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되지 않은 신작 게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항상 공존했다. 하지만 요즘만큼 불신이 압도적이었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여전히 훌륭한 게임들이 시장에 등장하고 시상식 단상 위로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지만, 많은 대작이 출시 후에도 버그, 최적화, 상식 이하의 만듦새로 유저들의 기대감을 망치기 일쑤다.
'사이버펑크2077', '노 맨즈 스카이'처럼 출시 이후 꾸준히 개선과 콘텐츠 추가로 유저들의 평가를 뒤집어 놓는 예도 있지만, 이는 결국 수습에 가깝다. 실제로 '사이버펑크2077'의 초반 미흡함에 CDPR은 모든 자원을 게임 개선에 쏟았다. 이 탓에 게임의 확장팩과 '위쳐3 차세대 버전'도 연기됐다. 여러 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확장팩도 '팬텀리버티' 출시까지 3년이나 걸리며 뒷이야기는 추가 확장팩 대신 후속작 오리온 프로젝트로 넘어갔다.
팬들이 원하는 것, 나아가 유저들이 원하고 더 높은 성과로 수익성마저 높일 방법은 게임 첫 출시에 좋은 게임을 내놓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지난 GDC에서 그 답을 조금 찾았다. 완벽한 시작을 만들기 위해 불안전한 출발을 공개하는 것. 바로 얼리 액세스다.
후원과 먹튀 / 체험과 방치, 얼리 액세스의 빛과 어둠
얼리 액세스(앞서 해보기)는 2013년 스팀이 도입하며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게임 서비스 방식이다. 근래에도 '팰월드', '인슈라오디드', '리썰 컴퍼니' 등 큰 인기를 끈 게임들이 해당 방식으로 첫선을 보이는 등 게임 팬들에겐 낯설지 않다.
이런 얼리 액세스의 가장 큰 특징은 후원과 체험이라는, 게임의 개발과 서비스 과정에서 전혀 다른 부문으로 나뉘어 있던 부분을 하나로 합쳤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돈으로 직접 게임 개발을 지원하는 크라우드 펀딩은 200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개발자들이 제공하는 정보만으로 게임을 평가하고 후원해야 했다. 이제는 얼리 액세스를 통해 게임의 초기 버전을 직접 플레이하며 미리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체험은 테스터들의 피드백을 받아 게임을 발전시켜나갈 밑거름이 된다. 그런데 얼리 액세스를 통해서 후원금까지 받아 게임을 더욱 안정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이런 얼리 액세스의 초기 의도대로 게임을 선보이고 개발한 게임사도 많다. '림월드', '스타바운드', '팩토리오' 등은 얼리 액세스가 없었다면 게임이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얼리 액세스 단계에서 얻은 입소문은 출시 이후까지 이어진 장기 흥행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후원, 즉 돈에만 목적을 둔 게임들 역시 끝없이 등장하고 서비스되고 있다. 개발 단계의 게임을 얼리 액세스로 서비스하고 만족할 수익만 챙긴 채 개발을 멈춰버리는 경우다.
아르마3를 포함해 스팀의 얼리액세스 도입 직후인 2013년 3월 20일, 해당 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은 12종이다. 이 중에는 '커벌 스페이스 프로그램', '프리즌 아키텍트', '켄시' 등 출시 후 높은 유저들의 평가를 이어간 게임들도 포함됐다. 하지만 3개의 게임은 개발 중단을 알리거나 아예 페이지를 제거해버렸다.
비교적 얼리 액세스 시스템의 가능성을 높게 보며 개발 의지가 시기 서비스된 게임들임에도 이런 중단 사례가 나왔다. 여기에 스팀이 얼리 액세스의 개발 진척도 등에 따로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단점이 부각되며 돈만 받고 개발을 중단하는 이른바 '먹튀' 게임들은 크게 늘었다.
얼리 액세스가 투자금이 부족한 소규모 게임사의 선택지이면서 미완성 게임 판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후원이 아니라 체험의 얼리 액세스를 보다
유저들의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왜 기대작들에 얼리 액세스를 만듦새를 높이는 한 방법으로 내놓는 것인가?
아무래도 시장의 기대를 받는 대작은 대형 게임사의 게임이다. 그리고 그들은 비교적 탄탄한 자금력을 가졌다. 이 점만 보면 그들에겐 얼리 액세스의 특징인 이른 수익 실현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얼리 액세스의 또 다른 특징, 바로 향후 고객이 될 이용자를 테스터, 리뷰어로 삼아 피드백을 받고 문제를 되짚는다는데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리고 이같은 대형 게임의 얼리 액세스를 통한 서비스 다잡기가 제대로 통한 타이틀이 '발더스 게이트3'다.
라리안 스튜디오의 스벤 빈케 대표는 GDC2024 강연을 통해 '발더스 게이트3' 제작 과정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얼리 액세스를 단순히 개발 중기 부족한 수익화 방편으로 삼지 않았다. 정확히는 게임 개발 아이디어가 막 시작되던 IP 계약 단계에서부터 얼리 액세스로 액트1을 선보이겠다 다짐했다.
계획은 이랬다. 게임을 총 3개의 액트로 구성, 액트1은 얼리 액세스로 선보인다. 이후 그걸 서비스하면서 받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개선된 게임 플레이를 액트2, 액트3에 적용. 이후 그 개선 사항을 다시 액트1에 적용해 게임을 출시한다. 그렇게 라리안 스튜디오는 얼리 액세스 기간 게임을 꾸준히 개선해 나갔다.
회사에 자금은 충분했다. 빈케 대표는 이미 총 1,100만 장이 팔린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시리즈의 엄청난 성공 덕에 신작을 개발한 돈도 있었고, 긴 개발 기간을 버틸 힘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리 액세스를 선택한 건 앞서 말한 유저 피드백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먼 훗날 '발더스 게이트3'의 플레이어가 될 이들이 정식 출시 3년 전부터 열정적인 테스터가 됐다.
물론 여느 대형 게임사처럼 라리안 스튜디오 역시 다수의 품질 검증 시스템과 테스터가 존재했다. 하지만 얼리 액세스 기간 내부 테스터들이 겪지 못한 문제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그 덕에 액트2, 액트3 등 얼리 액세스 이후의 게임은 얼리 액세스 피드백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액트1 구성 위에 만들어졌다.
'발더스 게이트3'의 또 다른 특징은 얼리 액세스 단계 이전에 이미 개발 목표 기간을 잡아두었다는 점이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얼리 액세스에 들어가기 전부터 액트2, 액트3의 대략적인 개발 기간, 완성 시기를 정했다.
그래서 여러 피드백에 개발 기간이 지나치게 연기됐을 때는 무작정 개발 일정을 늘려나가기보다는 개발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우선하여 내부적인 의견 교환 방식과 개발 라인을 재정비해나갔다. 이렇게 한 건 단순히 다른 얼리 액세스 게임처럼 피드백에 따라 무한정 개발을 이어가는 행태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게임과의 경쟁, 유저 동향, 개발 과정에서의 난관 등에 실제 출시일은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게임은 얼리 액세스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3년 후 정식 출시까지 이어졌다.
미래의 고객이 충성도 높은 테스터로
굳이 얼리 액세스가 아니더라도 많은 대형 게임이 자체적인 테스트를 진행하며 유저를 대상으로 게임을 점검한다. 하지만 얼리 액세스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돈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용자가 돈을 낸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큰 차이를 불러온다.
플레이어가 대가를 지불하는 만큼 더 많은 플레이어를 모으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만듦새, 그리고 플레이할 수 있는 완성된 콘텐츠가 필요하다. 플레이할 가치가 있는 얼리 액세스 게임은 플레이어 스스로 돈을 지불했다는 심리와 맞물려 더 순도 높은 플레이를 불러온다. 훨씬 충성도 높은 테스터를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제대로 게임이나 해봤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출시 당시 유저들에게 큰 실망을 안긴 대작 게임들. 하지만 글로벌 대형 게임사가 수백 단위의 테스터를 돌려 게임을 확인하고 많은 의견을 취합한다. 그럼에도 분명 플레이어만큼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모두 체험하긴 어렵다. 특히 저마다 다른 부품, 서로 다른 드라이버 버전이나 레지스트리를 가진 PC는 정제된 테스트 환경에서는 없던 문제가 플레이어 환경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충성도 높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의견은 '발더스 게이트3'처럼 내부 테스터로는 잡지 못하는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다. 나아가 그 의견으로 개발진 내부가 아니라, 실제 고객이 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얼리 액세스가 주는 핵심 장점이다.
테스터로부터 아무리 좋은 피드백을 받아도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내부의 의견이다. 개발 결정권을 쥔 더 높은 단계에서 개발 방향, 확고한 철학을 이유로 이 의견을 얼마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얼리 액세스 피드백은 다르다. 이들은 테스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돈을 내고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이면서 고객이다. 이들의 평가를 무시한다면 정식 출시 이후에도 좋은 평가를 받기란 어렵다.
유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게임이, 개발사 입장에서는 유저 성향에 맞는 게임을 선보여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소통하고, 끌지않고,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게
상술한 얼리 액세스의 장점은 분명하지만, 이게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얼리 액세스 서비스로 시작해 정식 서비스 이후 게임 개발자 초이스 어워드 올해의 게임 후보에까지 오른 '데이브 더 다이버'의 성공 분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게임 개발을 이끈 황재호 디렉터는 지난 IGC 강연에서 얼리 액세스로 미완성 제품이 출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대충 재봉질이 덜 된 옷을 가져다 파는 게 아니라 재질, 색상 등을 보여주고 완성된 옷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는 곧 게임의 장기적인 출시 성과와도 연결된다. 미완성된 게임이라면 유저들의 비판을 피하기 어렵고, 초반의 나쁜 유저 평가는 뒤집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역시 수준 높게 담아낸 액트1만을 떼어주고 꾸준히 완성도를 높인 '발더스 게이트3'의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봤다.
꾸준한 소통 역시 중요하다. 아무리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던져주더라도 어디까지나 완성되지 않은 게임인 만큼 소통이 부실하다면 유저들에게 게임 개발이 멈춘듯한 인상을 심기 때문이다. 황 디렉터 역시 개발진 모두가 바쁘거나 힘들 때, 심지어 술을 마신 날에도 유저들과 소통하려 했다고 얼리 액세스 당시를 회상했다.
이와 이어지는 게 얼리 액세스 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끌지 않는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3'는 얼리 액세스를 약 3년 정도 진행했다. 얼리 액세스 초반에는 회사의 이전 작품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과 유사하다는 평은 있을지언정 추천 비중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출시일을 밝히지 않고 얼리 액세스 기간이 길어지면서 유저 평가도 점점 낮아졌다.
빈케 대표는 이렇게 얼리 액세스 단계에서 유저 평가가 낮아지는 게 실제 출시된 게임의 평가로 이어지는 만큼 더 빡빡하게 출시 일정을 잡아 집중했다고 후반 개발 과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데이브 더 다이버'는 꾸준한 소통과 업데이트를 통한 높은 평가를 유지했다. 이는 스팀 메인 페이지 노출로 이어졌고 별도의 마케팅 없이도 정식 출시까지 계속된 관심으로 이어졌다. 또 게임 콘텐츠 중 하나인 초밥집 운영은 내부 평가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러 유저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바탕으로 발전시켜 게임의 핵심 콘텐츠가 되었다.
더는 실망하고 싶지 않은걸
얼리 액세스가 가진 장점을 잘만 쓰면 유저도 좋고, 문제점도 더 쉽게 찾아내는 마법의 개발 프로세스가 펼쳐지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얼리 액세스 게임으로 출시되는 게임 부류가 꽤 한정적이듯, 얼리 액세스에 적합하지 않은 게임 플레이 방식의 게임도 많다.
반대로 회사의 규모, 개발 프로세스 등이 내부 진행에 더 적합한 경우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닌텐도만 해도 그렇다. 근래 좋은 성과를 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이미 명확한 철학을 세운 헤드들의 주도하에 엔지니어의 개발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진다. 자사 플랫폼 독점 출시를 기반으로 최적화에도 이점을 가진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을 들였는데도 결과물은 시원치 않은 대작 역시 근래 쏟아지고 있다. 개발비, 인건비 인상에 개발 기간은 촉박하고, 수많은 변수에 대응할 시간 부족은 처참한 최적화를 불러왔다. 리더쉽의 부재, 혹은 이를 통합할 시간 부족은 여러 콘텐츠가 중구난방 퍼져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플레이 경험 부족을 야기한다.
어쩌면 성공 사례를 들어 얼리 액세스의 가능성을 운운했던 건 새로운 시도라도 해보며 더는 기대했던 게임의 실패를 마주하기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다양한 시도 없이 시간 부족을 핑계로 어설픈 게임을 내놨다간 그간 들인 시간조차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정도로 혹독한 시장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