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을 만드는 법

게임뉴스 | 정재훈 기자 | 댓글: 8개 |



"생각 없이 하기 좋아요"

칭찬이다. 일단 좋다는 말이 들어갔으니 칭찬인 것 같은데, 리뷰를 보는 순간 이 게임을 할까 말까 한 번쯤 고민해보게 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개발자 입장에서도, 저런 리뷰를 보는 순간 썩 기분이 좋진 않을 거다. 재미있는 점은, 최신 게임의 트렌드는 오히려 저 '생각 없이 해도 되는 게임'에 더 가깝다는 거다.

'생각을 요구하는 게임'이 트렌드인 시절도 분명 있었다. 어떻게든 메시지와 사상을 우겨넣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고,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넣어 스토리를 방치한 실타래마냥 꼬아놓은 경우도 있었으며, 인물의 깊이를 부여하려고 복잡한 배경 설정이나 이중적인 성격을 집어넣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메시지가 강해져 '강요'가 되고, 복잡한 스토리는 '귀찮은 요소'로, 깊이있는 캐릭터는 앞뒤가 맞지 않는 개연성 없는 인물이 되어버리면서 트렌드도 바뀌었다. 오늘날, 게임의 트렌드는 '순수재미주의'로 회귀했다. 게임을 통해 게이머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냥 재미만 있게 만들으면 된다는 거다.

그러나 그 말이 곧 '스토리 드리븐 게임의 몰락'을 뜻하진 않는다. 여전히 게이머를 생각하게 만들고, 깊이있는 서사를 보여주며, 게임이 끝난 후 진한 여운이 남는 게임들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오히려 재미를 해치는 경우가 많으니, 능력이 안 되면 재미라도 있게 만들라는 의미의 '순수재미주의'가 생겨난 것일 뿐, 여전히 비디오 게임의 정점은 재미있으면서도 게이머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이다.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굵직한 게임 개발에 참여해왔던 프리랜서 게임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파스칼 루반'이 '데브컴 2021'의 강연에서 꺼낸 주제가 바로 이 '게이머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이다. 그는 영화 'E.T'와 '레미제라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의 포스터를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 프리랜서 게임 디렉터, 디자이너 '파스칼 루반(Pascal Luban)'

"이 세 영화는 모두 재미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명작(Masterepiece)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말을 걸기 때문입니다."

'명작'으로 여겨지는 영화들은 그렇게 관객에게 말을 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당신이라면 하지 않을 것', '당신이 원하는 것', '당신의 내적인 욕구' 등등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관객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끔 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성격에 따라 다른 해석과 감상을 내놓으며, 이는 곧 논쟁적 소재가 되고, 논쟁적 소재는 관심의 중심이 되며, 관심은 곧 더 많은 관객들의 감상으로 이어진다. '명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 명작의 특징은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

동시에, 이러한 명작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모든 작품은 '세상을 어떻게 더 이롭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명작 영화들은 대부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어떻게 되면 안될 지를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이야기만을 전달하지 않고, 주제 의식에 대해 관객이 생각할 여지는 주는 식이다.

지금까지 등장한 게임 중에도, 게이머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은 많이 존재한다. 파스칼 루반은 먼저 '11비트 스튜디오'가 개발한 '디스 워 오브 마인'을 꼽았다. 게임을 플레이해본 게이머들이라면 알겠지만, 전쟁 중 봉쇄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은 굉장히 잔혹한 현실을 담고 있다.

영웅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악당을 쓸어담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이야기 따위는 없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주인공은 평범한 소시민이며, 폐허를 뒤져 생필품을 모으고 쥐를 잡아 하루를 겨우 연명하며, 때로는 의도치 않은 살인과 이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다. 게임은 '전쟁'을 배경으로만 삼지 않고, 게이머에게 '전쟁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서 게이머가 전쟁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만든다.



▲ 전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게이머에게 질문을 던지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서사와 감정 전달 구조를 요약하면 이렇다. 게임은 게이머로 하여금 극적인 순간에 중요한 선택을 하게 만들고, 게이머는 이를 통해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된다. 이 덕분에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굉장히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이 메시지는 곧 감정적인 경험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명작'으로 여겨지는 많은 게임들. GTA5나 레드 데드 리뎀션,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은 작품들은 모두 게이머에게 말을 건넨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 그리고 이 질문을 받는 게이머는 잘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게임 속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된 상태로 해당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명작을 만드는 열쇠는 결국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결국, 열쇠는 '감정'에 달려 있다.

파스칼 루반이 말했다. 그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반드시 상대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감정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라스트 오브 어스'의 주인공 조엘은 엘리의 목숨과 인류의 미래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이 씬은, 이미 게이머가 엘리와 조엘의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과 유대감에 푹 젖어 있을 때쯤 찾아오게 되고, 조엘의 선택을 곧 자신의 선택과 동일시하게 된다. 감정선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후속작인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는 게이머의 감정선이 정돈되지 않은 시점에 너무나 극적인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게이머는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게임의 주제 의식은 분노의 해소보다는 복수의 연쇄를 끊는 과정에 대해 말한다. 이렇듯, 메시지와 감정선의 괴리 때문에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는 게임의 수준 높은 완성도와 별개로 논쟁적 게임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게이머의 감정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게이머를 움직일 주제(Theme)인지를 파악하라
ㄴ 게임의 주제는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할 주제는 당연히 감정선을 움직일 수 없다.

2. 적절한 장르와 코어 게임플레이 시스템, 게임 모드와 BM을 정의하라.
ㄴ 주제를 정했다면, 주제에 걸맞는 게임 장르와 요소들을 정해야 한다.

3. 좋은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세 가지 핵심 요소를 작업하라
ㄴ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스크립트', '주인공', 그리고 '환경'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말들이지만, 저 항목들은 순서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게임의 주제를 정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들어지는 게임 중에는 게임의 주제보다는 장르가 먼저 결정되고, 이후에 그럴싸한 주제와 스토리를 덧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어 파스칼 루반은 마지막 스텝의 세 가지 요소인 '스크립트'와 '주인공', '환경'에 대해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스크립트'는 펼치지 않은 이야기이며, 쉽게 설명하면 게이머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이벤트를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액션 씬을 끝내주게 뽑았다고 그게 곧 좋은 스크립트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파스칼 루반은 주인공이 결단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이로 인한 결과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은 스크립트'라고 덧붙였다. 이른바, '기승전결'이 확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 '기승전결'이 확실해야 좋은 스크립트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 이 말은 곧,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악당이 될 수도, 선한 이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스토리 드리븐 게임의 주인공이 '캡틴 아메리카'라면, 나쁜 선택지의 존재 자체가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셰퍼드는 애초에 중립적 인물을 내세웠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명예를 중시하는 선량한 영웅이 될 수도, 효율을 중시하는 냉혹한 군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주인공은 좋은 대의를 지녀야 한다. 주인공이 악당이라면 메시징보다는 일시적 쾌락을 위한 게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 주인공은 '가변적'이어야 한다.

'환경'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장소, 사건, 시대상, 소셜 그룹까지 말이다. 그러나 좋은 환경은 언제나 스크립트의 연출을 돕거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환경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서사의 품질에 굉장히 큰 영향을 준다.

마지막으로, '사실성'을 지녀야 한다. 게임이 꼭 '진실성'을 지닐 필요는 없다. 현실에 '광선검'따위가 없다고 게임에서조차 광선검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광선검이 무한동력에 뭐든 다 썰어버리는 무적의 무기라던가, 광선검에 맞고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다니는 인물 등은 '사실성'을 떨어트리며, 결과적으로 이야기 전체의 몰입도를 큰 폭으로 해친다. 가상이라 해도, 적어도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강연의 끝에서, 파스칼 루반은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그는, 게이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말했다. 항상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되, 게임을 만드는 이들 또한 커뮤니티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고, 게임을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게이머들의 의견을 형성하는 열쇠가 될 수있음을 항상 고려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강연을 마쳤다.






현지 시각 8월 23일부터 27일까지 독일 쾰른에서 데브컴 및 게임스컴 2021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게임스컴 공식 미디어 파트너인 인벤이 최신 뉴스를 전달해드립니다.
게임스컴 2021 특별페이지: https://bit.ly/gamescom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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