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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WA2000)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이콘 렝가는op다
댓글: 9 개
조회: 1796
추천: 12
2018-01-01 07:51:44



1.




 크리스마스이브의 늦은 밤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지휘실에서 밀린 서류정리를 했다.
 며칠 동안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탓인지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해있었다.
 그나마 내일 하루의 성탄절 휴가 생각으로 무너질 것 같은 정신을 겨우 지탱했다.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크리스마스다.
 그런데 내게 내일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술자리를 같이 하자고 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어떻게 아무도 나에게 동행을 권유하지 않는 걸까. 혹시 나도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걸까. 조금은 상처받았다.
 덕분에 내일은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슬프긴 하지만 뭐,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자 밝은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 반짝 빛나는 별빛들 사이에서 홀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구름이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흘러내리듯이 다리를 쭉 피며 말했다.
 “올해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물 건너 간 것 같네.”
 한탄에 가까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다시 업무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WA2000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마 내일 있을 크리스마스준비에 열중이겠지.
 옆에 있는 도장을 들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하하 호호 웃고 있을 WA2000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서류에 도장을 큰소리가 나게 찍었다.
 쾅. 하고 둔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지으며 도장을 꾹 눌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때였다.
 “무, 무슨 일 이야?”
 문이 벌컥 열리며 상기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지휘실로 내가 아는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 색 제복에 붉은 넥타이, 와인 빛 머릿결을 흩날리는 여자 하나가 커진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두 눈이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휘둥그레져있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튀어 오른 무릎이 책상에 부딪쳤다.
 덕분에 서류에 찍은 도장이 밀려나면서 각인을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별일 아니야.” 무릎이 조금 아팠지만 애써 무시하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준비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여기있는거야?”
 WA2000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우, 우연히 앞을 지나가다가 들어온 것뿐이라고! 지금 얼마나 바쁜 줄 알아?”
대부분 이런 말을 들으면 ‘아, 그렇구나’ 라고 반응할 것이다. 
 물론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한정이다. 그녀는 내가 여기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함께 했던 인형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강 알 수가 있었다. 저 말은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하고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문 앞에서 나 기다리고 있었어?”
 “어?... 어떻.. 아,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맞는 거 같은데?”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주먹을 꽉 지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이럴 땐 그냥 속아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럼 가던 길 가. 난 서류정리를 끝내야 하니까.”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당황함이 묻어 나왔다.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색한 두 팔이 자기자리를 찾아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녀는 자기분에 못 이겨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건 조금 뜻밖의 결과였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평소의 그녀가 아닌 것 같아보였다. 원래라면 ‘이 쓰레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고 하며 나에게 온갖 매도를 퍼부을 텐데.
 그래도 그런 건 무시하고 서류정리와 서류결제를 다시 시작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 패턴에 의하면 그렇다.
 
 잠시 후 내 예상대로 그녀가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WA2000이 내 옆으로 의자를 가지고 와 앉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와줄게.”
 “바쁘다며.”
 “그러니까 더욱 감사하라고.”
 그녀는 그 말을 마치고 내 서류 몇 개를 가져갔다. 역시 무언가 이상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다시 업무에 들어갔다.
 다행이도 그녀가 도와준 덕분에 일은 금방 끝났다. 금방이라 해봤자 4시간 정도가 걸렸다.

 마지막 서류를 책상에 넣고 옆을 바라보니 책상을 베고 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잠시 그녀의 자는 얼굴을 감상했다. 자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았다. 
여전히 순수한 소녀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용한 방이어서 그런지 새근새근 쉬는 숨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이런 여자가 평소에는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할 수가 있는 걸까. 이해불가다.

 나는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뜬 WA2000은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깜짝 놀라던지 반동으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버렸다.
 꺄악.
 쾅.
 “괜찮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붉은 빛 눈에는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무렇지도 않아. 멀쩡해.”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괜찮다니까!”
 나는 그녀가 문지르는 부분을 살짝 누르며 말했다.
 “조금은 솔직해져보지 그래?”
 내가 머리를 누르자 그녀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찔거렸다.
 “뭐 하는 거야!”
 “거봐, 아프잖아.”
 그녀의 통증이 진정된 것 같아보여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가자. 벌써 새벽 2시야. 바래다줄게”
 WA2000은 나를 원망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내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휘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그리폰의 복도를 나란히 서서 걸었다. 늦은 시간 전기를 아끼려는 심산인 것인지 불은 전부 꺼져있었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달빛만이 우리의 등대가 되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내일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어차피 그녀는 이미 선약이 있을 것이다. 워낙에 인기가 많은 인형이니. 애초에 감히 내가 올려다보아서도 안 되는 나무 같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잠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춰주었다.
날카로운 인상이 차가운 달빛 덕분에 더욱 날이 서있었다. 붉은색리본을 흩날리며 걷는 그녀의 당당한 걸음걸이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점점 더 깊은 심해에 감춰졌다.

 WA2000은 가끔가다 ‘춥다’라는 말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춥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얼굴도 새빨개 져있었다. 추워서 그런 건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다지 추위를 타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아까도 그러더니 역시 오늘 따라 뭔가 이상했다.

 조용한 복도가 끝나고 그녀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나는 바로 살짝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뜨려했다. 이게 가장 깔끔한 마무리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내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내가 뒤를 돌아서 가려고 발길을 옮겼을 때 그녀가 내 등 옷깃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나는 최대한 놀란 기색을 숨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위치여서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암영에 숨겨진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저..저기, 그.. 그게 말이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내, 내일 시간 있...어?”
 “있기는 한데. 왜?”
 그녀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고 말했다.
 “그럼 내일 12시까지 시계탑에 올 수 있어?” 다시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 물론 내일 혼자 있을게 불쌍해서 내가 자원 봉사 해주는 거니까. 착각은 하지 마.”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다. 그래서 더욱 담담한척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정이 굳는 건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다.
 “알았어. 12시에 시계탑이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숙소 문을 열었다. 문으로 들어가면서 그녀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쓰레기 마냥 늦지 마. 쓰레기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나왔다. 저래야 내가 알던 WA2000이지. 하도 들었더니 이제 저런 말 정도는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발길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예전에는 지겨워서 짜증나던 길거리의 카페음악 소리도 즐겁게 들렸다. 길거리는 수많은 조명들이 또 다른 밤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내일은 뭘 입고 가는 게 좋을까? 어디를 가야하지. WA2000이 좋아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점점 구름에 가려지는 하늘밑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2.

 크리스마스이브. 그날 나는 지휘관의 사무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스스럼없이 들어가겠지만 지금 만큼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게 나는 지금 지휘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는 게 목적이여서다.
 엘리트 인형답게 철저한 나는 다른 인형들과 지휘관들에게는 이 사람과 약속을 잡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해두었다. 
 그 덕에 지휘관은 지금 한가할게 분명했다.
 그래도 안 좋은 생각을 집어 던질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쳤으면 어떡하지? 가족이랑 보낸다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는 거 아니야? 등의 생각에 잠겨서 섣불리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뗀 게 벌써 세 자리수를 넘어가려고 했다.

 드디어 결심이선 나는 크게 숨을 한번 들이 쉬고 손잡이를 잡았다.
 으. 실패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용기의 요정이라도 나타나서 나에게 힘을 주었으면 좋을 텐데. 95식이 충고해줬던 대로 간신히 용기를 냈는데 시작부터 이 모양이다.
 그때였다.
 쾅. 하고 엄청나게 큰소리가 지휘실 안에서 들려왔다.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불행회로가 돌아갔다. 첩자인가? 습격?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소리쳤다.
 “무, 무슨 일이야?”
 마인드맵이 활성화된 이후로 그렇게 빨리 결단한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는 지휘관이 보였다. 
 무언가 불편해 보였지만 다행이도 내가 생각하던 상황은 아니었나보다.
 그는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무릎을 문지르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크리스마스 준비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여기있는거야?”
 나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내일 시간 있어? 내일 만나지 않을래. 같은 이야기였다.
 “우, 우연히 앞을 지나가다 들어온 것뿐이라고! 지금 얼마나 바쁜줄 알아?”
 어라?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앞에서 나 기다리고 있었어?”
 응. 아까부터 계속.
 “어.?..어떻...아니, 절대 그럴 일 없잖아”
 왜 이러는 거야. 이러면 안 돼.
 “맞는 거 같은데?”
 응. 맞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뭐라고 하는 거야. 진짜.
 “그래? 그럼 가던 길 가. 나는 서류정리를 끝내야 해서”
 아. 다 틀렸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자책감과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지금 뭘 한 걸까.
 결국 나는 지휘실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휘실 바로 앞 벽에 기대어서 생각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정말 다 틀려버린 걸까. 나는 왜 이런 걸까.
 나도 이런 내 자신이 싫다. 지휘관이 늘 내게 말했었다. 왜 이리 솔직하지 못하냐고. 나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난 어떻게 해야 좋은 거냐고.
 95식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텐데. 그녀는 지금 트리 만들기에 열중이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배수진이라고 생각하니 의지가 아까보다 불타올랐다.
 나는 다시 한 번 깊은 심호흡을 하고 지휘실로 들어갔다.
 다행이도 작전은 잘 먹혀들었다. 지휘관이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서류를 정리 하는 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았다. 가장 말하기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깜빡 잠에 드는 바람에 야속하게도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와 지휘관은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란히 복도를 걷자 평소보다 훨씬 긴장되었다. 마인드맵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심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속을 들켜버릴 것 같았다.
 다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추운 척을 했다. 
 추워서 얼굴이 빨간 거야. 라고 지휘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것 같아 가끔씩 ‘춥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짓말 같이 짧았던 복도가 끝나고 내 숙소의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혹시라도 지휘관이 데이트 신청을 해주지 않을까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살짝 웃더니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아. 역시.
 그가 등을 돌리는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선약이 있는 걸까. 혹시 내가 데이트 신청을 한다면 그건 지휘관에게는 민폐인걸까.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정말 나는 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걸까.
 이밖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순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잡생각들을 제치고 내 머릿속을 장악했다.
 이번이 마지막기회다.
 이 한 문장에 힘입은 나는 바로 그의 등 옷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저..그...내, 내일 시간 있...어?”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있기는 한데. 왜?”
 “그럼 내일 12시까지 시계탑으로 올 수 있어?”
 아. 너무 노골적이었나?
 “무, 물론 내일 혼자 있을게 불쌍해서 내가 자원 봉사 해주는 거니까. 착각은 하지 마.”
 그의 표정은 계속해서 담담했지만 다행이도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약속을 잡고 숙소에 들어오자 문 바로 뒤에서 여러 인형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다 들었던 걸까.
 나는 수많은 눈을 피해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금은 저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세워둔 계획들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휘관과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리 입고 갈 옷도 생각해 놓지 못했다.
 결국 밤새 옷을 골랐다. 얼마나 많이 입었다 벗었다 한지 모르겠다. 한참이 지나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잠에 들기 전 나는 그에게 주기위해 예전부터 준비했던 작은 상자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붉은 포장지로 감싸인 상자를 머리맡에 두고 몇 분간 지켜본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3.

 다음 날 11시경,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금 일찍 출발했다.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내 몸을 덮쳤다. 조금만 숨을 내뱉어도 입김이 시야를 가렸다.
 이른 시간임에도 길거리는 온갖 크리스마스 노래와 인파가 섞여서 매우 혼잡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들이 통곡의 벽을 실감하게 했다.
 사람이 붐비는 거리를 지나자 조금은 한적한 공원이 나왔다. 수많은 나무들이 사이좋게 전구를 나누어 가져 빛을 내고,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의 천사들은 산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커플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세요.’라는 구호와 함께 종을 치는 자선단체도 많이 보였다. 그들의 종소리가 멀어질 때쯤 시계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속장소에 점점 가까워지자 그 밑 의자에 앉아있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WA2000이었다.
 나는 바로 시계를 확인 했다.
 11시 20분. 분명 내가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설마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그녀는 붉은색 목도리와 검은 색 코트 같아 보이는 겉옷을 입고 있었고, 그 안으로는 학교 교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옆에는 커다란 바이올린 가방이 놓여있었다.
 저런 옷은 또 어디서 구한건지. 뭐, 멀리서 보아도 정말 잘 어울리기는 했다.
나는 잠깐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를 기다리면서 어떤 행동을 할까? 라는 호기심에서였다.
 계속해서 서 있는 건 무리인 것 같고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WA2000은 하늘을 보며 흰 입김을 내뿜었다. 이윽고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작은 상자를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수줍음이 심한 소녀처럼 목도리로 자기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댔다. 몇 번 크게 심호흡도 했다.
 그녀의 저럼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 나왔다. 누가 과연 WA2000이 저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상상이나 할까.
 10분간의 관찰을 마치고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를 발견한 WA2000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와, 왔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건데 멍청아.”
 “지금 11시 30분인데? 네가 일찍 온 거잖아”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그거야 집에 있어봐야 아무도 없으니까 심심해서 일찍 나온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네네. 그러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올린가방을 가리켰다.
 “저 가방은 뭐야?”
 그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는 엘리트 인형이라 언제 어떻게 노려질지 모르니 항상 준비 해야 한다고.”
 “잠깐만. 너 그걸 들고 온 거야?”
 “당연하잖아?”
 “이런 도시 한복판에?”
 “고층빌딩은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나는 테러리스트 조짐이 있는 여자랑 같이 다닐 마음은 없는 걸.”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농담이야. 슬슬 어디로 들어가자, 춥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그녀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아무데나 상관없어. 잠깐만, 설마 아무 준비도 안하고 온 거야?”
 나는 차분하게 그녀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했다.
 “약속을 잡은 건 너고, 나는 약 8시간 전에 약속을 잡힌 사람이야. 누가 준비하는 게 맞을까?”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약점을 찌르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설마 엘리트인형이 이런 것까지 생각 안 해 놓은 건 아니지?”
 “그, 그거야...칫. 알았어! 알았다고.”
 WA2000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지나쳐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역시, 생각해놓은 곳이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시내로 들어갔다.

 우리는 시내를 걸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중 발걸음이 멈춘 가게는 게임센터였다. WA2000이 게임기를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바람에 나도 딸려 들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상한 고전 게임기 앞에 앉아 나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뭐해? 빨리 와서 앉아.”
 “처음 보는 게임인데?”
 “나도 잘은 몰라. 그냥 RFB가 매일 숙소에서 하는 게 재밌어보였거든.”
 “조작법을 알고?”
 “지금부터 알아가지 뭐.”
 그렇게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상한 격투게임이었다. 이름이 길타 기어였나, 갈티 기어였나? 뭐 대충 비슷할 거다.
 그녀는 게임을 정말 못했다. 둘 다 같은 시작 선에서 출발했음에도 달리는 속도는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내가 압도적인 체력차이로 연거푸 이기자 악에 받친 WA2000이 발을 동동거리며 짜증을 냈다.
 “하, 이렇게 잘할 거였으면 프로게이머나 하지 왜 지휘관이나 하고 앉았대?”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네가 정말 못하는 게 아닐까?”
 “이, 입 다물어!, 다시 해 이번엔 이길 테니까.”
 그 뒤로도 그녀는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4.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게임장에서 나온 우리는, WA2000이 알아봤다는 식당을 찾기 위해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길을 걸었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게임을 했던 탓인지 허기가 갑자기 심하게 몰려왔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유혹하는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기 위해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어제 밤과는 다르게 짖은 구름이 껴있었다. 달빛도 삼켜버린 어두운 하늘과는 다르게 거리는 현란한 인공 별빛들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는 불빛의 향란을 즐기며 길을 걸었다.
 징글벨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그녀와 나란히 걷자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이렇게 내 옆에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부관으로서 옆에 있어주기는 했지만 나는 늘 그게 업무적인 것이라고 치부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업무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용무로 그녀와 나란히, 그것도 크리스마스 날에 함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WA2000은 아까전의 완패가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해서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한탄 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100판을 넘게 했는데 한판을 못이길 수가 있는 거야?”
 “네가 유독 게임을 못하는 거라니까.”
 “흥. 두고 봐. 나중에 퍼펙트게임으로 이겨줄 테니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 같은데?”
 “RFB한테 특훈을 받아서라도 이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하. 마음대로.”
 이밖에도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다지 영양가가 있는 대화거리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적지에는 금방 도착했다. 그녀가 말했던 건물은 한 고급레스토랑이었다.
 가게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무슨 음식점이 이렇게 높고, 넓고, 빛나고, 호화스러운 건지.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왔던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줄 알았다.
 넋 놓고 건물을 둘러보다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나 이정도 돈 없어.
 그녀가 주머니에서 카드하나를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있어.”
 “여기가 얼마인줄 알고 가는 거야?”
 “나는 엘리트라고. 그 정도 조사도 안 해 봤을 거 같아? 멍청이.”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고 말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녀가 내 팔을 강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입 다물고 들어와. 남이 호의를 베풀 때, 잘 받을 줄 아는 것도 예의라고.”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하는 수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느꼈지만 고급 레스토랑은 정말 컸다. 어떤 것이? 모든 것이.
 천장에 달려있는 거대한 샹들리에에서 영롱한 호박색 불빛이 내부를 비춰주었다. 고급 목재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식탁들과 의자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내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은은한 선율이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풍경은 처음 보는지라, 내 팔을 끌고 가는 WA2000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서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직원은 우리를 창가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커플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창가자리로 앉혀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남들이 우리를 보았을 때 영락없는 커플처럼 보인다는 거니 기분은 좋았다.
 테이블에 앉아있고 조금 기다리자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WA2000은 예의를 갖춰 각이 잡힌 행동으로 음식을 먹었다. 나도 따라해 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 색처럼 붉게 빛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눈 내린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새 하얀 결정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만 내리던 눈송이들이 어느새 여름철 마지막 날개 짓을 하는 하루살이무리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와인 잔을 전부 비우고 말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그러게 올해도 틀린 줄 알았는데. 뜻밖이네.”
 나도 그녀를 따라 와인을 한 모금 음미해 보았다. 와인은 달달할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생각보다 높은 도수에 문득 그녀가 술에 약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이정도로 취하지는 않겠지. 얼굴이 조금 빨개진 것 같지만 늘 붉었으니 상관은 없을 것이다.
 WA2000은 그 뒤로도 와인 몇 잔을 더 마셨다. 그녀의 잔이 비워질 때마다 내 걱정도 쌓여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취기가 올라와서 조금은 풀린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관, 지휘관.”
 “왜?”
 “밖에 나가지 않을래?‘
 “벌써 배불러?”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상관없어. 그냥 나가고 싶어졌어.”
 나는 내가 잘라놓은 스테이크를 한입 먹고 말했다.
 “그러지 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서를 슬쩍 보았는데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간은 노예처럼 부려져도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거센 눈발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를 이끌어갔다. 그 짧은 시간사이에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그런 건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렸다.
 앞을 내달리던 그녀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 이렇게도 웃을 수가 있었구나.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소녀 팬처럼, 그녀는 아주 신이 나있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취한 것 같아보였다.
 한참을 내달리던 WA2000이 어느 한 공터에 멈춰 섰다.
 오랜 시간 눈에 맞았더니 그녀의 머리와 옷에는 눈이 한가득했다. 바이올린 가방에도 눈이 쌓여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눈사람 만들자.”
 갑자기 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뭔 헛소리야.”
 WA2000이 갑자기 내 팔을 껴안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혀가 조금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날에 눈사람 만들어보고 싶었단 말이야. 만들자. 응?”
바로 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자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대답해버렸다.
 내 대답을 들은 WA2000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빨리 끝내고 따듯한 실내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도 돕기 시작했다.
 한참을 눈을 굴렸더니 어느새 내 무릎 높이크기의 눈덩이가 만들어졌다.
 눈을 굴리다가 보니 어느새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눈도 제대로 못 굴려서 아직도 내 눈덩이의 반절만 했다.
 나는 허리를 펴서 스트레치를 하고 말했다.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더 크게 만들어야지.”
 “그 속도로는 오늘 안에 불가능할걸.”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 말을 마치고 자기가 만들고 있던 작은 눈뭉치를 내 눈덩이 위에 얹었다.
 쭈그려 앉아서 눈사람을 빤히 쳐다보던 WA2000이 갑자기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근처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녀는 나뭇가지 2개를 들고 왔다. 그걸 본 나는 근처에서 돌멩이 몇 개를 주워왔다.
 나뭇가지로 팔을 만들고 돌멩이로 눈을 만들자 꽤 그럴듯한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눈사람이 완성되자 WA2000은 그 앞에 앉아서 눈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섞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사람 앞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WA2000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제야 술이 깬 걸까.
 “알았으면 들어가자 추워. 우리 지금 눈사람 3남매 같은 거 알아?”
 “지금 까지 전부 미안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무슨 소리야. 시한부 판정이라도 들었어?”
 “지휘관을 보고 말하면 절대 말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래. 대신 눈사람에게 말할게. 들어줘.” 그녀가 눈사람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해. ....지금까지 나쁜 말만 해서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어. 매일 보면서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말하지 못했어.... 늘 곁에 있으면서, 매일 함께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어.”
 눈사람을 쓰다듬던 붉게 얼어붙은 손이 멈춰지고 이내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얗게 얼어붙은 공기도 잊어버릴 만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엘리트고 나는 그저 일개 신입지휘관 나부랭이일 뿐이다. 애초에 격이 다르다.
 나와 같이 입사했던 지휘관은 엄청난 실적을 쌓고 있지만 나는 전혀 아니다. 그리폰에서 대해지는 나의 취급은 언제나 찬밥신세였다. 그래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이런 상황이 기뻤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어릴 때의 악습관이 또 나온 것이다. 왜 항상 그녀의 앞에만 서면 얼굴이 굳는 걸까. 
 나도 그녀처럼 전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인 모양이다. 머릿속으로 ‘표정 좀 풀어’라고 얼굴 근육에 명령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WA2000이 하늘을 올라다보며 말했다.
 “오늘이라면 용기가 날줄 알았어. 분명 특별한 날에는 내가 변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 근데 전혀 아니었어. 나는 하나도 변하지 못했어. 봐, 지금도 술기운에 빌려서 말하고 있잖아.”
 그녀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술김에 눈사람이라도 보고 말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성공한 것 같아. 이제 용기가 났어.”
 그녀가 크게 숨을 한번 들이 쉬고 말했다.

 “좋아해. 지휘관.”

 눈결정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던 한마디였다.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가끔 지나다니던 자동차소리도, 저 멀리 마을에서 짖어대는 개 짖는 소리도, 그녀가 떨어트린 한 방울의 눈물도 전부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눈물을 흘린 WA2000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지휘관은 아직도 그 표정이네.”
무슨 소리야.
 “언제나 그 표정이었어. 내가 나쁜 말을 할 때도, 가끔 네 어깨에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에도, 내가 만든 요리를 가져다주었을 때도, 같이 서류정리를 할 때도. 언제나 그 표정이었어. 딱딱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 늘 괜찮다가도 내가 뭐만 하면 그 표정이었어.”
 그런 게 아니야.
 “그래도 그런 점도 좋았었어. 어쩌면 그런 점에 반한 걸지도 몰라. 그런데..근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더니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퉁퉁 부어서 붉게 변한 가녀린 손가락이 오작동을 하는 것처럼 떨렸다.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무기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만큼은 그 표정을 못 견디겠어.”

 비수가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어라고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입 근육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뭐라고 말 좀 해봐. 그게 아니라고, 완전히 착각이라고 말을 해보라고 이 멍청한 입아.
 WA2000은 목에 두르고 있던 긴 목도리로 눈물을 감추었다.
 “미안해. 주정부려서.....그럼 갈게.”
 그녀는 나를 지나쳐서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녀를 잡으러 가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당장 달려가서 그녀를 잡지 않고 왜 이러고 멀뚱멀뚱 서 있는 거지?
 갑자기 일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좀 솔직해질 수 없어? 
 완전히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왜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야? 
 저 자존심만 센 WA2000도 모든 걸 내려놓고 다 털어놨는데 겨우 나 같은 사람이 그걸 무시해도 좋은 거야?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이득이 있다고 치자, 그게 그녀를 잃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야?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이 습관은 전부 여자에게 배신당한 우리아버지가 때문이잖아.
 유치원 때부터 여자는 전부 속물이다, 여자는 독이다, 여우다,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습관이 안 생기겠어.
 그런데 말이야. 침착하게 잘 생각해보자. 그 아버지란 사람이 말했던 여자와 그녀가 같아? 그녀가 정말 너에게 있어서 독 같은 여자야? 여우같아? 정말 멀리해야할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을 하자 순간적으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내 머릿속을 한번 훑고 지나갔다.
 처음 만났던 순간. 그때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었다.
 그녀와 나의 첫 작전. 그때 전장에서 싸우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맨날 나를 보고 쓰레기 같다고 말하던 순간들. 전혀 진심으로 안보여서 오히려 귀여워보였다.
 야간업무에 지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모습. 새근새근 잠을 자는 게 정말 사랑스러웠지.
 먹을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음식을 가져왔던 순간. 생긴 게 그래서 그랬지 나름 먹을 만 했었어.
 그 밖에도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녀의 뒷모습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나는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장벽에 막혀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주변을 둘러보며 비슷한 옷을 찾아보았다.
 이제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캐롤과 징글벨이 요란하게 귓속을 울렸다.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감정이 슬픈 사람이라면 분명 이렇게 시끄러운 곳은 피할 것이다. 나는 바로 목적지를 바꾸어서 주변의 조용한 주택가로 들어갔다.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찾아냈다. 우는 소리가 들려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집과 집사이의 있는 작은 틈새에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가픈 숨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그녀의 서럽게 우는 소리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내가 바로 앞에 서자 그제야 기척을 눈치 챈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WA2000은 훌쩍이며 말했다.
 “왜, 왜 온 거야. 얼마나 추하게 있는지 구경하러왔어? 쓰레기 자식아.”
 나는 그런 말은 무시하고 벽을 기대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도 뭐하나 고백해도 될까?”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솔직해질 자신이 있었다.
 “....어?”
 “나도 너처럼 솔직하지 못해. 그걸 이제야 알았어.”
 WA2000은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나의 습관, 나의 성장과정, 내가 살아온 세상, 나의 아버지, 우리 어머니.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 그녀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랬구나.”
 “미안해. 주정부려서.”
 “지휘관은 별로 마시지도 않았잖아.”
 “그냥 그런 걸로 해줘.”
 WA2000이 내 옷에 쌓인 눈을 치우고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알았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서로의 감정과 지금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충 알 수가 있었다.
 “저기 말이야 WA2000”
 “왜?”
 “좋아해.”
 “치, 이제 와서?”
 “그래서 싫어?”
 “...그, 그건 아니야.”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우리는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WA2000이 주머니에서 상자하나를 꺼냈다.
 “받아, 선물이야.”
 “뭐야 이게?”
 “원래는 고백하고 주려했는데, 누구 때문에 전부 틀어져서 지금 주는 거야.”
 나는 작은 상자를 받아서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잘 포장된 반지 2개가 들어있었다.
 “너 말이야. 이런 걸 사놓고 내가 거절했으면 어떻게 하려했던 거야?”
 “원래는 반시체가 되도록 두둘겨 팬 다음 강제로 끼우려 했는데 생각처럼 잘 안됐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가 준비했던 반지를 껴보았다. 정확히 맞았다.
 “내 손가락 치수는 어떻게 안거야?”
 “그런 게 있어.”
 “조금은 소름 돋는걸.”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안 끼워줄거야?”
 나는 바로 그녀의 반지를 꺼내들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어두운 밤하늘을 투영시켜 어두운 빛을 냈다.
 나는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흘렀다.
 WA2000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차, 착각하지 마.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에 쌓여있는 눈을 털어주었다. 그녀도 팔을 뻗어서 내 옷과 머리에 쌓여있는 눈을 털어주었다.
 내 머리를 털어 주던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입맞춤을 했다.
 당황한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얼굴이 더욱 빨개진 WA2000이 목도리로 자기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크, 크리스마스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라고! 다, 다음엔 없을 줄 알아.”
 “알았어. 다음을 기대할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더 이상 있으면 얼어 죽겠다.”
 "그래."

 그녀와 나는 손을 꼭 마주잡고 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거짓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던 우리의 위로 투명한 눈 결정들이 내렸다.
 언젠가는 오늘 내린 눈들처럼 새 하얗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겠지.
 나는 오늘 내린 눈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솔직했고, 처음으로 서로의 하얀 눈 결정을 보았던 이날을.
 오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fin.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네요. 꽤나 긴 시간동안 제 글에 대한 자괴감때문에 글을 못썼었네요. 
 여전히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셨다면 대단히 큰 감사의 인사 올리겠습니다.



Lv28 렝가는o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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