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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WA2000) 무지개 너머 어딘가 (재업)

렝가는op다
댓글: 14 개
조회: 1803
추천: 6
2017-11-05 23:37:34
1.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겨우 그쳤다.
그 덕에 며칠 내내 회상에 잠겨서 창밖만 바라보던 나도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맡으러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비가 막 그친 참이라 비 냄새가 심하게 났고 강렬한 햇빛 때문에 습도가 높아 날씨는 매우 불쾌했다.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길게 뻗은 가로수 길을 걷다가 나뭇잎위에 맺혀있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건드려 보았다.
나뭇잎에 맺혀있던 물방울은 내 손목을 타고 내 팔꿈치를 간질였다.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뭐 나름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물방울을 만지면서 웃음 짓는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테지만 별로 상관없다.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바닥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고 하늘에는 작은 무지개가 보였다.
 나는 무지개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 멈춰 섰다.
예전에 어머니에게 들은 속설이 생각났다.
무지개는 천국으로 이어지는 다리여서 무지개의 시작점에는 천국이 기다린다는 무언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무지개는 빛의 굴절로 생기는 것이어서 절대 무지개의 끝에는 닿을 수 없다.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믿을 것 같다. 내 영혼을 데려가려는 것처럼 정말로 무지개다리가 나왔으니 말이다. 저 끝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나는 멍하니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 며칠처럼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나는 지금처럼 화창한 날씨가 좋다.
물론 이렇게 습도가 높은 건 질색이다.
 그녀와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녀는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나는 바닐라를 좋아한다. 그녀는 감동적인 영화를 좋아하고 나는 코믹영화를 좋아한다. 그녀는 승부사고 나는 승부의 양 갈래 길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간이다. 나는 왼손잡이고 그녀는 오른손잡이다. 그녀는 죽이기 위해 태어났고 나는 살리기 위해 태어났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 까지 큰 차이가 두드러진다.
생각해보면 할수록 그녀와 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유일한 교차점이라면 그녀는 전술인형이고 나는 그런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였다는 점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의 볼 모습과 못 볼 모습을 전부 기억한다. 팔이 뜯겨나가서 전기가 튀는 장면이라거나 복부에 총상을 입어 의식불명인 상태도 보았다.
치료가 끝나면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숙이는 그 귀여운 모습과 언제 그랬냐는 듯이 틱틱대며 차갑게 말하던 모습도 기억한다. 나에게 설움을 폭발시키며 내 품에 안겨서 울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나에게 살의를 풍기며 총을 겨누던 것도 기억난다.
초콜렛아이스림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나에게 들켜서 얼굴이 새빨개진 것도 기억이 난다.
비가 오는 날에 같이 산책도 했다. 비오는 날은 질색이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억지로 동행했다. 그녀와는 짧지만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감성팔이 글만 읽고 슬슬 눈치 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내가 먼저 말하겠다. 그녀는 이제 그리폰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모든 것은 겨우 하루 만에 사라졌다. 딱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실이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라고 나에게 질타를 해도 좋다. 진부한 클리셰들만 잔뜩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그녀가 좋아하던 비오는 날에 진행되었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곳에는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마인드맵이 백업된 고용량USB와 함께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시신도 없고 그녀를 추모하는 몇몇 인형들만이 참가한 허울뿐인 장례식이라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비난해도 좋다. 내가 쓰레기라는건 인정한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은 양심은 있어 그녀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 나는 방 창문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그녀의 장례식 행렬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비는 며칠간 계속되었다.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됐다.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창문 앞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있었다면 정말 좋아했을 날씨다.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가 남긴 스코프를 닦았다. 이미 깨끗해도 계속 닦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무시했다. 그저 창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가 갠 날. 나는 가로수 길에서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흥얼거리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피식 웃고 난 후 안주머니에서 그녀의 숨통을 끊었던 검은색 권총을 꺼냈다.

그전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일종의 주의문이다.
방아쇠를 당기기전, 내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암울하고 암울한 과거이야기다. 어두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쓰레기 같은 글을 읽었네’ 하면서 뒤로 가기를 눌러주기를 바란다. 내 과거이야기에는 행복도, 웃음도 감동도 흐뭇함도 없다.
재미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내 이야기니까.

2.

깨끗하고 온통 흰색 천지인 수복실. 수술용 메스와 기계장비, 엄청난 양의 붉은 액체 팩이 가득하다. 오늘부터 내가 일할 장소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곳에 들어오려고 3년을 공부했다. 안정적인 봉급, 안정적인 직장생활이 보장된 곳이다. 정말 기뻤다. 봉양할 부모님이나 가족은 없지만 그 때문에 더 노력했다. 사고로 먼저 가신 부모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3년의 시간은 정말 지옥 같았다. 고시원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매일을 라면 한봉지로 버티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에서 쫓겨나는 건 일상이었다. 바퀴벌레와 친구를 먹고 이름까지 붙여준 적도 있다. 아직도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꽤 좋은 친구였는데..
그래도 이젠 그런 암담한 인생과는 정말 바이바이다.
나는 그리폰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즐비한 기계장치들, 엄청난 양의 부품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거대한 기계 팔을 가진 수술용 로봇을 보자 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내가 정말 이곳에 들어왔구나.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다.
“뭐하냐?”
내가 떨리는 손으로 기계에 손을 대려하자 선임수복원이 나를 제지했다.
나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됐고, 빨리 수복 준비해 긴급호송이야.”
큰 키에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선임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들어온지 이제 1시간도 채 안됐는데 실전이라뇨.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있자 선임이 내 뒤통수를 살짝 후려쳤다.
“누가 니가 수술한다했냐? 너는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돼.”
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의사 복으로 갈아입은 후 나는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거울에 비쳤던 나는 내가 봐도 조금 멋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폼 잡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벽에 붙어있던 사이렌이 빛을 냈다. 붉은 색으로 두 줄기의 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상하게도 사이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 침대를 끌고 오고 있는 여러 명의 사람이 보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사람들을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건 검은 정장 같은 차림의 여성이었다. 검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넥타이, 그 밑으론 정장사이로 튀어나온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이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때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팔은 어깨 부근이 나가떨어져서 형체가 없고 복부에는 수많은 총상이 있어서 내부 부품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때 다시 생각났다. 이건 인형이다. 나는 마음을 다 잡고 수술 장면을 지켜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대수술이 끝났다. 그녀는 입원실로 가게 되었고 나는 그녀의 간호를 맡게 되었다. 이제 막 들어온 신참에게 맡기기 좋은 일이다.
“귀중한 분이시니 극진히 모셔야한다.”
선배는 그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의자를 가지고와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복이 아닌 환자복으로 옷이 바뀌어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는 누워있었다. 인형이라고 해도 정말 아름답기는 하다. 이건 부정하지 않겠다.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내 눈과 마주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내 인상이 무서운 걸까. 조금 상처를 받았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기로 생각했다.

진부하다면 진부한 첫 만남.
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다.

3.

며칠이 지났다.
그녀의 회복속도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자신의 총기를 손질했다.
늘 그녀 옆에 있었지만 아직 대화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걸기가 부담스러웠다. 너무나도 도도하고 차가운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말을 걸기가 힘들 것이다. 아마 내가 과거로 돌아 간다고 해도 똑같을 것이다.
그녀는 스코프만 1시간이 넘게 닦고 또 닦았다. 아무리 철저히 한다고 하는 것이라 해도 이정도면 결벽증을 의심해 봐야한다. 그녀가 총기손질을 할 때 나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사이는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녀와 가끔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멍청했던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지금 보니 그녀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비가 오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출근해서 그녀의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위에 그녀가 없다. 나는 병실 중앙으로 뛰어 들어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두 다리를 창밖으로 내 놓은 채로 앉아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 하는거야?!”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허둥대다 창밖으로 떨어지려하는걸 겨우 붙잡았다.
나는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소리쳐서 미안해. 떨어지려고 마음먹은 줄 알았어.”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 사과 할 필요 없어.”
“거기에는 왜 앉아 있었던 거야?”
그러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그건. 침대에만 앉아있는게 지루해서 올라간 것뿐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솔직하지 못한 성격인듯 하다.

이제 보니 그녀의 옷과 손이 빗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옷장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마워.”
나는 살짝 웃어주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잠시 뒤 나는 다시 병실의 문들 두드렸다. 문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 드,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이전과는 다르게 꽤나 긴장을 하며 앉아있었다. 그런 모습이 이전의 모습과 겹쳐지며 위화감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말이 트인 우리는 여러 가지 대화를 했다. 대화를 아무리 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며칠 동안 계속 얼굴을 본 사이라 그런지 금방 친해졌다.
거의 내 이야기만 했다. 내가 질문을 하면 얼굴을 붉히며 대화를 끊어 버리려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대화로 시작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 꼴도 당했었는지 우리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는지를 다 말한 후였다.
그녀는 조용히 내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말을 마쳤을 때는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뒤늦게 생각했다. 아, 내가 왜 그런걸까. 왜 이런 이야기를 이제 처음 대화를 나누는 그녀에게 한 것 일까. 나를 자책했다.
그 순간 내 눈가에 무언가 닿았다. 앞을 보니 그녀가 침대위에서 상체를 내 쪽으로 내밀고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 상태로 그녀와 나는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한참이 지나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누, 눈물이 흐르면 너무 불쌍해 보일 것 같아서 그런거야. 오, 오해 하지마.”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솔직하지 못한 여자다.
어느덧 시간이 되어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갈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WA2000.”
“어?”
“내 이름, WA2000 잘 기억해 둬. 나는 남들과는 취급이 다른 인형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문을 닫았다.

시간이 지나 그녀의 퇴원 날이 다가왔지만 그녀에게 가끔씩 이상한 두통증세가 보여 그녀의 입원이 더욱 길어졌다. 정밀검사의 결과는 1달 정도 뒤에 나온다고 하니 아마 그때까지는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녀가 심심하지 않게 계속 대화를 했다. 너무 많아서 기억도 나지 않고 쓸 자신도 없다. 그저 그녀와 마주앉아서 하하 호호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대화에 관심 없는 척을 하면서도 내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살며시 웃어주었다. 물론 그 표정을 나에게 들키면 정색을 하며 대화를 단절시키기는 하지만.

그녀는 병실 안에서 대체 뭘 하는 것인지 크고 작게 다쳤다. 내가 상처를 치료해줄 때 마다 시선을 피하며 미안하다고 말할 뿐 상처에 관한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왜 이리 솔직하지 못한 것 일까. 그래도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여워보였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그녀와 나는 터울 없이 대화가 가능한 사이가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쩌다보니 그런 상황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은 어떨까?‘하고 궁금해졌다.
그녀의 이름을 알아냈던 나는 그녀의 주변 인형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했다.
초콜렛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아이스크림 한 개를 샀다. 그 과정에서 MP5에게 얼마나 많은 우유를 가져다 바쳤는지 모른다. 그래도 MP5에게 우유를 바친건 신의 한수였다.

내가 병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나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나를 쓱 쳐다보고 다시 총기 손질에 집중했다. 나는 그런 그녀 앞에 그녀의 앞에 초콜렛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맞는 정보였던 모양이다. 고맙다 MP5.
1달 정도 병원 밥만 먹다가 눈앞에 나타난 아이스크림에 그녀는 적잖이 동요했다.
나는 그녀에게 살살 놀리듯이 물었다.
“먹을래? 아니다. WA2000같은 완벽한 인형이 이런 걸 좋아 할 리가 없으려나?”
그녀가 총을 닦던 손수건을 세게 쥐어 잡았다.
“다..당연하지! 내가 그런 걸 좋아 할리 없잖아!”
호오? 이것 봐라.
“아~그래? 그럼 이건 다 내가 먹어야겠다.”
물론 이건 굉장한 허세다. 나는 초콜렛아이스크림을 못 먹는다. 나 자신도 놀랐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쉽게 포기해 버린다면 내입장이 난처해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효과는 굉장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이불속에 있는 다리를 떨었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엄청 빠르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동요를 더욱 이끌어 내기위해 아이스크림의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자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아이스크림에 집중시켰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위아래로 움직이면 그녀의 고개가 따라 움직였다. 그런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을 터트릴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정말 안 먹을거야?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야.”
마지막이라는 단어에서 그녀는 울어 버릴 것 같은 눈을 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을게”
“뭐라고?”
“....먹을게“
“안 좋아한다며?”
“....거..거짓말...이야.”
솔직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라는걸 알았다.
여기서 나는 잔말 없이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으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철없던 나는 호기심이 발생했다. 잠시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욕해도 좋다. 지금 생각해도 실드가 불가능한 구제불능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다.
거기서 나는 과연 그녀가 이 아이스크림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흔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주세요~라고 해봐”
그녀의 손이 강하게 쥐어졌다. 빠드득하며 그녀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지 무언가를 중얼 거렸다.
“주...주...주...”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주..ㅅ”
그녀는 감정을 삭히는 듯이 숨소리가 거칠었다.
“주...세..”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잠깐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녀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버렸다. 나 자신에게 혐오가 느껴졌다.
그녀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쳤는지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 이상한 손짓을 다해가며 사과를 했다.
눈이 붉게 충혈된 그녀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스크림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군말 없이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훌쩍이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었다. 그녀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도 먹는걸 멈추지는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자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돌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한 얼굴은 본적이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놀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도도했던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이야. 동시에 너무나도 미안했다. 이 죄는 평생 사죄해도 부족할 것이다.
내가 빤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리 크게 화가난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다음날 나는 사과의 의미로 아이스크림을 한 무더기로 사서 병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딱히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좋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날 그녀에 병실에 찾아 갔을 때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포장 봉지가 셀 수 없이 많았다.




4.

그녀의 상태가 요즘 들어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다. 미약한 두통을 호소하는 주기가 짧아졌다. 원인불명인 투통이 이렇게 자주일어나면 큰 문제일 텐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약간 어지러운 수준이라며 강한 척을 했다. 정말이지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또다시 주륵주륵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지긋지긋하게 어두운 하늘이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험상궂은 아저씨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녀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창가에 팔을 올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내 기척을 느끼고 나를 쓱 쳐다보았다가 다시 창밖을 보았다. 나도 그녀 옆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흥미로운게 있을 줄 알았는데 늘 보던 평범한 풍경이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할 일이 그렇게 없어?”
“난 지금 일하는 중인데?”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것 일까?
그녀는 말없이 침대로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한참동안 밥도 먹지 않고 벽을 바라보고 누워있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잠깐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래?”
그러자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우산을 쓰고 그녀는 노랑 우비를 입었다. 왜 우비를 입었는지는 다음을 보면 안다.
그녀는 환자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빗속을 헤집고 뛰어다녔다.
눈 오면 정신 나간 것처럼 뛰어다니던 우리 집 강아지가 떠올랐다. 병실 안이 어지간히 갑갑했었나보다.
겨우 흥분을 진정시킨 그녀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빗속을 걷는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참고 끝없이 이어진 가로수 길을 걸었다.
이따금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뭐냐, 무지개에 관련된 노래였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녀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뭘 하는가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손가락으로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을 건드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 그녀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더니 정신이 이상해진건가?
나는 그런 걱정을 속으로 했다. 직접적으로 말했다간 빗속에서 먼지 나듯이 맞을 것 같아 할 수가 없다.
“뭐하는거야?”
그녀가 새초롬하게 내 앞을 지나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경 꺼”
잠시 후 내 앞을 걸어가던 그녀가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너무 드라마틱해서 그녀가 연기를 하는건가? 하고 잠시 의심했을정도로 갑작스러웠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바닥에서 머리를 붙잡고 몸을 둥글게 말아서 아픔을 참고 있었다. 참다못해 가끔 새어나오는 신음소리가 그녀의 위급함을 일깨워줬다. 나는 바로 본부에 연락을 했다.
잠시 후 본부차량이 그녀와 나를 데리고 본부로 향했다.

5.

환자를 데리고, 그것도 무단으로 나간 것 대문에 나는 근신처분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한동안 그녀의 간호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내가 아니다. 나는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서 그녀의 병실로 향하였다.
당연히 문 앞에서 제지를 먹었다. 강제로 들어가 보려고도 했더니 ‘해고’라는 단어까지 나올 뻔했다. 소란을 듣고 나온 그녀가 내 팔을 붙들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집에 돌아가야 할 뻔 했다. 나를 끌고 들어온 그녀는 평소처럼 침대에 앉았다.
나도 낡은 나무의자를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오늘은 왜 온거야?”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일 때문에 온거야?”
“아니, 오늘은 평범한 병문안.”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내가 가져온 물건에 흥미를 보였다.
“그건 뭐야?”
“아, 마트에서 DVD사왔어. 좋아할지는 모르겠네.”
내가 꺼낸 영화는 MP5가 말해준 그녀가 보고 싶어 했다던 감동적인 영화였다. 표지를 보더니 그녀는 눈이 살짝 커지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다 다시 관심 없는 척을 하며 말했다.
“트, 틀어봐. 분명 형편없는 영화일 테지만 봐주기는 할게.”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보고 싶어했다던 영화가 맞는 듯 했다.
고마워 MP5!

나는 DVD를 기기에 넣고 다시 나무의자에 앉았다.
“여기에 누워서봐.” 그녀가 자신의 옆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냥 너가 불편하게 앉아 있는게 보기 싫은거 뿐이니까, 오..오해는 하지마.”
네, 네 어련하시겠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침대로 들어갔다.
나와 그녀는 침대에 나란히 다리를 펴고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걸 다 느낄 새도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부정하지 않겠다. 솔직히 재밌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시청했다.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은 정말 천재일 것이다. 보다가 나도 살짝 눈물이 나왔다.
‘훌쩍’
아무래도 여기에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운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중에는 아무소리도 안내다가 영화가 끝나자 그제야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름 나를 배려해준 것 같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그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버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강제로 그녀의 보호막을 걷어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 포기했는지 이제 만족하냐? 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아니, 수정하겠다. 사랑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다시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웃음을 뱉어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오늘은 내 인생에서 정말 좋았던 하루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내 인생의 반환점이다. 물론 반환 방향은 내 인생의 나락이다.

실실 웃던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그녀가 손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의 눈빛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손도,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입도 전부 이상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가져가보았다.
크흑.
나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배에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현실을 부정했다. 그녀가 나에게 폭력을 사용했다. 어째서지? 왜지? 나는 침대위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들어온건 검은색 원통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직감했다. 소음기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내 미간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아니었다. 저건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그 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든 총을 바라보았다. 나와 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총을 떨어트렸다.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다. 그녀의 공포에 질린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어보았다.
“오지마!!!”
그녀가 온몸의 힘을 다 사용해서 나에게 소리쳤다.
“으윽..오..오지마.”
그녀의 두 눈은 공포에 가득 차있었다.
나는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쓰러진 몸을 질질 끌어 나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오...오지마..”
그래도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자세를 낮추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는 떨리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그녀는 정말 큰소리로 울었다. 그녀가 세게 쥐어 잡은 등 쪽 옷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그녀는 울었다. 계속 울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비겁하다 해도 좋다. 위선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흔해 빠진 ‘괜찮아 질거야‘라는 말도 못했다.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은 진심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그말을 해야했다. 나도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겁쟁이다. 위선자다. 쓰레기다. 병신이다. 아무것도 못하고 승부의 양갈래길에서 주저하다 포기하는 머저리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곁을 떠난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전할 상대가 없는 지금에야 용기가 생겼다.
왜 그랬을까. 나는 뭐가 무서워서 그날 도망을 친 거지? 왜 이제 와서 염치없이 용기가 생기는 거야? 왜 나는 늘 도망만 치는 거야? 내가 그리폰에 들어온 것도 사실 사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였던 것 아니야? 그녀에 대한 감정도 사실 전부 거짓이었던거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 언제나 진심이었어. 내 감정은 거짓이 아니야. 그러면 대체 왜 그런거지? 왜 도망친거냐고.
한가지 결론이 떠올랐다.

내가 위선자이기 때문이야.

나는 늘 이날을 후회한다. 지금 내 머리에 검은 총구를 가져다 댄 이 상황에서도 후회한다. 왜 그 말 하나를 못했을까. 그때 그 한마디를 전달했으면 어땠을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죽었다. 마지막까지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그녀는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 내가 머저리같이 그녀를 떠나보낸 그 상황을 적어야한다. 적든 안 적든 결말은 같지만 내가 얼마나 머저리였는지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역겹고 떠올리기도 싫지만 해보도록 하겠다.

그녀는 내 품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녀가 진정되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아서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나는....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웃기지도 않는다. 가당치도 않다. 병신 같은 새끼.
심지어 내가 나갈 때 그녀는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런 그녀의 팔을 나는 천천히 내리고 문밖으로 향했다. 이걸로 설명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도망쳤다.

솔직하게 그때의 내 마음을 말하겠다.
무서웠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녀의 옆에 있다가 폭주해서 나를 죽여 버린 후 그녀가 받게 될 충격이 무서웠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내가 죽는건 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가 받게 될 정신적 충격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도 좋다. 어차피 위선자의 핑계일 뿐이다.

다음날 나는 뻔뻔하게도 그녀의 병실을 찾아가보았다.
병실 안에는 의자위에 놓여진 그녀의 스코프만 있었다.


6.

본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원인은 WA2000의 탈주. 본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안내방송에서는 그녀의 ‘우산 감염’을 언급했다. 처음 상부에서는 생포를 선언했으나 이내 사살로 명령이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의 클라운드 마인드맵을 전부 훔친 USB를 가지고 도망갔다고 한다. 만약 그USB가 부서진다면 그녀의 복구는 영영 불가능해진다.
나는 병원을 박차고 나와 달리고 달렸다.
위선적이다.
그녀가 있을만한 곳을 생각하면서 달렸다.
위선이야.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그렇게 까지 그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

한참을 달리자 운좋게 그녀의 소총 파편을 찾아냈다. 그 옆에는 붉은 액체가 흘러서 이어져 있었다. 스코프도 없는 상태에서 교전을 한 것일까. 이럴거 라면 왜 스코프를 두고 간 것일까. 나는 거기서 떠올렸다. 그녀는 살아남으려고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을 하자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핏자국을 따라서 달렸다. 핏자국은 어떤 제철공장으로 이어져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간 흔적을 발견했다.
주말이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제철공장의 용광로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용광로는 한번 식으면 온도를 올리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가 굳이 이곳으로 왔을까. 생각해볼 것도 없다.
나는 용광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발견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환자복이 아닌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복장을 하고 옆에는 산산조각이 나있는 소총을 들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검은 권총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빠르게 권총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어...어째서..”
나는 평소처럼 웃으며, 그녀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손을 뻗었다.
“돌아가자”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요 며칠간 정말 많이도 운다. 나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에게 한 발짝 내딛었다.
그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 가려 했다.
탕. 팅.
내 발밑 바로 앞에서 총알이 박혔다. 그 바람에 나는 뒤로 넘어졌다.
총성을 내뱉은 총은 이번에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뭐 하는거야.
총구가 정확히 그녀의 관자놀이에 안착했다.
뭐 하는거냐고.
“뭐...하는거야?”
“미안해. 이젠 시간이 없어.”
나는 그때 똑똑히 보았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그녀의 표정을.
나에게 지어준 그녀의 맑은 웃음을.


“안녕”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제철공장속 공기를 뒤흔들었다. 힘없이 넘어지는 그녀의 약하고 가녀린 몸은 자비 없이 열을 뿜어내는 용광로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있던 자리만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야 실감이 되기 시작한 내 몸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가 있었던 자리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망가진 소총과 검은 권총만 놓여있었다. 그 밑으로는 자비 없이 끓고 있는 용광로가 보였다.
아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권총을 들었다. 소총도 들었다. 그 두개를 품에 안자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죽었다. 이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한참을 울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결국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워서 용광로 앞에 섰다. 그녀처럼 내 머리에 총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그리폰의 인형들에게 제지를 당해서 미수로 끝나 버렸다.

인형들을 보자 나는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냐고. 왜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냐고. 왜 그녀가 이곳을 선택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냐고. 전부 나에게 하는 소리다. 나는 그녀들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파렴치한 위선자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죗값을 치르려고 하는 것이다. 위선자로 살았던 죄, 머저리처럼 승부를 포기한 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 형량은 당연히 법정 최고형이다.
비가 갠 맑은 하늘아래. 구름은 하나 없는 화창한 날씨. 그녀가 좋아하던 비 내리는 날의 바로 다음날, 나는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 거리에서 그녀가 흥얼거렸던 음악이 생각났다. 나는 낮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불러보았다. 아, 기억이 났다. 가장 유명한 가사가 이 노래의 제목이었다.

나는 이제 무지개 너머 어딘가로 갈 것이다.
총구를 내 머리에 대었다. 무책임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살은 불합리적인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에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있다고 해도 내 신체뿐이다. 그 신체도 아마 좋은 곳에 쓰일 것이다. 서류는 싸인 한 채로 내 책상위에 올려져있다. 누군가가 내 몸을 발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폰 인형들은 귀가 좋으니 얼마안가 발견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한번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일곱 빛깔로 빛나는 무지개는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그녀의 모습처럼 투명하고, 붉은색으로 자신을 감추는 그녀처럼 붉은색이 겉을 감싸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인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지금 갈게.

너가 있을 무지개 너머 어딘가로.

fin

댓글은 관종인 저에게 힘이됩니다. .만 이라도 좋습니다. 읽어 주셨다면 감사합니다.

Lv28 렝가는o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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