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글이 좀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뭐, 제가 원래 길이 조절 잘 못하는 설명충이지만...
다들 잘 아시겠지만 연대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대격변했습니다. 묘사가 부족했던 세계의 기원등이 주요 변경의 대상이었는데,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건 비전마법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구설정에서는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의 중심에 비전 마법이 있었는데, 새로운 설정에서는 빛과 공허의 대결 구도에 자리를 내주고 약간 외곽에 떨어진 듯한 모습입니다.
워크래프트의 세계를 이루는 여섯가지 힘들의 도표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연대기 1권에서 발췌
물론 대다수의 설정덕후들은 새로운 설정을 매우 반기는 추세입니다. 왜냐면 이제야, 그나마, 비로소 세계관 비스무리한 게 제대로 정립이 되었으니까요. 워크래프트 사가는 그 영향력이 무색할 정도로 체계적이지 못한 설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계 4대 덕후 집단이라고 하는 톨키니스트, 셜로키언, 후비안, 트레키들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각 작품들이 얼마나 정교한 설정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구설정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을 버리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비전 마법 관련 설정도 그 중 하나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설정의 마법 설정은 의외로 체계적이었습니다.
구설정에서의 비전 마법의 위상을 살펴보죠.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 세계의 개념에 비유해서, 워크래프트 사가의 마법을 현실 세계의 과학과 대응시켜봅시다.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실제로 현실 세계의 대부분의 과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죠.
* 과학이 왜 마법 같은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여러분의 스마트폰에 백과사전 몇백, 몇천 권 분량의 정보를 넣고도 남는지를 한번 설명해보시면 될 겁니다. 비전공자를 제외한 이들에게 현대 과학은 마법과도 같죠.
극도로 발달한 현대 과학에서, 같은 과학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상호간의 분야가 대체 뭘 다루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응용 과학들은 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물론 기초적인 내용이야 알겠지만, 토목공학 관련 응용과학자에게 생물학계의 최근 연구 동향을 물어봐야 물음표만 돌아올 뿐이죠. 뭐, 현대의 학문이 다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이러한 현대 과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절대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수학이죠. 비록 저마다 다른 내용을 다룰지언정, 결국 '수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워크래프트 사가에서 비전 마법은 바로 현대 과학에서의 수학과 비슷했습니다. 농담삼아 좀 더 비유를 해보면 마법사 수습생은 이과생이고 비전 마법사는 이과생이 취직은 포기하고 수학의 금단에 매력에만 몰입하여 탄생한 수학자, 화염 마법사는 핵융합 연구원, 강령술사는 생물학 전공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뭐 이렇게요.
"밀레니엄 문제를 증명하고 우주와 교감하며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수학자" - 마법학자 티브라나 와우 TCG에서 발췌
현실에서 수학을 공부하지 않고 응용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워크래프트 사가에서도 비전 마법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빛의 힘을 제외한 그 어떤 초자연적인-마법적인 행위들도 불가능했습니다. 지옥 마법이든, 강령술이든, 드루이디즘이든 말이죠. 그 당시에 비전 마법은 현실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현실과는 달리 마나라는 물질이 자연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를 다루는게 비전 마법이었고 마법적인 행위는 바로 이 마나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나가 물이라면 비전은 증기압이라는 데이브 코삭의 트위터 발언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마 초자연적인 행위에 나름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추정해봅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불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허공에 펑하고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지요. 비전 관련 설정은 후자를 가능케 하는 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설정을 배경으로, 비전 에너지는 초자연적인 에너지 및 현상의 대표로 워크래프트 사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활약해왔습니다. 트롤이 나에리로 진화한 것도 영원의 샘의 비전 마력으로 인한 것이었고 비전 마력은 우왕굳이지만 동시에 어마무지한 중독성을 갖고 있었기에 아제로스에 온갖 분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블덕들은 태양샘을 잃어버리자 종족 절멸의 위기까지 갔었죠. 수학에 극도로 통달하여 우주의 진리를 깨친 에이그윈 아줌마는 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비전 마력의 힘으로 몇백년간 젊음을 유지해왔습니다. 메디브도 되살리고 말이죠.
그리고 연대기에서 이 설정이 뒤바뀌었습니다. 블리자드 스토리팀이 무엇을 노리고 바꾸었는가에 대한 제 추측은 뒷쪽으로 미루고, 간단하게 바뀐 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전히 물리 우주를 다루는 힘이긴 하지만, 더이상 모든 초자연적인 힘의 근원은 아닙니다. 강령술로 대표되는 죽음의 힘과 드루이디즘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힘이 떨어져 나갔으며, 비전 마법의 하위 갈래였던 지옥 에너지는 이제 비전 에너지의 대극점에서 비전 에너지와 함께 물리 우주의 우주적 법칙을 관장합니다. 원탑 체제에서 몇 개 중요한 거 떼고, 자기 밑이었던 애랑 자기 분야를 양분하여 관리하게 된거죠.
2. 비전 마법은 구축을, 지옥 마법은 파괴를 담당합니다.
3. 기존에 비전 마법이 갖고 있던 부정적인 면모인 중독성 등이 전부 지옥 마법으로 옮겨 갔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전 마법이 왜 중독성을 갖는지, 비전 마법이 왜 시전자를 타락시키는지'를 설명하는게 굉장히 애매해졌습니다. 실제로 와우 세계에서도 비전 마력 때문에 골골 대는 건 그 수많은 비전 마법 사용자들 중 요정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구설정과 신설정 각각이 갖는 장점은 어떻게 될까요? 이 부분은 당연히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제가 이 주제로 와우저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설문조사를 시행한 것도 아니라 표본은 1이라서 설득력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설정
1. 전술했듯이 의외로 체계적이며 현실적입니다. 물론 이 표현은 당연히 상대적입니다. 마법 뿅뿅 날리는게 현실적이냐는 비판은 사양하겠습니다.
2. 비전마법 킹왕짱! 하듯이 스토리를 전개시키기 편합니다. 이것도 아케인, 그것도 아케인...
그것도 아케인이란다. 호호호. - 디시콘(출처 불확실)
신설정
1. 직관적입니다. 빛과 공허, 생명과 죽음, 질서와 무질서로 세계를 구분지어 보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2. 빛과 공허의 대립각에서 비전 마법을 곁다리로 치우는데 성공했습니다. 농담으로 들리시겠지만 진담입니다. 살게라스 이후 새로운 악당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빛과 공허의 대립을 와우 세계관의 최종 목표로 삼았지만, 연대기 이전까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활약해왔던 비전의 힘은 당연히 방해가 되었을게 뻔하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어떤 설정이 더 좋은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개인차가 당연히 있겠지만, 흔히 좋은 설정의 객관적인 기준은 '의도 전달에 부합하느냐'인데요, 크리스 멧젠이 연대기에서 밝힌 와우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집단은 서로의 공통된 인성을 발견하기 전까지 얼마나 자주 충돌하는가?
2. 선한 의도와 열정을 지닌 영웅이 어떻게 권력의 유혹에 굴복할수 있는가?
3. 과거의 실수에 책임지지 않는 행동이 어떻게 현재의 파국을 불러오는가?
이 주제에 어울리는 설정이 체계적인 구설정일지, 직관적인 신설정일지는 설정 자체만 두고는 평가할 수가 없겠죠.
다만 여러분의 각자의 해석에 보탬이 되어드리고자 첨언을 한다면, 마법의 설정이 반드시 체계적일 필요도, 반드시 직관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전자의 예로는 이영도의 '새 시리즈', 후자의 예로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가 있죠.
이영도의 새 시리즈에는 매력적인 네 종족이 나옵니다.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숙원을 추구하는 레콘, 불을 다루는 도깨비, 왕을 찾아 헤매는 인간. 그 중 도깨비는 수십만의 생명을 순식간에 몰살 시킬 정도의 불을 자유롭게 다루며 화염 이뮨이죠. 하지만 작품 내외적으로 아무도 도깨비가 어떻게 불을 다루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단지 신에게서 받았을 것이라는 등장인물들의 추측과 '저런 행패를 부릴 수 있는 놈들 중에서 실제로 시도하는 녀석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뿐이죠. 왜냐면 얘가 불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는 주제와도 그렇고, 스토리 전개와도 크게 상관없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시면 명작이니 한 번 보고 오세요.
눈물을 마시는 새의 도깨비 팬아트 - 사진 출처가 일베로 되어 있는데 저는 일베충이 아닙니다(답글로 '한줄 요약: 작성자 일베충'이라고 달릴 것 같은데...)
* 선인장 파괴공작소(http://blog.naver.com/mhch5005/70037807347)의 '눈물을 마시는 새 4컷만화' 10
이와는 반대로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연금술의 설정은 굉장히 치밀합니다. 여기에서 불을 다루는 연금술사인 로이 머스탱은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설명을 통해 불꽃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 덕지덕지 붙은 설정으로 인해 비가 와도 안되며, 비전(秘傳)의 연금술식 없이도 안되고, 뭐 이것저것 때문에 안됩니다. 이러한 설정상의 제약은 극적이고 서스펜스적인 이야기 전개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도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시대의 명작이니 보고 오시면 됩니당.
"대령님은 비오는 날에는 무능하니까 빠져주세요." - 강철의 연금술사 BROTHERHOOD 中
일단 연대기가 발간되고 나서 이제 겨우 확장팩 하나 나왔으니만큼 섣부른 판단은 자제하고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공허의 세력을 등장시킨 것과 세계의 기원 관련 설정 변경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