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회사는 괜찮나?"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받는 전화다. 거의 20년 동안 매년 한 번씩은 꼭 받는 것 같다. 게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영역이 상당히 넓기에, 게임 업계 사정을 잘 모르는 가족, 지인들은 어떤 크고 작은 사건이 공중파 등을 통해 알려지면 게임 업계 전체의 대형 위기로 확대해석하기 쉽다. 그중에는 실제로 업계에 파장이 꽤 컸던, 예를 들면 게임중독법안 같은, 사건도 있었고, 몇몇은 일부 언론이 과장되게 보도한 것도 있었다.
아무튼 최근에 받은 전화의 주인공은 '엔씨소프트'였다. 이제까지 특정 회사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내심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사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의 엔씨를 보자. 작년에만 모바일 리니지 형제들의 인기에 힘입어 2조 5,000억 원이 넘는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매출액 기준으로만 보면 엔씨는 대한민국 기업 중 한진과 농심을 위아래로 두고 우리나라 기업 중 104위지만, 당기 순이익을 기준으로 하면 51위가 된다. 미래에셋증권, SK이노베이션, GS 같은 굴지의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김택진 대표는 방송인, 연예인도 아니지만 무려 공중파 CF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으며, 게임은 전혀 몰라도, NC 다이노스에 열광하는 팬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특히, 요즘은 게임 회사보다는 초거대 언어모델을 적용하는 AI기업으로 포지셔닝 하고자 하는 포부까지 밝혔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게임 회사들이 많지만, 한동안의 재무적 성과와 외연 확장만 보면, 충분히 업계 안팎에서 엔씨를 대한민국 게임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인지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그늘도 있는 법. 문제는 엔씨의 경우, 이 그늘이 회사의 본질을 흔드는 듯한 위기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거다.
리니지 IP에 대한 집착과 고착화된 수익 모델이 점점 더 많은 게이머의 반감을 불러오는 와중에, 이제는 주변의 수많은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과 내전인지, 외전인지 헷갈리는 치열한 밥그릇 싸움까지 하는 양상에까지 이르렀다.
오랜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운영은 불만이지만, 다른 거 몰라도 '퀄리티' 하나는 독보적이라는 평판이 존재 했었고, 사실 이 점이 게이머와 업계 사이에서 엔씨라는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든 가장 큰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엔씨의 PC/콘솔 신작 '쓰론앤리버티'의 베타 테스트 결과는 국내 게이머를 크게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혹평이 이어졌고, 엔씨가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황금알을 낳는 거위만 바라보며, 자기복제의 늪에 빠진 건 아니냐는 거센 의혹에 스스로 답을 하는 모양새가 됐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저마다 내놓는 관점도, 해법도 다 다르다. 하지만, 엔씨처럼 게이머, 주주, 애널리스트 그 외 엔씨 이해관계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해결책을 말하는 경우도 드물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리스크를 감수하며 새로운 도전을 통해, '엔씨 퀄리티'를 다시 보여 달라'는 소망이다. 이미 다른 몇몇 회사들은 레벨업과 강화, 득템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치트키를 훌쩍 던져버리고, 글로벌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기에 더욱 간절하다.
추석 명절에 앞서, 김택진 대표는 사내 메일을 통해 자기 성찰과 변화를 다짐했고, 사내 TF를 조직해 비용 절감으로 우선 쇄신을 시작했다는 업계 발 소식도 들리지만, 여전히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도 동반하고 있다.
주가도 바닥을 치고 있고, 민심은 물론, 이미지도 바닥을 찍었다. 동료 기자들은 간단한 엔씨 소식도 다루기를 난감해한다. 비록 조회수는 얻을지언정, 기사 내용과는 상관없는 분노의 악플 세례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엔씨에 대한 계속되는 부정적 반응들이 위기 속 기회를 찾는다는 말까지 진부하게 들리게 한다.
그래도 평정심을 애써 되찾고, 과거를 돌아보면 엔씨는 항상 큰 위기 속에서 반전을 보여줬다.
다음 날 바로 회사가 망해 없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비관론이 득세하던 2008년 말, 엔씨가 절치부심해서 공개한 아이온은, 엔씨 퀄리티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며, PC방 점유율 160주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엔씨의 성공은 물론, 그 당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질 듯했던 국내 게임업계 전체의 승전보이기도 했다.
블레이드 앤 소울 출시일에 회사 사무실에서, 동료 직원들과 플레이하면서,'과연 이게 한국 게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창성과 완성도인가'라며, 마치 내가 만든 게임인 양 축하하고, 감탄하던 장면이 아직 머리에 생생하다.
전작 아이온의 평가를 뛰어넘으며, 엔씨가 게임 그 자체로 다시금 인정받던 시점이다. 엔씨 게임을 플레이하던 게이머들이 종종 게시판에서 그들만의 자부심과 만족감을 표현하던 시기다. 엔씨의 글로벌 잠재력이 가장 높게 평가받았던 때도 바로 그즈음이다.
이후 10년간 엔씨는 성장과 논란, 기대와 실망, 믿음과 배신, 여러 가지 얽히고설킨 복잡한 주변의 반응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지금까지 왔다. 역시나 또, 비관론과 회의론이 엔씨를 휘감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비난과 악플을 이성과 성찰이라는 필터로 걸러내면, 여전히 불씨가 꺼지지 않은 엔씨에 대한 기대감과 믿음이 보일지도 모른다.
위기가 진짜 위기임을 엔씨가 진심으로 인정만 한다면 가능성은 아직 있다고 본다. 해답도 이미 나와 있다. 요즘 누구나 쉽게 저력을 이야기하지만, 저력은 이미 위기를 극복해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나는 아직 엔씨의 저력을 믿는다." 짧지 않던 통화, 마지막에 내가 했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