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의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가 진행되고 있는 독일 쾰른에서는, 블루버 팀(Bloober Team)의 시니어 레벨 디자이너 안나 오포르스카-시비스(Anna Oporska-Szybisz, 이하 '안나')의 미궁 레벨 디자인 비화를 들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작에서 가장 덜 좋아했던(?) 스테이지인 '미궁' 리메이크를 담당하며 마주했던 순간을 사례로, 수많은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기존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데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 5가지 단계를 설명했다.

1. 스토리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강연 서두를 통해, 안나는 이번 리메이크가 단순한 그래픽과 컷신 개선을 넘어선 작업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작과 우리 제품 사이에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비디오 게임이 발전하면서 게이머들도 크게 변화했고, 그 결과 우리의 새로운 버전은 새로운 표준에 맞는 정확한 적응이 필요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원작에 대한 충실함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는 원작에 충실해야 했고, 평생 팬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강연자는 먼저, 리메이크 작품에 접근할 때 원작 스토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레벨 디자이너의 경우 대부분 스토리의 표면만을 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일런트 힐 2의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독특했다.

사일런트 힐2는 주인공인 제임스만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주된 게임플레이 장소이자, 동시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공간이다. 안나는 "제임스가 보는 세계는 오로지 그의 마음을 투영하는 공간이며,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는 일어났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반영한다. 각 단계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마음 깊이 감추어진 진실을 파헤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독창적인 세계를 리메이크하기 위해, 블루버 팀은 많은 시간을 투자해 모든 원작 플레이어들의 이론과 해석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목표는 원작 스토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어떤 잘못 해석된 스토리도 버리지 않는 것이었으며, 플레이어들이 20여년 간 인터넷에서 나눠온 분석들을 연구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최선의 방법으로 리메이크 작품에 녹여내고자 했다.
2. 강점과 약점 파악하기
이번 강연의 주제이기도 한 '미궁' 스테이지는 게임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게임 후반부에 등장하는 매우 거대한 레벨이기도 하다. 좁게 이어지는 복도는 거의 모든 공간이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길을 잃기 쉬웠고, 또 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전체 지도를 먼저 볼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 제임스를 조작해 미궁을 헤맬 때마다, 제임스가 지도를 만들어나간다. 때문에 미궁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레이아웃을 익히기 전까지는 레벨을 빠르게 돌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강연자는 "원작의 모든 것을 좋아했지만, 그나마 가장 덜 좋아했던 것이 바로 이 '미궁'"이었다고 전하는 한 편, 해당 레벨을 현대화 하는 과정에서 미궁을 특별하게 하는 요소들은 그대로 남겨놓기를 희망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큰 미로였던 레벨을 세 개의 분리된 경로로 재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구성된 미궁은 각 경로가 제임스의 심리적 여정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서로 다른 테마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과 메커니즘을 도입해 구분감을 줌과 동시에, 플레이어가 너무나 큰 미로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나뉘게 된 세 개의 미궁은 각각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도록 완성됐다. 슬픔을 표현하는 공간은 아내인 메리가 병상에 있었을 때 제임스가 느낀 감정, 그리고 병마가 서서히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 몸을 앗아갈 때의 감정을 다룬다.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차가운 색조나 금속성 질감, 얕은 물을 사용했다. 게임 메커니즘상으로는 미궁을 이곳저곳 탐색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분노 테마로 이뤄진 공간에서는 플레이어가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일 수 있도록, 붉은 색상의 공간에 파괴된 오브젝트를 배치해 '폐허'라는 느낌이 두각되도록 했다. 게임플레이 메커니즘 상으로는 전투 또는 회피에 초점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제임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해방할 것인지, 또는 인내심을 발휘할 것인지를 플레이어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블루버 팀은 원작의 약점이었던 '거대하고, 모든 통로가 비슷해 보이는 레벨디자인'은 위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가 실시간으로 지도를 그려가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 플레이어의 경험은 어떤 식으로 개선해야 했을까?
강연자는 비록 미궁이 가진 '실시간 지도 제작'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혼란을 초래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미궁' 스테이지가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원작과 마찬가지로 제임스가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플레이어의 혼란을 줄이기 위한 장치는 필요했다.
그녀는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기 위해 크레타의 미궁을 탐험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유명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테세우스가 실을 이용해 출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플레이어에게 미궁 내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요소를 넣어두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세 개로 나눈 공간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적용됐다.

3. 덜어내는 것이 더하는 것일까?
리메이크 작업을 맡았을 때, 많은 개발자들은 게임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원작에 있었던 여러 요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쉽사리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강연자는 리메이크의 핵심은 "발전과 원작의 감성을 유지하는 그 중간을 찾는 것"이라며 팬들의 기억에 더욱 남을 수 있게 미궁을 리메이크한 사례를 소개했다.
그중 한 가지는 원작에서 제임스가 안젤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공간으로, 초기 디자인 당시 해당 공간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로같은 통로로 플레이어에게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던 안나는 대상에게 향해 쉽게 갈 수 있는 두 개의 통로를 새롭게 추가하는 한 편, 더욱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고자 했다. 특정 문을 지날 때마다 들려오는 속삭임은 원작에서 크게 조명되지 않은 안젤라의 과거와 고통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며, 이런 방식으로도 세계관의 디테일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물론, 플레이어의 경험이 달린 일이라면 과감한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게임에 등장하는 다양한 퍼즐들이 바로 그 사례다. 안나는 "플레이어 10명 중 3명만이 너무 복잡하다고 해도 더욱 쉽게 만드려고 노력했다"며, 플레이어들이 퍼즐을 풀기 위해 생각하는 과정을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압도당하게 하는 것만은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연에서 나온 퍼즐의 사례는 정육면체 상자 모형을 이리 저리 굴려가며 통로를 찾게 되는 퍼즐로,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퍼즐 오브젝트를 움직일 때마다 달라지는 효과를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거대한 상자 모양 구조물을 추가했다. 플레이어들이 메커니즘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여러 상징적인 문양을 추가해 직관성 또한 높였다.
4. 적을 디자인 할때는 레벨 공간 설계도 중요하다
다음으로 강연자는 원작에서는 그 비중이 극히 적었던 일부 적 크리쳐를 재설계해야 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만다린'이라는 크리쳐는 거대한 모양의 손이 상징적인 크리쳐로,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플레이어의 주의를 손 부분에 집중시키려는 목표가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손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선명하고, 또 어두운 환경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또한 해당 크리쳐가 플레이어에게 압박감을 느끼도록 하는 공간 설계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5. 팬들을 위한, 추억 거리 잊지 말기
마지막으로 강연자는 원작을 추억하는 팬들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를 추가해 게임에 대해 세심한 고민을 했다는 흔적을 남겨두는 것도 좋다고 전했다.
원작에 있었던 행맨 퍼즐은 미궁 공간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퍼즐이었다. 하지만,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교수형대 퍼즐을 비롯한 일부 상징적인 공간들이 다른 레벨로 이동했는데, 교수대라는 콘셉트가 더욱 잘 어울린다는 이유로 해당 퍼즐은 감옥 레벨로 이동되었다.

그러나, 안나는 원작의 미궁에 있었던 요소를 '과거의 흔적'이라는 요소로 숨겨놓는 방법을 택했다. 미궁을 이곳저곳 탐사하다 보면, 당시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다.
다섯 번째 사례를 끝으로, 강연자는 "우리는 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알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게임 속에서 이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