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렇게 금방 진정된것은 다행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방화범으로 오인받던 무하드와 그 휘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당당히 들고 거리를 돌아다닐수도 있게 되었다. 보상을 받은 상인들은 불난 일이 언제였냐는듯이 다시 일에 뛰어든지 오래다.
그러던 어느 날, 여관에서 장기간 투숙하기로 한 무하드 이하 일행은 방으로 찾아온 한 투르크인 일행과 좁은 여관방에서 얘기를 나누게 된다. 일행은 여관밖으로 나오면서 값을 치루고 나와서는 부둣가에 있는 상가 건물중 네덜란드식 벽돌 건물에 들어갔다. 지하창고안에는 화약,무기등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가져온 자는 무하드의 시종이다. 그는 키프로스의 니코시아 출신이다. 키프로스의 특유의 더위에 단련된 자신이라면서 늙었어도 더위 따위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며 자부하는 자다. 40세의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의 체력과 체격,그리고 호탕한 성격에 얼굴에는 검은 콧수염 주변으로는 매일 웃으면서 지낸다는 낙천적인 사람이란 증거를 보여주는 얼굴을 가진 자다. 그도 검은 반팔식 셔츠를 입었다. 이름은 이탈리아인 친척이 지어줘서 그런지 이름이 안젤로 라멜리노다.
"이곳이 우리의 본거지가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저 클리퍼선 두척 말고도 필리핀 제도에서 사들인 갤리온선이란 배와 군용으로도 쓸 수 있는 중형함도 사들여서 바다에 떠있습니다, 핫핫"
일행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막 준비된 단상의 의자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았고 문이 닫히고 맨 윗자리에는 우두머리인 무하드 파샤가 앉아서 회의를 시작했다.
"네덜란드도 열강이라 불리는 나라가 되었소, 네덜란드 말고도 다른나라들도 특히 러시아 놈들이 우리 오스만 투르크에 위협적인 나랄세. 허나 러시아 본토까지 가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군사적으로 했다가는 당장 제국의 본토가 저들의 발에 의해 짓밟힐게 자명하니 술탄폐하 께서는 우리에게 특명을 내리신걸세. 나라를 뒤흔들라고"
사람들은 이미 알았으나 예의상 이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한 척 했다, 그리고 무하드는 이 싱가포르를 혼란에 빠트릴수 있는 비책을 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상선 화재 사건의 실질적 실패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고개만 떨군채로 의견도 하나 꺼내지 않았다. 답답함을 참다가 무하드의 머리의 화산이 폭발하려는 지경에 이르렀을때 무하마드 자가노스는 더듬거리면서 의견을 조심스레 꺼냈다. 떨군 사람들의 고개들이 모두 그를 향했다.
"아무래도.. 총독을 저격하는게 어떨까요..
좌중은 놀랐다, 하지만 총독 저격이 성공한다면 어떤것도 그만한 대성공도 효과도 없으리라. 로멜리노는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의견을 하나 제시했다. 저격도 좋지만 아예 시장을 불살라버려서 혼란을 주는게 어떻겠냐고. 하지만 싱가포르뿐만아니라 다른곳에도 얼마든지 많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일이 잘 성사된단 말인가? 상에 펼쳐져있는 세계 전도에서 동남아시아를 보는 자들의 눈은 풀어졌고 한숨만이 나와서 감돌았다. 무하드의 눈에는 에스파냐령 필리핀 제도라고 써있는 곳에서 멈추고 크게 뜨였다.
야밤에 한척의 클리퍼 상선이 출항했다, 무장은 물론이요 동남아시아의 귀한 물품들이 소량 실려 있다. 배는 태평양으로 갈 모양인듯 하다. 하지만 그쪽은 에스파냐 영내다. 갔다가는 에스파냐에 잡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게 뻔한데 멍청하게도 그 배는 필리핀 제도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냉혈한들만. 배는 계속 필리핀 제도로 가고 있었고 싱가포르 앞바다에선 그 배는 사라졌다.
마닐라의 항구에 도착했다, 뒤에 펼쳐진 높은 산, 부두와 부두근처의 시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 부를 바라며 선원들에게 소리치며 신속하게 행동할것을 명령하는 상선 갑판 위의 상인들과 선원들. 이곳이 필리핀 제도의 교역거점인 마닐라다. 즉각 배에서 내려서 마닐라 총독 관저로 향했다. 상점 곁의 대로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곳의 진풍경도 보았다. 제도에서 잡힌 노예들이 허리를 구부린채로 뒤에 나무 상자들을 지고서 옆에 채찍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서있는 자들의 지휘에 따라서 대로를 걷고 있었다. 이상하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막 밑에서 진열대의 가마니에서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는 정향의 그윽한 향기와 술과 음식을 파는 노점 식당의 음식과 술냄새가 대로에 그윽한 가운데 일행은 계속해서 관저를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은 시장의 대로의 한 사거리 교차로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패싸움을 목격하게 된다, 웬 에스파냐 상인과 필리핀 노예가 벌이는 싸움이다. 뭐 두사람 땅에서 모래먼지를 피우면서 뒹굴고 때리고 난리를 친다. 사람들은 그저 보면서 수군수군 대면서 누구도 다가가서 말리려는 생각 조차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일행은 당장 가서 두사람을 떼어놓고서 말렸다. 에스파냐인은 에스파냐어로 필리핀 사람은 토속어로 놔라 놔라 하면서 씩씩댔다. 멀리 떨어트려놓고서 두사람의 칼이 떨어진 곳에서 놔줬다. 두사람은 칼을 들고서 당장이라도 서로 살육이라도 할 자세였다. 하지만 일행들이 뒤에서 계속 말리기에 그들은 싸우지도 못했다. 그때 교차로 북쪽에서 에스파냐어로 뭐라고 소리치면서 병사들이 달려왔다. 병사들은 필리핀인과 무하드 일행만 포승줄로 손을 묶었을 뿐, 그 에스파냐인에겐 뭐라고 얘기하더니 묶지도 않고 정중히 일행들과 데려갔다. 총독 관저로.
필리핀의 열대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기둥이 떠받치는 대문을 지나서 앞뜰에 꿇렸다. 하얀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관저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필리핀 총독과 관료 한명이 나와서 그들의 앞에 다가섰다. 에스파냐인은 오히려 앞뜰에 서있게 되었다. 총독은 그들을 보더니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이 필리핀놈이.. 에스파냐의 대상을 폭행해? 되먹지 못한 괘씸한 미개한 필리핀놈 같으니라고!"
총독의 얼굴을 향해서 당당히 노려보는 그 필리핀인을 총독은 구둣발로 배를 찼다, 욱 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필리핀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노려보았다. 무하드는 유럽인들의 잔악함도 만만치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필리핀인의 얼굴을 보고서 코웃음을 친 총독은 이번에는 무하드 일행을 보았다.
"이들은 또 뭔가? 이들도 필리핀인인가?"
"아닙니다, 이들은 에스파냐인인데.. 피부색이 까만걸 빼고는 이들도 이 싸움에 연루된듯 해서.."
병사의 증언을 들은 총독은 반월도까지 찬 이들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보았다, 총독의 눈은 피부에서 반월도로 갔다.
"투르크의 첩자인가?"
"아닙니다, 에스파냐에서 온 상인입니다"
"헌데 에스파냐인은 하얗거늘, 어째서 이렇게 까만가?"
"사실 신대륙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와서요, 밖에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태양에 너무 노출되어서 이렇게 된겁니다. 핫핫"
별난놈을 다 본다는 인상을 짓는 총독은 당장 이 필리핀인만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이 상인은 잘 대우해서 돌려보내도록 하고 이 일행은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내도록 명을 내리고서 장의의 밑을 휘날리며 들어갔다. 그들은 여기서 또 뼈저리게 느꼈다. 약육강식을. 그리고는 관료의 안내를 받으며 총독의 방으로 향해서 복도로 들어갔다.
티크나무재질로 된 문을 열자 복도처럼 바닥에도 중국에서 들여온 가지각색의 비단이 깔려있었다. 비단에는 동양풍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었다. 비단의 그 문양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긴장까지 풀리는듯 했다. 총독은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의자가 서너개가 조금 넘는 정도의 수량만 놓여있었기에 수장들 몇몇만 앉고 나머지는 뒤에서 서있었다.
"신대륙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해서 그렇게 얼굴이 심할정도로 새까말리가 없잖소? 말이 영 앞뒤가 맞지 않단 생각이 댁도 들텐데?"
무하드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짓지도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수십년을 살아왔는데 그럴수도 있잖습니까? 그리고 앞뒤가 안맞단 말은 말입니다.. 신대륙의 인디오들은 얼굴이 석탄처럼 새까맣다는데 저는 그런것까진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되니 총독도 말이 막혔다, 자신도 신대륙의 인종이 어떤지는 들어서 안다. 상상으로도 어떨지 상상이 된다. 저자의 얼굴도 그정도로 까맣진 않으니 의심을 풀어도 될 듯 싶었다. 하지만 다시 그의 머리로는 주마등같이 스치는 하나의 말이 있었다. 총독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적국 오스만 투르크의 투르크인들은 그정도로 까맣던데 말이지, 본토인들을 기준으로 해서.."
"거 참 각하, 자국인을 그렇게 의심하셔도 됩니까? 그렇다면 에스파냐인들중 얼굴이 좀 까만 자들은 다 투르크인 이라는 말씀인데 각하의 말씀이 영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만?"
역시나 무하드는 총독의 입을 아예 틀어 막았다. 총독은 머뭇머뭇 거리다가 그들에게 그냥 귀환하라고 하고서는 무안했던지 황급히 나갔다. 무엄하단 소리를 하며 다시 위엄있는 표정도 짓지 못하고 말이다. 무하드와 그 일행은 키득키득 대면서 총독 관저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