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전
(독일의 대 유태인 정책)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든 그른 판단이었든 간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독일은 유태인들이 비단 독일 문화에 퇴폐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들은 애국심이 없으며 탐욕스런 존재들인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특히 지난 바이마르 시대[Weimar period] 이후로 유태인들은 전체 국민의 채 5%밖에 되지 않았지만 독일 법조계, 금융계, 그리고 언론계에서 놀랄만한 힘과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들은 죄다 차지하고 있었기에 국가적 건전성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가 바로 유태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1870-1919, 막시스트 혁명가)나 칼 리베크네히트[Karl Liebeknecht](1871-1919, 사회주의자, 독일공산당 창립자)와 같은 독일 내 혁명 운동의 지도자들도 역시 유태인들로서, 국민 구성 비율에 맞지 않을 정도로 대표되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은 나치즘에다 강력한 국제주의적 색채를 더하려고 했고,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유태 민족 자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양상을 불어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정작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태인들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옳았느냐 옳지 않았느냐 하는 것도, 혹은 유태인들의 이익에 반하는 각종 독일내 입법 조치들이 정당했느냐 정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단순히 유태인들의 행태에 직면하여 나치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것은 다양한 입법활동을 통하여 독일 국가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치 중의 하나는 바로 유태인들 모두를 독일 영토 밖으로 이주시켜 보내는 일을 권장했다는 것입니다. 1939년까지 다수의 독일계 유태인들이 독일을 떠났고, 그들 모두는 상당량의 자산을 함께 가지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치의 지도부들이 그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genocide]과 같은 일을 고안해 냈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이주[Emigration]’를 ‘제거[Extermination]’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태인들은 이 같은 독일의 국내적 차별 정책을 ‘제거’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대단히 우려할만한 시각이었습니다. 1936년 레온 포이히트방거[Leon Feuchtwanger]와 다른 몇몇이 함께 출간한 반-독일 선전용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 : “노란 얼룩 : 500,000명의 독일계 유태인들의 제거[Der Gelbe Fleck : Die Ausrotung von 500,000 deutschen Juden (The Yellow Spot: The Extermination of 500,000 German Jews, Paris, 1936)]”이 붙여진 적이 있고, 이는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었으나 그 첫 페이지에서부터 ‘유태인들의 절멸[the annihilation of the Jews]’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이주’ 자체를 독일계 유태인들의 물리적인 “제거”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정치범들을 위한 수용소도 잠재적인 대량학살을 위한 도구로 여겨졌으며, 특히1936년 다하우[Dachau] 수용소에 있던 100명의 유태인들, 그 중 60명은 1933년부터 감금되어 오기도 했던 이들 유태인들이 집중 조명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독일계 유태인 공산주의자였던 한스 바이믈러[Hans Beimler]가 쓴 선정적인 책으로 ‘히틀러의 지옥의 사냥개들에게 포위된 채 보낸 4주 : 다하우의 나치 살인 캠프 [Four Weeks in the hands of Hitler’s hell-Hounds : The Nazi Murder Camp of Dachau]’라는 제목으로 1933년 초 뉴욕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다하우가 죽음의 수용소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막시스트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던 그는 자기 자신의 동의 아래 그 곳에 수용되었었고, 또 불과 한 달만 머물다가 이내 풀려났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동독 정부는 공산주의 활동을 한 공로자들에게 한스 바이믈러 상[Hans Beimler Award]을 수여해 왔던 것입니다.
요컨대 반나치 대량학살 선전물들은 그러한 주장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이 같은 초기부터 인종적, 정치적 편견을 가진 자들에 의해 유포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은 독립적인 시각을 가진 관찰자들이 전시에 발생한 일들이라 주장되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될 때면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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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기록 #2 하톤
1991년 11월 11일 월요일, 12:28 P.M. 5년 08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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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통계와 이주
유태인 인구와 관련된 통계자료들은 어디에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넓게 분포된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추정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이고, 특히 1939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확히 몇 명의 유태인들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몇 명의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감금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주’와 관련해서는 신뢰할만한 통계자료들이 남아 있고 바로 이를 통해서 보더라도 결코 6백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전쟁 기간 동안 제거되었을 수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입증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수를 한 번이라도 검토해 보게 되면 6백만 명의 학살이란 지지될 수 없는 주장임이 드러납니다. 체임버스 백과사전[CHAMBERS ENCYCLOPEDIA]에 따르면 전쟁 이전 유럽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총 수는 6,500,000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그렇다면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 거의 모두가 다 학살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중립국 스위스의 간행물이었던 ‘바젤러 나흐리히텐[Baseler Nachrichten]’이 유태인 관련 통계자료를 인용하여 밝혀낸 바에 따르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1,500,000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영국,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호주, 중국, 인도, 팔레스타인, 미국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태계 저널리스트였던 브루노 블라우[Bruno Blau]가 뉴욕의 유태인들의 잡지였던 ‘아우프바우[Aufbau]’지, 1948년 8월 13일자에서 동일한 숫자를 인용함을 통해 재확인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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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처럼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 있었던 유태인들의 엑소더스[exodus]는 유럽지역에 머물던 유태인들의 숫자를 약 5백만 명으로 줄이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1939년 이후 소련으로 달아나서 독일의 침략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 너머로 철수했던 유태인들의 숫자도 더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 중 대부분은 폴란드로부터 이주해 온 1,250,000명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라이트링거[Reitlinger]는 폴란드를 제외하고도 다른 유럽 지역의 유태인 약 300,000명이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소련 영토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련으로 간 유태인들의 총 수는 1,550,000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1945년 6월 9일자 ‘콜리에르[Colliers]’지에서 프라일링 포스터[Freiling Foster]는 러시아로 간 유태인들에 대한 기사에서 “1939년 이후로, 2,200,000명의 유태인들이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낮은 수치의 자료들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소련으로 간 유태인들까지 다 고려해 볼 때, 독일 점령지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의 수는 약350만 명, 보다 정확하게는 약 3,450,000명 정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또 유럽 내 중립국가들에 거주하고 있어서 전쟁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유태인들의 수는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1942년도 세계 연감[WORLD ALMANAC] 594페이지에 따르면 지브롤터,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터키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의 수는 413,128명이었습니다.
pp.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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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6백만 명’이라는 숫자는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코 독일이 그들의 통제 아래 두었다가 제거했다고 주장되는 유태인들의 수는 6백만 명이나 될 수가 없습니다. 소련 지역을 제외하고 이주의 물결이 있었던 이후, 나치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의 수는 겨우 3백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며, 또한 결코 이들 모두가 수용소에 수용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당시 유럽에 살던 이 3백만 명의 유태인들만큼은 모두가 다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유태인들은 1945년 이후에도 유럽에 살아남아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필립 프리드만[Philip Friedmann]은 자신의 책, ‘그들의 형제들의 간수들[THEIR BROTHER’S KEEPERS]’(뉴욕, 1957년. p.13.)에서 “최소한 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나치 지옥의 혹독함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고 쓰고 있고, 다른 한편, 유태 연합 분포 위원회[the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의 공식적인 수치에 따르자면 그 수는 1,559,600명이었습니다. 그럼 이 두 번째 수치를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전쟁 중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는 많아 봐야 150만 명을 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결론은 바로 중립국 스위스의 저명한 잡지 ‘바젤러 나흐리히텐[BASELER NACHRICHTEN]’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는 몇 명이나 되는가?[Wie hoch ist die Zahl der judischen Opfer?]”(“How high is the number of Jewish victims?”, 1946년 6월 30일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잡지는 상기 언급된 이주와 이민 통계 자료에 바탕하여 그 최대치라고 해도 약 15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수는 실상 훨씬 더 낮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냐하면 ‘바젤러 나흐리히텐’은 유태 연합 분포 위원회가 전후 생존자 수로 제시한, 1,559,600명을 받아들였기에 그런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지만, 당신들도 곧 보게 되겠거나와, 전후 보상을 요구한 유태인 생존자들의 수는 바로 그 수의 두 배가 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후자의 정보는 1946년 스위스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p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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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기록 #1 하톤
1991년 11월 12일 화요일, 11:58 A.M. 5년 08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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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출생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는 전후 세계 유태인 인구 통계 자료로부터도 도출될 수 있습니다. 1938년도 세계 연감[The World Almanac]에 나와 있는 전 세계 유태인들의 수는 16,588,25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지난 후인 1948년 2월 22일자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지에 따르면, 전 세계 유태인들의 수는 최소 15,600,000명에서 최대 18,70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러한 숫자들만 놓고 보자면 전쟁 기간 동안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가 경우에 따라서는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에, 분명코 6백만 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1938년도에 1,600여만 명에 이르던 유태인들 수에서 6백만 명을 빼고 나면 천만 명이 남습니다. : 그런데 뉴욕 타임즈지가 보도한 숫자가 맞다면 불과 10년 동안 약 7백만 명의 신생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동안 유태인들의 수는 거의 두 배로 불어났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정말이지 허무맹랑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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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과장들
지금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이유로 독일을 상대로 그 첫 번째 비난의 화살을 던진 사람은 폴란드계 유태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으로, 이러한 내용을 다룬 그의 책 ‘유럽 점령지에서 동맹국들의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는 1943년 뉴욕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점에 렘킨은 이후 “인종차별주의[racialism]”를 금지하는 U.N. 제노사이드 협약[U.N. Genocide Convention]을 기안했습니다. 자신의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치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수는 어쩌면 6백만 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책이 출간된 1943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학살 행위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은 단지1942년 여름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비율로 학살이 계속되었더라면 1945년까지는 전세계에 있는 모든 유태인들을 다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이후 그러한 과장은 점점 더 심해져서 놀라운 수치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반-나치주의자이자 한 때 자신이 독일 비밀 경찰 조직[the S.S.] 안에 몰래 잠입해 들어 갔었노라고 주장하던 커트 거슈타인[Kurt Gerstein]이라는 자는 레이몽 까르띠에[Raymond Cartier]라는 프랑스 심문관에게 말하기를, 4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4천만 명이라는 숫자를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들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1945년4월 26일, 자신이 첫 번째로 내놓은 비망록에서 그는 이 수치를 2천 5백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가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들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았기에, 1945년 5월 4일, 로트바일[Rottweil]에서 출간한 자신의 두 번째 비망록에서는 다시 6백만 명 정도로 하향 조정했고,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Nuremberg Trials]에서도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거슈타인의 누이는 선천성 정신 이상을 앓았고 안락사로 사망했는데, 이는 거슈타인 자신에게도 어쩌면 정신 이상 증세가 발병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갖게 해 줍니다. 하지만 이는 물론 순수한 추정에 불과할 뿐입니다.--어쩌면 그가 단지 숫자를 잘 셀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는 1936년에는 우체국에 이상한 우편물을 보낸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위의 두 번의 “자백”을 한 후, 파리의 ‘셰르셔 미디 프리종[Cherche Midi Prison]’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그렇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계속 살아 남았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에 따르자면 전쟁 중에 그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정보를 한 독일 남작을 통해 스웨덴 정부에 알렸지만, 몇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원인들로 인해 자신의 보고서가 “날아가고 잊혀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1942년 8월 베를린에 온 교황 사절단[the Papal nuncio]에게 이 “학살 프로그램”의 전모를 알렸지만 당시 참석해 있던 성직자로부터 들은 말이란 오직 “나가시오”라는 대답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들 가운데는 엄청난 규모의 대량 학살(벨제크[Belzec]에서 하루에 만 2천명을 죽였다는 이야기 등)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이야기들로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두 번째 비망록에서 서술한 내용의 일부이기도 한 1942년 6월 6일 히틀러가 폴란드에 있는 한 강제 수용소에 직접 방문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도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미국에서 선거가 임박한 10월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전하는 놀라운 뉴스를 가리키는 말)”의 일종인가요!?
거슈타인의 이 환상적인 과장들이 미친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들은 대량 학살에 관한 주장들을 불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베를린의 복음주의 주교[Evangelical Bishop]였던 빌헬름 디벨리우스[Wilhelm Dibelius]는 그의 비망록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폄하했습니다. (H. 로트펠스[H. Rothfels],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목격자 보고[Augenszeugenbericht zu den Massenvergasungen]”, “현대사 계간[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hichte]”, 1955년 4월호.) 다만 거슈타인이 “목격자들 가운데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의미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폄하에도 불구하고 1955년 독일 정부는 거슈타인의 두 번째 비망록을 독일의 각급 학교에 배포하였습니다.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문서[Dokumentation zur Masenvergassung], 본[Bonn], 1955). 그리고 이 배포 자료상에는 디벨리우스[Dibelius]가 특히 이에 대한 신뢰를 표했다는 언급과 함께 비망록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치의 대량 학살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이 독일에서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특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료로 채택된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전쟁 중 6백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 학살의 이야기가 최종적인 신뢰성을 얻게 된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중 빌헬름 홰틀 박사[Dr. Wilhelm Hoettl]의 진술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아이히만[Eichmann]의 조수로서 일했지만, 실상은 미국 정보 기관을 위해 일했던 수상한 인물이었으며, 발터 하겐[Walter Hagen]이라는 가명으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홰틀은 또한 동시에 소련의 첩자로도 활동했으며, 페르거[Perger]와 페르버[Verber]라는 비엔나 출신의 두 명의 유태인 이주자들과도 공모관계에 있었습니다. 한편 이 둘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예비 심문 과정에서 미군 장교들로 활동했습니다. 이 지극히도 정체가 모호한 인물이었던 홰틀이라는 자의 증언이 6백만 유태인 학살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1945년 11월 26일에 한 진술에 따르면 자기가 알고 있던 사항은 아니었지만, 1944년 8월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도합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아이히만은 자신의 재판에서 이러한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홰틀은 전쟁 후반부 전기간에 걸쳐서 미국의 첩자로 활동했었기에, 그가 하이드리히[Heydrich]와 아이히만[Eichmann]의 직속에 있었으면서도 애초에 유태인 학살 정책에 대해서 미국인들에게 최소한의 힌트조차 준 적이 없었다는 점 역시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증거 부재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고의로 학살하려고 의도했다거나, 혹은 이를 수행했다는 것을 입증해 줄만한 단 한 건의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폴리아코프[Poliakov]와 불프[Wulf]가 쓴 ‘제 3제국과 유태인 : 문서와 서류들[Das Dritte Reich und die Juden : Dokumente und Aufsatze]’이라는 책(베를린, 1955년)에서 그들이 수집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은 전쟁 후 홰틀[Hoettl]이나 올렌도르프[Ohlendorf] 그리고 비슬리세니[Wisliceny]와 같은 인물들의 진술로부터 얻어진 것으로, 특히 비슬리세니가 한 진술의 경우는 소련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떠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폴리아코프는 다음과 같이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유태인들의 완전한 제거를 계획하는 데 참여했던 서너 명의 주요인물들은 모두 사망했기에 어떠한 문서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는 아주 손쉬운 합리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코 ‘계획’이라는 것도, “서너 명”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모두 저자의 막연한 가정에 불과한 것들이고 그 어느 것도 입증될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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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벨[Manvell]과 프랑클[Frankl](‘하인리히 힘믈러[HEINRICH HIMMLER]’, 런던, 1965년)에 따르면 대량 학살 정책은 히틀러[Hitler]와 힘믈러[Himmler] 사이의 “비밀 논의[secret discussions]” 끝에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seems to have been arrived at]”고 합니다. 비록 그들이 이를 입증하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링거[Reitlinger]와 폴리아코프[Poliakov]는 이를 토대로 유사한 “구두[verbal]” 명령 라인[lines]만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며, 그 때문에 어떠한 기록도 남겨질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창작으로서, 심지어 히틀러와 힘믈러 간의 그 같은 기이한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만한 증거조차 단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윌리엄 쉬어러[William Shirer]는 대단히 개괄적이고도 무책임한 서술로 일관한 자신의 책, ‘제 3제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에서 역시나 마찬가지로 문서화된 증거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 버립니다.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이 언급할 따름입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명령은 결코 문서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최소한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사본 조차도 지금껏 발견된 적이 없다. 이 명령은 아마도 구두로 괴링[Goering], 힘믈러[Himmler], 그리고 하이드리히[Heydrich]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명령체계를 따라 아래로 하달되었던 것이다...”(p. 1148)
pp.106-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