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올렸던 여왕님의 특산품 개발 계획의 후편입니다.
...네, 후편이 없다고 해놓고서 나와버렸습니다.
이번에도 NPC들이 사정없이 망가집니다.
면역 없으신 분들은 피해가시기를.
에스파니아 이벤트 21장 : 마르세이유의 연인(구라)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구나, 생각하며 발타자르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지끈, 두통이 달렸다. 마치 바사 3형제가 배 뒤통수를 톡톡 대포로 두들기는 것 같은 은근한 통증.
분명히 어제 발레리아스 해적들의 갤리스 네 척을 깨부수고 팔마에서 포도주로 거하게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다음의 기억이 없다.
필름이 끊긴 걸까? 그렇게 마셔본 지도 정말 몇년 만의 일이었다.
어쨋든 다음 목표인 ...으로 향해, 라고 생각했지만. 발타자르가 이불을 걷어올리려던 순간, 뭔가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잡혔다.
"?"
뭐지, 하는 생각에 발타자르가 곁을 돌아보았을 때.
하얀 시트 위에 얇은 베일처럼 흩어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악 잠에서 깬 듯한 일레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요?"
---------------그 순간, 묵직한 바리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것은 마르세이유 전역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옆동네의 라블레 씨가 새로운 괴조의 발견이냐며 흥분했고, 이웃의 다빈치는 저건 드래곤의 소리라며 타박을 놓았으며, 늦잠을 즐기던 기즈 공작이 놀라 경비원들을 닦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음, 어디까지나 소문이.
발타자르는 일레느에게서 가장 먼 거리 - 인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머릿속으로는 주변 상황과 자신의 위치, 기타등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발타자르로서는 침대에서 급선회하여 도주스킬을 써서 최대 먼 거리인 벽의 경계선에 바싹 붙었다. 이 순간 정전 협정서 따위는 100개가 아닌 1만개가 있어봤자 소용 없었다. 남는 것은 정면, 아니 그건 좀 쪽팔리니까 우회 승부가 있을 뿐.
"저, 저기 일레느..."
"예?"
"내 옷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고 있나?"
"아, 더러워서 빨았어요. 화약 가루 투성이인데다, 생선비늘같이 이것저것 묻어 있어서 말이어요. 이제 거의 다 말랐을 걸요?"
"그거 정말 고맙군. 그런데 일레느 네 옷은 또 어디로 갔지?"
"빠는 김에 같이 빨아버렸어요."
입을 가리고 수줍은 듯 호호호- 웃는 일레느 앞에서, 발타자르는 그의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난관에 부닥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당탕!
"발타자르, 어째서지!"
미처 발타자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바로 살미엔트 상화의 길드장, 디에고였다.
"나와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나! 에스파니아 이벤트 30장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찌하여 날 버리고 프랑스로 돌아섰단 말인가!!"
"아니 디에고, 자네가 여기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이미 자네의 망명 허락은 물론 주민등록증까지 받아놨거늘!"
거의 통곡하는 듯한 소리로 외치면서, 디에고는 손에 든 빨간 밀납으로 봉인이 된 양피지 뭉치를 펼쳐들었다.
그 아래에는 단촐하게 세 줄의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포르투갈 주민등록등본 알바공 인증
호주 : 디에고 살미엔트
군식구 : 발타자르 살미엔트
다음 순간, 발타자르는 디에고의 멱살을 정답게 잡고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어째서 내 성이 살미엔트가 된 거지!"
"아, 그거? 발타자르 자네는 17년이나 포르투갈을 떠나있으니 몰랐겠지만, 요즘 망명 허가는 직계가족이어야만 가능하다네."
"그동안 용병일 하면서 뻔질나게 포르투갈을 드나들었지만, 그런 법이 있다곤 들어보지도 못했어!"
"있다니깐? 그래서 지금 우리 아들네미도 호적에는 성이 "가마"로 되어 있다네."
"가마? 무슨 가마?"
"물론 인도항로의 개척자 바스코 다 가마씨지."
순식간에 발타자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빠르게 본 상태로 돌아왔다.
"아니 어떻게, 아들을 팔았단 말인가!"
"팔기는! 어디까지나 <<단기간 유료 대여>>를 해준 것 뿐이네!"
"돈까지 받았단 말인가!"
"아닐세. 물건으로 받았지. 창고 확장 개조를 한 갈레아스 세 척에 선원 한 명만 싣고 물 한 상자에 나머지는 죄--다 후추로 채워서."
"자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모르면 가만히 있게! 후추의 전매를 맡은 우리 상회로서는 후추온라인 뺑퀘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구하기 위해 군인의 도움이 꼭 필요하네! 가마 씨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파트너일세! 우리 애도 귀여워해주고."
그 순간.
"잠까-안!"
눈 하나 깜빡일 사이, 빛의 속도로 옷을 갖춰 입은 일레느가 디에고와 발타자르 사이에 파고들어, 재빨리 디에고를 붙들고 방의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디에고 살미엔트 씨, 당신이 여기에 무엇을 하려 왔는 지는 알고 있어요. 서로간의 목표는 하나이고, 우린 이미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협상을 하는 건 어떨까요."
"발타자르 건에 대해서는 불가일세!"
기세등등한 디에고에게, 일레느의 가느다란 갈매기 눈썹이 슬쩍 치켜올라갔다.
"어머나, 제가 이렇게 양보의 의사를 보이는 데도, 속 한 번 좁으시네요?"
"이쪽은 이미 17년이나 잔뜩 벼르고 있었네. 그리 쉽게 포기할 것 같은가! 비록 프랑스가 몸을 가진다 해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포르투갈의 것이네! 그러니 이제 돌아가야지!"
"아무래도 말로 해야 통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이 자리에 만약 제3자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매끄럽고 아름다운 검은 코브라와, 그와 대적하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있는 용맹무쌍한 은발의 망구스를.
...그리고 방 한 구석에서 영문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밤색 짧은 털이 부스스하게 나 있는 통실한 햄스터 한 마리를.
"흥, 그렇다면 저도 생각이 있어요. 앞으로 살미엔트 상회 한정으로 퀘스트 보고를 대신 해주지 않겠어요!
"마르세이유에 주점이 여기 하나 뿐인줄 아나!"
"하나 뿐이잖아요."
".............으, 으음! 뭐 정 그러면 옆의 제노바에 가서 보고할 수도-"
하지만, 일레느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이 위쪽으로 곡선을 그렸다.
"후후후, 천하의 살미엔트 상회의 디에고 씨는 여급들의 단결력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군요."
"무어라!"
디에고의 안색이 금시 파랗게 질렸다. 일레느의 어조는 위협이나 만약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의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상상하기조차도 두렵지만, 여급들이 하나로 뭉쳐 퀘스트 보고 대신해주기를 좌지우지한다면 그 타격은 이루 다 말로 설파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것이 현실로 옮겨졌다는 말인가!
"해보겠어요? 만약 북해에서 캘커타로 가는 퀘를 받는다거나 하면 다시 뺑이를 쳐서 돌아가야 할텐데요?"
자신만만한 일레느의 목소리에, 지켜보는 디에고의 관자놀이에는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올 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여급들이 하나로 뭉치게 된 것일까.
틀림없이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그녀들의 뒤에는 좀더 크고 강력한,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과 카리스마의 존재가.
과연, 무엇일까.
"어, 저기- 저기-"
한 아낙과 한 남정네의 불꽃 튀기는 신경전 속에서, 완전히 존재가 잊혀져 버린, 그러나 '최종 목표'인 발타자르가 비로소 정신을 추스리고 그럭저럭 말을 건네려던 찰나-.
쾅!
"어이쿠!"
열려져 있던 문 쪽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그에 못지 않게 딱딱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소리난 곳을 돌아보았을 때, 붉은머리의 키 큰 남자 한 사람이 몸을 둥글게 말고 앉은 채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된통 부딪힌 것 같았는데.
"이교도들의 건물은 문지방이 너무 낮군. 대체 사람이 다니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자네가 너무 키가 큰 거야. 애초에 대항해시대에 2미터가 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부터... 그보다! 넌 대체 여기 와 있는 거냐 하이레딘!"
드디어 벙 찐 상태에서 풀려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발타자르 였으나-
"후후후-"
붉은 수염의 해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갑작스레 파안대소를 했다. 이마 한 가운데 손바닥만한 빨간 자국이 역력히 남아있었기에 그렇게 박력있지는 않았지만.
"이 자식 뭐가 우습나!"
"옷이나 입고 그런 말 하시지."
상황 정리 중.
"그런데 자네, 평소 머리에 얹고 다니던 그건 어쨌나?"
발타자르가 (무언가를 하느라) 정신없는 동안, 잠깐의 짬을 내어, 디에고는 마음 속 한 가운데에서 용솟음 친 호기심을 해갈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하이레딘이 벽의 문지방에 성대하게 마빡을 까게 된 것은 언제나 그가 두르고 다니던 초특대 터번이 홀연히 없어졌기에 완충작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그 사이 뻔뻔하게도 방 한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일레느에게서 따끈한 우유 한 잔을 얻어마시던 하이레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 저 친구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이스탄불에서 오다보니 식량을 깜빡해서."
"...설마 먹었나?"
"몰랐나? 그거 비상식량용 초특대 베이글이었는데."
"근데 여기엔 왜 왔나?"
"모르나 보군. 우리 아라비아의 풍습을. 친한 사람이 장가 갈 때면 반드시 와서 훼방을 놓아야 하지. 언제라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뭐?"
"하지만 아쉬워, 간발의 차이로 늦었군. 이오니아의 폭풍이 언제나 문제야. 아- 아가씨, 여기 우유 한잔만 더. 아몬드 남은 거 있나?"
"퍼다 먹어욧!"
느낌 탓인지, 아니 틀림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듯한 하이레딘의 모습을 보며, 디에고는 어째서인지 애수가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발타자르가 친구, 혹은 친한 사람의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고작 첫날밤 훼방 좀 놓겠다고 에스파니아나 포르투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진이랄 수 있는 프랑스 수도 한 복판으로 홀홀 단신으로 쳐들어오다니.
그것도 저렇게 좋아하면서.
'혹시... 친구... 없었던 거냐...'
디에고는 소리나지 않게 혀를 끌끌 찼다. 저 나이에 웬 궁상에 주책이냐. 하기사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 친구라는 게 있을 리 없겠지만.
드디어 모든 것을 끝내고 재등장한 발타자르가 본격적으로 하이레딘에게 화를 내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대장!"
이번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용병함대의 아고스티노였다.
"에두아르도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뭐라고!"
놀라서 벌떡 일어난 발타자르에게, 아고스티노는 지저분한 유리병을 내밀었다.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는데, 오늘 아침 웬 항해자가 유리병 안에 들어있던 에두아르도의 쪽지를 발견해서 가져왔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아무래도 납치된 것 같은..."
"그게 정말인가? 어디 보자!"
발타자르가 급히 펼쳐든 양피지 위에는 지렁이가 용트림하며 기어간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손으로 글씨를 쓴 탓이었다. 뿐 만이랴, 눈물자국이 양피지를 온통 얼룩덜룩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언제나 강단있고, 때로는 지나치게 강한 척 하고, 자신을 내세우던 에두아르도의 글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독특한 필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다른 사람이 썼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용병함대의 모두에게... 모두 보고싶어... 정말로...
여기는 엄청 추워... 맨날 흐리고 비오고... 새로 친구도 만났는데 저는 영어를 못하고 그 친구는 에스파니아 어를 못하지만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고 있어... 누구 오빠라는 데 이름은 듣고도 잊어버렸다는...
대장... 죄송해요... 생각하면...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
에드가.>>
"에두아르도!"
발타자르는 편지를 구깃 움켜쥐면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 틈엔가 그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에두아르도를 구해야 겠어! 이 편지가 어디에서 온 건가!"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왜 구하려고?"
디에고는 뚱한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일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자네를 배신한 사람 맞지? 왜 그런 짓을."
이번엔 하이레딘이었다.
"놈은 내 부하란 말이다!"
하, 하이레딘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직도 길길이 뛰는 발타자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무르군, 발타자르.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서 없애버려야지. 더군다나 배신자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어. 그렇게 무르니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하는 거지."
"그러는 네 녀석도 부전 협약을 배신하고 마데이라의 상관을 불태웠잖아!"
발타자르의 버럭! 하는 고함에 하이레딘은 뱁새눈을 뜨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으음. 그건 좀 잊을 수 없나? 벌써 17년 전의 일인데.
"무슨 소리!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옆에 있던 디에고도 합세했다.
하이레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휴- 자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골치아플 정도로 징한 성격인 줄 알았다면 나도 마데이라 상관을 건드리느니 리스본을 초토화했을텐데... "
"너라는 놈은, 후회나 참회라는 건 없는 거냐!"
"해적이 그런 걸 할 리 있나."
더 이상의 말장난은 무의미했다. 뭐 그렇게 따진다면야 이 글 전체가 말장난으로 점철되기는 했지만. 발타자르는 눈물에 젖은 양피지를 꾸깃 쥐면서 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다려라 에두아르도, 널 반드시 구해주마..."
어째서인지, 그게 지금 이 방안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한 명의 프랑스 인과 한 명의 포르투갈 인과 한 명의 이슬람 인에게서 도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의 착각일 것이다.
앞으로 -
에스파니아 퀘스트 22장 : 런던탑의 미청년 (구라)
영국 퀘스트 22장 : 라이자의 새로운 남자친구 (이것도 구라)
로 이어집니다.
거짓말입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후편 없습니다.
사정상 대항해시대 게임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이 글은 마지막 선물로 올립니다.
앞으로 본가 블로그와 이글루에 창작 글을 올릴 듯.
그동안 이 게임을 정말로 재미있게 했습니다.
모두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