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타는 선착장에서 소녀를 보자 곧 이비(李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비는 강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로체스트서는 이런 강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 이.
벌써 며칠째 이비는, 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선착장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나루터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시타는 나루터에 앉아 버렸다. 이비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출항하는 사람이 있어, 이비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선착장으로 나왔다.
이 날은 이비가 나루터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도로시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타티크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이비는 시타가 나루터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출항하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이비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팔라라의 빛이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팔라라가 날아왔다.
시타는 저도 모르게 슬립대시를 썼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이비가 막 달린다. 로체스트 가는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
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이비가 나타나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이비는 나타나
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이비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
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이비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이비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시타는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이비가 던진 팔라라를 내려 다보
았다. 빛이 걷혀 있었다. 시타는 팔라라를 집어 마을보관함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선착장으로 나왔다. 이비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이비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시타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
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퀵슬롯 속 팔라라를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시타는 전에 이비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나루터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시타는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
다. 이비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시타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프트키를 헛디뎠다. 스태미너가 떨어졌다. 더 달렸다.
몸을 가릴 데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신전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시타는 한 손으로 포션을 마시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
오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었다.
선착장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이비가 건너편 얼계행 선착장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이비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
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물고기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이비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이비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이그나흐 붕어."
"이름도 참 곱다."
로체스트 가는길에 왔다. 여기서 이비는 아래편으로 한 삼 마장쯤, 시타는 우대로 한 십 리 가까운 길을 가야 한다.
이비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로체스트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맵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 봬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로체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이비의 눈이 금새 '바보,바보,'할 것
만 같았다.
로체스트 가는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헤레타가 서 있었다. 시타가 목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여관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재밌다!"
이비가 헤레타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헤레타가 자꾸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저만큼 양이 또 서 있다. 이비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시타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여관
으로 돌아가 티이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비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시타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에더크로스, 저놈의 에더크로스, 저놈의 에더크로스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다보니, 이비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양을 흔들고 있다. 좀 전 헤레타보다 더 우쭐거린다.
맵이 끝난 곳에 종탑이 하나 있었다. 이비가 먼저 뛰어갔다.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에르그항아리."
"여기 에르그, 맛있니?"
"그럼, 생명 맛도 좋지만 영원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시타가 들어가, 에르그항아리를 뽑아 왔다. 아직 뚜껑이 덜 들려 있었다. 뚜껑
을 비틀어 팽개친 후, 이비에게 한 개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이비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시타가 더 멀리 팽개쳐 버렸다.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이비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시타가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이비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풀 꽃."
이비는 풀 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떠올리며.
다시 시타는 꽃 한 옴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이비에게 건넨다.
그러나 이비는
"하나도 버리지 마라."
산마루께로 올라갔다.
맞은편 골짜기에 오순도순 초가집이 몇 모여 있었다.
누가 말할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꽃이지?"
적잖이 비탈진 곳에 칡덩굴이 엉키어 꽃을 달고 있었다.
"꼭 등꽃 같네. 로체 우리 집 근처에 큰 분수대가 있었단다. 저 꽃 을 보니까 분수대 옆에서 놀 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이비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줄기를 잡고 끊기 시작한다. 좀처럼 끊
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칡덩굴을 그러쥐었다.
시타가 놀라 달려갔다. 이비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며, 시타는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이비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시타는 저도 모르게 생채기 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일어나 저 쪽으로 달려간다.
좀 만에 숨이 차 돌아온 시타는
"이걸 바르면 낫는다."
큐미를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고는 그 달음으로 칡덩굴 있는 데로 내려가, 꽃 많이 달린 몇 줄기를
이빨로 끊어 가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시타가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이비의 흰 얼굴이, 분홍 도로시가, 리블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이비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로체스트 경비병(警備兵)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
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경비병은 이비 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 내면서, "어서들 집
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
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종탑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종탑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 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이비를 들어서게 했다.
이비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거리의화가를 벗어 이비의 어깨를 싸 주었다. 이비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시타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안고 온 꽃묶음 속에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 밑에 버린다. 이비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더 거기서 비를 그을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시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물체 속을 비집어 보
더니, 옆의 물체를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 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물체더미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 됐다. 앞에 나앉은 시타는 그냥 비를 맞아 야만
했다. 그런 시타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이비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이비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이비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다. 그러나, 이비는 상관없
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시타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
어 시타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멀개졌다.
물체더미 속을 벗어 나왔다. 멀지 않은 앞쪽에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붓고 있었다. 선착장 있는 곳까지와 보
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시타가 등을 돌려 댔다. 이비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시타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이비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시타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그 뒤로 이비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매일같이 선착장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용병단에서 쉬는 시간에 콜헨을 살피기도 했다. 남 몰래 여관 방 안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뵈지
않았다.
그날도 시타는 퀵슬롯 속 팔라라만 만지작거리며 선착장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 쪽 나루터에 이비
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시타는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어쩐지 이비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소나기 맞은 탓 아냐?"
이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제 다 났냐?"
"아직도……."
"그럼, 누워 있어야지."
"하도 갑갑해서 나왔다. ……참, 그 날 재밌었어……. 그런데 그 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이비가 분홍 도로시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이비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그래 이게 무슨 물 같니?"
시타는 도로시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 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 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시타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갈림길에서 이비는
"저,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서 얼음딸기주를 만들었다. 낼 제사 지내려고 ……." 얼음딸기주 한 병을 내준다. 시타는 주
춤한다.
"맛봐라. 우리 리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데, 아주 달다." 시타는 두 손을 오그려 내밀며, "참, 병도
굵다!"
"그리고 저, 우리 이번에 제사 지내고 나서 좀 있다. 집을 내주게 됐다." 시타는 이비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클로다(Clodagh)가 로체스트 서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
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염색샵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
이었다.
"왜 그런지 난 이사 가는 게 싫어졌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에 없이, 이비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이비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시타는 혼잣속으로, 이비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시타는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얼음딸기주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이 날 밤, 시타는 몰래 퍼거스 할아버지네 대장간으로 갔다.
낯에 봐 두었던 금고로 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자물쇠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자물쇠 떨어지
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강화쿠폰아 많이 떨어 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마을보관함을 어루만졌다. 퍼거스의 강화상자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
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 가는 이 퍼거스 할아버지네 강화쿠폰을 어서 이비에게 맛보여야 한 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비더러 병이 좀 낫거들랑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선착장으로 나와 달
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것, 바보 같은것.
이튿날, 시타가 용병단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닭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도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안고 있는 닭의 무게를 겨냥해 보면서, "이만하면 될까?"
어머니가 망태기를 내주며, "벌써 며칠째 '걀걀'하고 알 날 자리를 보던데요. 크진 않아도 살은 쪘을 거
여요." 시타가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잡화점 클로다 댁에 가신다. 제삿상에라도 놓으시라고… …." "그럼, 큰 놈으로 하나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이 말에, 아버지는 허허 웃고 나서, "임마, 그래도 이게 실속이 있다."
시타는 공연히 열적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용병단 마굿간으로가, 쇠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체.
이그나흐 강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잡화점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이비네가 오르텔성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염색샵을 보
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시타는 저도 모르게 퀵슬롯 속 팔라라를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시타는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이비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가
면 이비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클로다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골드를 다 팔아 버리고, 대
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재봉감
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포션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클로다네도 대
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 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여신의 가호를 꼭 써달라고……."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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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점점 이상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