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에 긴 생머리, 제독 의복 세트(제독 모자+제독 코트)에 버클부츠와 화승격발식 사격총,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청바지라 그런지 교복만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어서와. 정신이 드니?”
“네? 네... 저... 그런데...”
“그런데?”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원래 제가 가려고 했던 곳은 마데이라라고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폭풍으로 인해서 표류하고 이젠 죽었구나하면서 정신마저 잃었는데 깨어나서 창밖을 보니까 학교에서 배운 해적. 그... 그러니까... 해적 깃발이 걸린 걸 봤어요. 도대체 이게 어찌된 건지 서둘러 마데이라로 가고 싶은데, 그리고 배하고 교역품, 그리고 선원들은 다 어디 있는지... 으아아아아앙~~~!!!”
“...”
“그만 울어! 너 지금 제정신이니? 마데이라에 가봤자 너만 손해인걸!”
“네? 왜요?”
“자. 자. 둘 다 진정하시는 것이 어떤지요? 일단 그 쪽 항해자님의 배와 교역품은 전부 있습니다. 선원도 좀 남아있는 편이지요. 가만,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이봐, 데미안. 그건 아까 내가 먼저 쟤한테 말했던 거든. 얘, 이름은 루시오라고 하네요. 캡틴.”
“루시오? 그럼 너,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니?”
“네? 제가요?”
“그래. 먼저, 이 종이. 상디 씨가 쓴 거 맞니?”
“앗! 그 종이!”
“그럼 너하고 상디 씨하고 어떤 관련이 있지? 그리고 왜 마데이라로 가는 거지?”
“네? 그건... 일단 전 지금 상디 씨의 식당에서 교역품 배달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며칠 전에 상디 씨가 써 준 종이에 마데이라라고 되어 있어서...”
“그럼 너, 카리쿨라라고 들어본 적 있니?”
“네? 카... 누구요?”
잠시 동안 정적에 휩싸인 방 안, 그리고 그 정적을 깬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저기, 캡틴! 혹시 저 항해자. 우리 일원이 되는 거예요?”
“야! 저리 좀 비켜! 안 보이잖아!”
“캡틴! 오늘 파티해요! 저 항해자 배에 햄하고 브랜디가 들어있어요! 이게 얼마만이야! 야호!!!”
“...”
아까 마샤와 함께 걷던 루시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혈기왕성함 그 자체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자세히 말하자면 ‘아조레스 해적단’의 선원들이다.)몰려 나와 입구가 부서질 지경이다.
이런 사람들의 함성(?)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캡틴’, 급기야 들고 있던 총을 꺼내더니,
“너희들! 딴 생각 하지 말고 원 위치로 안 돌아가! 파티는 저녁에 할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저 항해자의 물품은 건들지 마! 그리고 데미안, 마샤! 넌 지금 저 루시오라는 항해자와 같이 있던 선원들을 데리고 오고, 가는 길에 베니스하고 이드, 안드 형제를 데리고 와!”
“네! 알겠습니다! 캡틴!”
“저기... 전... 어떻게... 되나요? 강제 노역이나요? 아니면? 지금쯤 마르코 씨하고 상디 씨가 걱정할 텐데...”
“너? 여기 있어.”
“...?”
그 날 저녁, 아조레스의 넓은 평원은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끓이지 않았다.
‘캡틴’과 마샤, 데미안과 베니스, 이드, 안드를 비롯해 거의 3,000은 족히 넘는 수의 사람들, 이들이 바로 ‘아조레스 해적단’의 상위 100위권 안에 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고도 남는다.
그들의 사이에서 거의 침울한 분위기의 세 사람이 있었으니, 루시오와 와트, 구스였다.
이들과 같이 있던 또 다른 선원 한 명은 표류지점에서 아조레스로 오던 중 그만 죽고 만 상태이다.
하여튼 와트와 구스, 저 둘은 거의 무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생명력이 길다. 속된 말로 하자면 질긴 고래 힘줄이라고 해야 할까?
“이젠 어떡하지? 해적 소굴에서 탈출은 해야 하는데...”
“저 선장님. 우리 셋이서 어떻게 탈출할까요? 아까 저들 표정 봤는데, 하나같이... 으... 말하기도 싫어졌어요.”
“그나저나, 구스 너 괜찮아? 선장님하고 나보다 넌 배 부분에 꿰맨 자국이 있더라고.”
“응? 이거? 정신 차리고 일어나 보니까 이렇더라고. 그나저나 그때 넌 입에 라임이 한 가득이더라. 아직도 라임냄새가...”
“쉿! 누가 온다!”
남들에게 피해 줄까봐 구석에서 그냥 먹고 있던 이들을 향해 온 사람은 반쯤 하얗게 염색한 안경 쓴 청년과 카발리에 재킷을 입고 온 약간 뚱뚱한 신사로 전자는 데미안, 후자는 베니스이다.
“아니? 여기서 뭐하세요? 같이 파티를 즐겨야죠.”
“아... 아니에요. 같이 즐기다가 피해만 드릴까봐.”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요. 자 사양하지 마시고...”
“에이, 괜찮아요. 저흰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요. 괘념치 마시고 저쪽에 계시는 분들하고 같이 지내세요.”
“음... 그렇다면 저희 두 사람하고 같이 즐기죠. 어차피 저쪽은 저희 둘이 끼건 안 끼건 그대로이거든요.”
“네... 그... 그러죠.”
루시오가 옆자리를 비켜 앉게 된 두 사람. 이윽고 앞에 있는 럼주와 닭고기 로스트를 먹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내 친근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전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이 해적단의 선의죠. 저쪽의 선원들 조금 손을 봤죠. 구스라고 하셨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 갈비뼈 쪽에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자국으로 인해 후유증이 심각한 것 같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어요.”
“아, 그런가요? 어찌되었든 고맙습니다.”
“와, 대단하네요.”
“하하하, 이 친구의 의술은 천하제일이죠. 다만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다가 이곳으로 온 지 벌써 3년인가? 5년인가? 아 전 베니스라고 합니다. 초면이죠. 아가씨?”
“네, 그러네요.”
“전 나폴리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자랐습니다. 교역과 은행업으로 큰돈을 모았으나, 정쟁으로 인해 쫓겨나 여기로 오게 되었죠. 여기선 주로 중개 무역을 담당하고 있죠.”
“중개무역이요?”
“아, 아가씨가 초보 항해자이신 거 같으니 짧게나마 말해드리죠. 여기 아조레스는 북유럽과 카리브 지역의 중간 지점이라 많은 항해자들이 몰리는 곳입니다. 그에 따라서 북해의 명산품과 카리브의 명산품이 모이는 곳이라 그 두 지역을...”
베니스의 길고 긴 설명을 들으면서 루시오는 멀리 동쪽 하늘을 보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 리스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다들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 물론 그 상빈이라는 녀석만 빼고 말이다.
●
그럼 여기서 잠시 시선을 리스본으로 돌아보자.
시간은 전에 루시오가 폭풍으로 인해 표류하던 그 시각으로 말이다.
혹시 눈치를 챈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당시 주점에 마르코와 상디 부자, 크리스티나 말고 한 사람 더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지 모르는데, 바로 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폭풍이 리스본 시내로 몰아치려고 하던 그 날 밤, 마르코는 평상시와 다르게 일찍 문을 닫았다.
항구관리와 상디 부자는 이미 나가고 없는 상태, 문을 닫고 정리 하던 마르코의 눈에 아까부터 과실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는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얼른 내쫓아야 하지만 그래도 마르코는 좀 너그러운 편이라, 바에서 과실주 한 병과 토르티야를 들고 그 손님 곁에 앉게 되었다.
“혹시 어디 묵을 곳이 없나요?”
“...”
“없으시면 여기서 묵고 가세요. 빈 방이 하나 있으니까요.”
“아, 고맙습니다. 다만 묵지는 않을 거고요. 날이 밝자마자 정처 없이 갈 건데요.”
“그런가요? 그럼 저랑 같이 이 과실주나 마시죠. 오늘 사람이 없어서 팔지도 못하고 남은 거라.”
“그러죠.”
서로 초면이긴 했으나 어느 새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서로에 대해 궁금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은 바로 마르코.
“저 헌데, 물어보기 쑥스럽지만, 성함을 아직 물어보지 않았군요. 여기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말입니다만.”
“아, 전 아덴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수도원에서 왔습니다.”
“보르도라. 허면 와인이 유명하군요. 혹 와인과 관련해서 오신 건지, 아님 수도원에서 오셨다고 하니 교회에 관련되어서 온 것인지...”
“아니요. 전염병으로 수도원에서 나와 그 동안 떠돌아 다닌 지 벌써 30여년이 지난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여기에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오랜 전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에 대해 혹 이 곳이 정답을 줄 지 궁금하던 차에 마침 여기에 대해 박식하다고 하는 당신께 뭔가 듣고 싶어서요.”
“네? 그... 두 가지가 대체 뭡니까?”
“하나는 지금 현재 리스본의 숨은 권력자라고 하는 카리쿨라에 대해서 알고 싶고, 다른 하나는...”
“카리쿨라라... 그럼 다른 하나는 또 뭡니까?”
“20여 년 전 우연히 마주쳤던, 지금은 사라진 보르도의 명문가인 다르시오 가문.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저로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건 그 사라진 명문가의 유일한 ‘혈육’이 이곳에 남아있다는 얘기를 코임브라에서 들었어요.”
“다르시오 가문? 코임브라? 대체 그 ‘혈육’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루비 데 다르시오.”
“루비... 데... 다르시오...? 그런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더군다나 다르시오 가문에 대해서도 전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그런가요? 아까 항구관리의 입에서 ‘루시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전 놀랐습니다. 아직 다르시오 가문이 살아남았다는 것과... 그리고 그 살아남은 것을 없애려 하는 자가 한 곳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죠.”
“...!”
‘설... 설마... 루... 루시오가 다르시오 가문의 유일한 혈육? 아니야. 그럴 리가...’
마르코의 굳은 표정을 본 체 만 체 아덴은 과실주와 토르티야를 그저 먹고만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스터. 마스터!”
“으... 응? 크리스티나?”
“아니, 여기서 주무시면 어떡해요? 세상에...”
“저기, 크리스티나.”
“네.”
“혹시 여기 ‘아덴’이란 사람 있던 것 같은데... 보았나?”
“‘아덴’이요? 그런 사람 보지 못했고요. 대신 바에 이런 종이가...”
“종이?”
크리스티나가 준 종이를 본 마르코. 순간 그는 숨이 멈춰진 듯 종이에 쓰여 있는 글을 내려다보았다.
-혹, 루시오라는 자가 오거든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 여러 가지 여쭤 주십시오. 그리고 카리쿨라에 대해 몇 가지 정보 좀 얻어 주십시오. 당신의 능력을 믿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주 그리스도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아덴-
"...!"
"? 마스터? 왜 그러세요?"
“크리스티나.”
“네. 말씀하세요. 마스터.”
“오늘은 조금 피곤 하는구나. 가게 문 열지 말거라.”
그 날 이후, 리스본 주점은 무려 이틀이나 문을 열지 않았다.
아덴이라는 수도사와 그가 남긴 종이. 그 두 가지가 훗날 리스본에 어떤 일을 일으키게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마르코 자신만 알고 있다.
●
자, 다시 현재 시간의 아조레스로 가 보자.
우리는 거기서 루시오가 베니스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바로 그 부분이다.
“이런 걸 말해서 중개무역이라고 하죠. 그리고 전 그 분야의 담당자이고요.”
“와! 대단해요! 진짜 부럽다~~~!!!”
“하하하, 뭘 그 정도 가지고요. 사실 저와 여기 베니스씨 말고도 나머지 분들도 대단할 정도의 실력자라고 할까요?”
“네? 어... 어느 정도인데요?”
“우선... 저 쪽에 약간 대머리인 쌍둥이 두 사람이 보이시나요?”
“네, 보이는데요?”
“저 두 사람은 형제인데 분야는 다르죠. 좌측에 있는 사람은 이드라고 하는데, 주로 봉제, 특히 돛 만들기의 장인이죠. 봉제 만랭에 직물 거래와 공업품 거래가 10랭 이상이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안드라고 조선 만랭에 주조가 13랭에 달하죠. 여기 있는 배의 대다수의 건조와 개조, 수리, 해체에 탁월하다고 할 수 있죠.”
“...(입이 벌어질 정도로 감탄 연발 중)”
“저기 질문 해도 될까요?”
“네, 무엇이든지요.”
“그럼 저 중앙에 있는 두 여자는 누구이신지요? 워낙 무서워서 말도 안 꺼냈는데...”
“아, 캡틴인 스피아진 선장하고 부함장인 마샤 말인가요?”
“네.”
“저 두 분은 사실 이 해적단의 터줏대감이라 할까요? 그만큼 남성 위주인 이곳에서 거의 눈에 띄는 사람들이죠. 우선 부함장인 마샤는 스피아진 선장의 오른팔이죠. 사격이나 백병에 대해선 여기나 해군 내에서도 건드릴 자가 없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리스본에 있는 포르투갈 해군 장교 출신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쫓겨난 후 이 곳으로 오게 됐다고 하네요.”
“저... 그럼 스피아진 선장은요? 아까 저한테 ‘카리쿨라’얘기를 하시던데...”
“음... 뭐부터 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 ‘카리쿨라’하고 선장님은 철천지원수지간이거든요. 선장님의 가족 분들을 없앤 자가 카리쿨라라고 하네요.”
“이건 아가씨에게만 알려드리는데 사실 선장님의 본명은 스피아스 루오랍니다. 어린 시절 가족을 다 잃고 칼레에서 이곳까지 홀로 오셨거든요. 사실 이 해적단도 거의 이 정도로 발전시킨 분도 선장님이라고 전 생각하죠. 이곳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감안해서 그 동안 이 일대에서 악명을 떨쳤던 노예상, 악덕 상인, 불법 해적들을 토벌하고 그 실력과 명성은 에스파니아하고 포르투갈, 잉글랜드 해군조차 인정할 정도로 거의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거기에 주조와 포술, 탄도학하고 관통이 모두 만랭이고, 리스본의 대포 시장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사람이라서 여러 차례 리스본 왕궁에서 사람이 와서 등용하겠다고 하는데, ‘카리쿨라’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거든요. 진짜 ‘카리쿨라’ 얘기만 나오면 선장님은 책상이 박살날 정도로 변하게 되죠. 아가씨도 조심하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이봐! 거기!”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