황진이의 설화가 남은 '송암정(松岩亭)'

    기생에서 불자가 된 황진이의 설화
    ●지역: 남한산성 동문 인근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동문을 향해 쭉 걷다 보면, 절벽에 툭 튀어나온 바위가 하나 보입니다. 현재는 성곽 밖으로 돌출된 바위만 남아 있지만, 과거 이 자리에 '송암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존재했습니다. 현대 한국어로는 '솔바위 정자' 정도로 칭할 수 있겠죠. 이 송암정에는 송도삼절로 유명했던 기생 '황진이'와 얽힌 설화가 있습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기생으로 살던 과거를 묻고 불가에 귀의한 후 3년의 수행을 마치고 하산하던 황진이가 송암정 옆을 지나던 차, 송암정에서 기생들과 유흥을 즐기던 한량들이 황진이를 보게 됩니다. 머리를 깎고 승적에 이름을 올린 황진이였지만, 이전의 얼굴이 어딜 간 건 아니었기에 한량들은 황진이를 희롱하면서 자신들의 술판에 강제로 초대하게 되죠. 황진이는 예의바르게 이를 거절했으나 한량들은 막무가내로 황진이를 희롱합니다.

    이에 참다 못한 황진이가 불경을 읊으며 그들을 훈계했고, 자신 또한 기생이었으나 과거의 업을 씻고자 고행을 하는 중이니 업보를 쌓지 말고 살아가라 말했습니다. 이에 좌중의 모두가 넋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던 중 장구를 치고 술을 따르던 기생 한 명이 "스님의 말을 듣다 보니 세상 살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졌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습니다.

    이후 괴이한 소문이 하나 퍼지게 됩니다. 달이 밝고 고요한 밤마다, 송암정 근처 어디에선가 남녀들의 노래 소리와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었죠. 오늘날에 이르러 송암정은 사라졌고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이 구전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효자에게 잉어를 준 '효자우물'의 전설

    효자에게 보답한 우물의 이야기
    ●지역: 남한산성 내





    남한산성 내에는 과거 약 80개의 우물이 존재했는데, 효자우물(효자정)은 그 중 하나입니다. 효자우물은 숭렬전과 국청사를 오르는 길 중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약수터로,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는 이들이 마실 물을 길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효자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내려옵니다.

    남한산성 북문 안 작은 마을에 '정남'이라는 이름의 12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남의 가족은 아버지가 하루하루 품을 팔아 연명하는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어느 해 아버지가 병에 걸려 눕게 되었고, 밥을 지을 곡식마저 떨어지면서 정남은 결국 쪽박을 들고 구걸을 나서게 됩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한 사람이 정남의 집에 들러 아버지를 진맥하고는 "얘야, 네 아버지의 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가 없다. 그저 큼직한 잉어를 구해다가 푹 고아 드리면 깨끗하게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정남은 잉어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으나, 겨울철의 산 속에서 잉어를 구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고, 주변인들을 수소문하고도 잉어를 찾지 못한 정남은 사람의 흔적이 없는 한 우물 앞에 멈춰 우물물을 들여다보며 제발 잉어 한 마리만 구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후 다시 우물을 들여다 본 정남은 놀랍게도 우물 속에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겨우 이를 건져낸 다음 푹 고아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문이 알려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정남을 칭찬했고, 정남이 기도했던 산기슭의 우물은 '효자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인물


    ●신립 장군
    ●지역: 곤지암읍



    ▲ 곤지암에 위치한 신립 장군의 묘

    경기광주의 남쪽, 이천과의 경계가 시작되는 부근에 '곤지암(昆池岩)읍'이 있습니다. 영화 곤지암의 영향으로 꽤 험악한 이미지를 띄게 된 동네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리조트가 존재하는 휴양지임과 동시에 소머리국밥이 유명한 지역이죠. 이 곤지암읍의 이름이 정해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의 영웅 중 한 명이자, 아직까지도 논쟁의 주제가 되곤 하는 '신립(申砬) 장군의 일화 때문입니다.

    왜란의 역사를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신립 장군의 최후는 광주가 아닌 조금 더 남쪽,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밀려오는 왜군을 상대로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고, 전투에서 패배한 끝에 구초대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곤지암의 이야기는, 그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일부 군사들은 남한강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꽉 쥔채 사망한 신립 장군의 유해를 건져내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병사들은 유해를 관에 안장해 한성으로 올라왔는데, 그 와중에도 병사들이 '장군님'이라 부르면 관 속에서는 '오냐'라는 답변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올라오던 와중, 광주시 경계의 넋고개를 지나면서부터는 신립 장군의 응답이 없어졌고, 현 묘자리인 신대리에 이르러서는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병사들은 그 자리에 신립 장군의 묘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립 장군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양이 형상의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게 누구든 말을 타고 이 자리를 지나갈 때면 말발굽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말에서 내려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후대의 한 장군이 이 바위 앞을 지나가게 되었고, 역시나 말이 멈추자 장군은 말에서 내려 산면에 걸친 신립 장군의 묘를 향해 "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히느냐!"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이 치며 폭우가 쏟아졌고, 벼락에 맞은 고양이 바위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더니 바위 옆에는 큰 연못이 생겨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바위 연못', '곤지암'의 명명 기원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말을 타고 가도 문제 없이 길을 지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지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3호인 '곤지암'



    유적&아이템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면





    '행궁'은 다닐 '행'자에 집 '궁'자를 써서 말 그대로 가서 묵는 궁궐을 뜻합니다. 현대어로 치환하면 별장 정도가 되겠군요. 조선 시대는 임금이 위치한 곳이 곳 궁궐이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곳에 이와 같은 행궁이 존재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불과 11년 전인 16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후 일제시대까지 멀쩡히 존재하다가 일제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2011년에 복원했죠(전부 복원하진 못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궁궐이라 보기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지만, 어쨌거나 궁궐로서 기능을 하게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거니는 궁에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종묘와 사직이 모두 보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행궁 근처에는 '인화관(人和館)'과 같은 읍치 시설도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임시로나마 정권의 중심 역할이 가능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면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 지어진 다섯 장대(將臺)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서쪽에 위치한 서장대입니다. 남한산성 서쪽 주봉인 청량산에 세워진 2층 누각 형태의 건물로, 장대(장수 장, 돈대 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장을 관측하고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군사 건물입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 세워진 건물 중 행궁을 제외하고 가장 화려하게 세워진 건물이며, 보존 상태 또한 훌륭한 건물입니다. 과거에 비해 보수가 되긴 했지만, 일제 시대에 촬영한 수어장대의 사진을 보면 크게 변하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죠.



    ▲ 일제강점기에 찍은 수어장대(국립중앙박물관)


    ●남한산 보호수
    ●남한산성면




    유적과 별개로, 남한산성 인근에는 수령 300~200년 가량의 수많은 보호수가 존재합니다. 행궁 주변만 돌아다녀도 이 보호수를 숱하게 볼 수 있는데, 이 중에는 벼락을 맞아 시커멓게 그을렸으나 아직 살아 있는 나무부터, 말 그대로 '아름드리'로 취급될 만한 엄청나게 굵은 나무까지 있습니다. 단순히 나무일 뿐이지만, 이 나무들이 길게는 정조대왕 시절부터 존재했고, 남한산성을 방문한 정조대왕이 보았을 그 나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꽤 요상해지긴 합니다.


    ●산이리 지석묘
    ●초월읍 산이리



    ▲ 거리뷰로도 볼 수 있는 산이리 지석묘. 경충대로를 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경기광주 지역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래 전부터 기록된 지역입니다. 광주 지역의 문화유적은 저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무려 고인돌이 있습니다. 초월읍 산이리에 위치한 지석묘인데, 타 지역의 고인돌과 달리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위치해 상당히 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산이리 지석묘는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전반적으로 규모가 큰 지석묘로서 한쪽 모서리에 성혈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부 판석재 받침이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고, 측면 장벽은 2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위치는 원래 발견된 위치에서 약 10m 떨어진 곳에 복ㄱ원한 것으로, 하파트 건설을 위해 이전되었으며 보존이 꽤 잘 되어 있는 탁자식 지석묘입니다.


    ●묘법연화경
    ●초월읍 대법사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제766-2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입니다. 광주시 초월읍의 대법사에 보관되어있죠. 이 '묘법연화경'은 단순히 이곳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문화유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묘법연화경은 굉장히 많은 형태로 다양한 곳에 존재합니다. 극도로 희귀한 불경이라기보단 꽤 널리 알려진 경전이기 때문이죠.

    줄여서 '법화경'으로 흔히 부르는 이 경전은 대한민국 불교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천태종'의 근본 경전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경전이 보관되어 있는 대법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찰이 아닌, 현대 건물로 이뤄진 소규모 사찰입니다. 또한 조계종 사찰이지요.


    ●광주시 가마터
    ●광주시 신대리, 분원리, 번천리 등





    경기광주에서 남한산성만큼 유명한 것이 있다면 바로 '도자기'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광주 일대는 과거부터 좋은 흙과 나무, 물이 많았기에 주요 소모품이던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많았습니다. 곤지암에는 거대하게 조성된 도자기 테마 공원인 '도자공원'도 존재하는데, 주말에 놀러가기 딱 좋습니다. 넓고, 한적하며, 도자기도 구경할 수 있으니까요.

    하여튼, 광주에는 곳곳에 이 '요지(窯地, 기와 굽는 가마를 뜻하는 요:窯)'가 존재합니다. 도자기를 한 곳에서만 구운게 아니라 광주 전체가 도자기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에 신대리, 분원리, 번천리 등 엄청나게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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