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신화 게임이 되리 #4 비극과 희망이 공존하는 인천

기획기사 | 강승진 기자 | 댓글: 5개 |


많은 게임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지역 : 인천광역시(Incheon)
현황 : 면적: 1,067.04㎢(전 국토 면적의 1% 이상) / 인구: 총 1,330,898세대/2,974,481명
설명 : 조선 태종 13년 인천부로 변경된 이후 이어진 지명이다. 백제 초기 비류의 도읍지로 미추홀로 불렸으며 이후 소성현, 경원군으로 개칭되었다. 이자겸으로 난으로 인주에서 경원부로 그 명칭이 환원되었으나 조선왕조 개창후 인주로 다시 바뀌었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 행정구역 명칭 개정에 따라 인천부로 변경되었다.

[인천시 지역 설화] #선사시대부터 한반도 서해안의 중심이었던 인천은 단군과 관련된 역사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강화도를 시작해 삼국시대부터 개항기, 근대사까지 우리의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담아낸 지역입니다. 특히 넓은 지역을 반으로 나눠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외세 침입의 아픔, 들끓는 도적에 영웅적인 인물의 등장, 그리고 먹먹한 결말들을 가진 설화를 다수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어떤 결말도 마냥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게임 위쳐의 세계처럼 말이죠. 하지만 좀 더 뜯어보면 그러한 비극이 때로는 약간의 희망을 남기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게임에 더없이 어울리는 이야기들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고요. 소개하는 설화 대부분은 전해오는 그대로 담았지만, 한자나 지금은 쓰지 않은 사어(死語)가 많아 읽기 편하게 조금 편집, 각색해서 정리했습니다. 일부 삽화는 그림 AI(Midjourney, DALL-E 등)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아기 장수의 죽음에 천마가 울며 떨어지다'
● 천마와 아기 장수
● 지역: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설화





조선 중기 한 산 아랫마을에 선량한 부부가 살았다. 부부에게는 오랫동안 아기가 없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말이 힘차게 달려오는 꿈을 꾸고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고 10개월 뒤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기는 눈이 부리부리했고 열흘 만에 걸었으며 한 달이 되자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백일이 되어서는 맷돌을 번쩍 들었고 초가지붕 위를 휙휙 날아올랐다가 산꼭대기로 달려 올라가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 장수가 태어났다고 기뻐했고 이는 관아에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고을 사또는 아기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기 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되어 나라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아기 장수의 집에 아기 장수는 물론 부모, 일가친척까지 모두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아기 장수에게 일가가 몰살당하느니 너의 목숨을 내가 끊는 게 낫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기 장수 역시 그런 아버지의 뜻을 알고는 "저를 묻을 때 콩 다섯 섬과 팥 다섯 섬을 같이 묻어 주세요"라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아버지는 다듬잇돌로 아이를 눌러 죽이고는 콩과 팥을 함께 묻었다. 이튿날 소문대로 관군이 도착했고 확인을 위해 무덤으로 자신을 안내하라고 부모에게 말했다. 그런데 관군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기 장수는 살아있었고 묻은 콩은 군사가, 팥은 군마가 되어 아기 장수를 호위하려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관군 장수는 깜짝 놀라 역적을 잡으라 소리쳤다. 아기 장수는 자신은 역적이 아니며 머지않아 쳐들어올 적군을 맞아 싸우다 죽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관군은 끝내 칼을 내리쳐 아기 장수를 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 장수의 부모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고 관군의 행동에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라 말했다. 그때 산골짜기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었고 천마는 아기 장수의 무덤 위를 한나절 동안 슬피 울며 날다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 장수의 무덤 옆에 천마를 묻었다.

몇 해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쳐들어왔다. 사람들은 탄식했다. 아기 장수가 살아있었으면 천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켰을 것이라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 이어져 오는 곳. 그게 천마산, 오늘날의 철마산이다.


'여덟 장사에 도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더라'
● 여덟 장사의 전설을 지닌 장자골
● 지역: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설화




▲ 지금은 인천대공원과 지하철역이 들어선 장자골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지명 유래가 있는 장자골은 이름처럼 유난히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고을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피폐한 삶이 이어지며 도적 떼들이 곳곳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장자골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도적들이 항상 장자골을 노리곤 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런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하루는 동네 주막에 수상한 행적의 사내들이 찾아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술을 마시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세상은 흉흉하고 장정들의 행색은 수상하니 주모가 그들 중 한 명에게 '술은 그만들 드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좀 쉬었다 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모는 남편을 부엌으로 불러 사내들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니 냉큼 마을의 여덟 장사에게 이를 알리라고 전했다.

주모의 말을 들은 남편은 곧장 마을의 여덟 장사에게 달려가 이를 털어놨다. 장사 중 하나가 '우리가 가서 지켜보리라'라고 답하고는 주막 근처로 가 몸을 숨겼다.

시간이 흐르고 밤이 되자 낯선 행색의 장정들은 주막을 빠져나왔다. 여덟 장사가 그들의 뒤를 쫓으니 아니나 다를까, 장자골 부잣집 담을 넘어 도적질을 시작했다. 이때 여덟 장사가 그들 앞에 나타나 소리를 지르며 일순간에 그들을 붙잡아 포도청에 넘겼다. 장자골을 지키는 여덟 장사의 이야기는 인근 마을에도 퍼져 나갔고 다른 도적들도 장자골을 기웃거리지 못했다.

여덟 장사의 설화 말고도 장자골 장정들이 도둑을 처분하는 이야기도 이어져 오는데 그들은 도둑을 잡으면 느티나무에 도적들을 묶어 손톱과 발톱을 뽑고 나서야 놓아주었다고 한다. 여덟 장사가 없이도 도적들을 잡아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방식 탓에 도둑들은 함부로 장자골을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며늘아기도 내 도둑질을 알고 있구나'
● 도둑 시아버지를 뉘우치게 했다는 오닭 전설
● 지역: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설화




▲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오달기, 나그네들은 오달기에서 도둑 맹가를 마주했다

남동구 구월동에는 오달기(오닭이)라는 이름의 주막거리가 있었다. 인천부 청사, 수원 등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어 잠시 쉬어갈 주막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오달기에는 맹씨 성을 가진 주인도 있었다. 몸은 장대하고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동네 사람들에게는 맹 장으로 통했다. 하지만 주막은 눈속임일 뿐 맹가의 진짜 직업은 나그네들을 터는 도둑이었다. 주막에 묵으려 오는 손님 중 돈이 넉넉할 것 같은 사람만 눈여겨봤다가 다음날 숲 속에서 강도질을 하는 식이었다.

맹가는 자신만의 도둑질 수법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닭이 날개를 펴고 치는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들은 으레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맹가는 새벽도 안 된 밤에 허벅지를 치고 꼬끼오 하고 울며 닭 울음을 흉내 냈다. 잠이 들었던 나그네들은 새벽이 된 줄 알고 길을 재촉했고 맹가는 어둠 속에서 호통을 치며 그들을 겁줬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도둑이 나타나자 나그네들은 짐을 던지고 줄행랑을 쳤고 맹가는 손쉽게 보따리를 챙겼다.

물론 이런 일이 맹가의 주막에만 일어나니 마을 사람들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장사인 맹가가 두려워 섣불리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마침내 맹가의 며느리 귀에도 들어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도둑질을 그만두게 할 방법을 고심하다 한가지 묘안을 냈다.

맹가가 한밤중 도둑질을 하기 위해 주막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때 맹가의 며느리가 노래를 불렀다.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맹 장군 인(人) 닭아 우지 마라

흉내낸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난 나그네는 떠날 준비를 하다 며느리의 노랫소리를 듣고 맹가에 대한 소문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는 짐보따리를 안고 날이 샐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맹가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며느리도 내가 도둑인 걸 알고 있구나'라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후 잘못을 크게 뉘우친 맹가는 선량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시아버지의 못된 버릇을 고친 며느리의 지혜를 장하게 여겨 관가에서는 상을 내렸다고 한다.

맹가의 주막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한 삼각산의 이 장사'
● 불행하게 일생을 산 삼각산 이 장사
● 지역: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설화





소래산 서쪽에 세간에 담뱅이라 하는 마을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 이씨 집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울지도 않고 이내 일어서 두 발로 걸었다. 누구든지 장사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집안 사람, 마을 사람 가릴 것 없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는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몸집이 어른만 해지고 열 다섯에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어 이 장사로 불렸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걱정스러워했는데 예로부터 힘이 센 장사가 태어나면 역모를 두려워 해 본인은 물론 그 일족을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장사에게 그런 일은 없었지만,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워 인재 등용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씨 가족은 공부는 하지 않고 힘자랑만 하던 이 장사를 무과에 급제시키기 위해 한양으로 보냈지만 뜻을 이루지못했고 이 장사는 방탕한 삶에 빠졌다.

그렇게 급제하지 못하고 힘자랑만 하던 이 장사 소문이 한양에 퍼졌고 이내 삼각산 이 장사로 불렸다. 이 소식은 인천 본가에도 퍼졌고 아버지는 그를 불러 집 밖으로 나오지 못도록 했다.

그렇게 이 장사가 집에서 숨어 지내던 중 오월 단오를 맞아 씨름판이 열리게 되었다. 인천의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모이자 이 장사 역시 씨름 대회에 나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이미 이름이 널리 퍼졌기에 이 장사가 대회에 나가는 것까지는 허락했지만, 누구에게도 이기지 말라 당부했다.

이 장사는 씨름판에 나왔지만,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오랜 명성과 달리 지는 모습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런 이 장사의 모습에 야유를 퍼부었다. 이때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이 장사는 씨름판을 나오면 주먹을 땅을 내리쳤는데 팔뚝만큼 땅이 움푹 파였다. 사람들은 이 장사의 괴력에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이씨 집안의 불안은 되려 커졌다. 소문이 퍼져 언젠가는 집안 전체가 잡혀 죽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이 장사의 부모는 오랜 망설임 끝에 그가 잠든 사이 어깨를 자귀로 내려찍었다. 결국 이 장사는 큰 뜻을 이룰 만한 큰 힘을 지녔지만, 뜻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불편한 몸으로 일생을 보냈다.


'부처님의 노여움이 뱀 떼를 부르다'
● 뱀 떼가 망하게 한 주안산
● 지역: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설화





만월산은 남동구 중심지에 솟아있는 탁 트인 산으로 예전에는 주안산으로 불렸다. 당시 이곳에는 주안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70년 전까지도 법당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주안사에는 스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쁜 행실로 유명했다. 수행을 게을리하는 것은 물론 승려가 해서는 안 되는 음주에 고기도 가리지 않았고 잠은 아무 데서나 자는 망나니 같았다. 술을 마시면 열이 올라 승복을 벗고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녀자를 희롱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나무라면 그는 '부처님이고 뭐고, 난 내 식대로 살 거다'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실이 심해지면서 절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안사에 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모여든 수천 마리의 뱀들은 법당만이 아니라 천정이고 기둥이고 문이고 가릴 것 없이 뒤엉켜 우글거리고 있었다. 스님이 뱀을 몰아내려 하면 더 많은 뱀이 어디선가 모여들었다.

결국 못된 스님은 도망치듯 절을 빠져나왔다. 훗날 이는 부처님의 노여움이라 평가받는다. 어찌됐든 그는 이러한 사건이 자신의 잘못인지는 끝까지 몰랐지만, 주안사는 망해버리고 말았다.


'호랑이 입이 산소를 머금고 있으니 어찌 자손이 는단 말이오'
● 호랑이 입 모양의 호구포
● 지역: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설화




(이미지: 지역N문화포털)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호구포 뒷산 오봉산 기슭에는 호랑이가 입을 한껏 벌린 듯한 형상의 검고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이를 호구암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옛날 호구암 맞은편 산기슭에 사는 세도가 집안이 대대로 자손을 제대로 보지 못해 대를 잇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마땅히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대문 앞으로 한 풍수지리사가 지나가며 물 한모금을 청하고는 집에 들어왔다.

'집에 큰 근심거리가 있구려'라며 운을 띄운 그는 물 건너 호구암이 입을 크게 벌리고 산소를 삼키려 드니 늘 자손이 귀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세도가 집안은 무릎을 치고는 당장 호구암으로 달려가 호랑이 입 부분을 도끼로 때려 없애 버렸다. 그랬더니 그 뒤로 자손이 번성했다.

세도가가 무서워 말은 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에 호구포 주민들의 불만은 컸다. 마을을 지켜주던 수호신을 한순간에 잃었으니 말이다.



인물
● 심청(인당수와 연봉바위)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남포리




(이미지: 지역N문화포털)

눈이 보이지 않던 심학규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심청은 지금은 북한 영토가 되어 갈 수 없는 황해도 황주에 살았다. 어느 날 심학규는 화주승이라는 승려를 통해 부처님에게 공양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덜컥 쌀을 공양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당시 중국 상인들은 조선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심한 물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심청은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 상인들에게 손수 제물이 되어 용왕님을 달랠 터이니 대신 공양미 300석을 달라 요청했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지만, 그 효심에 감동한 용왕은 그녀를 연꽃배에 태워 지상에 올려보냈다.

심청이 빠졌다는 인당수는 장산곶 앞바다와 백령도 사이이며 연꽃배를 타고 떠밀려 도착한 곳이 인천 백령도 남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인 연봉바위다.


● 이승훈 베드로
●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1756년 태어난 이승훈 베드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라 알려진 인물이다. 일찍이 천주교를 접했던 이승훈은 종교와 교리를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를 따라 사절단으로 중국을 방문한 뒤 천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북경 북천주당을 찾아 교리를 배우고 가르침에 이끌려 자진해 세례를 받고자 했다.

이승훈 베드로는 세계에서 선교사 없이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영세를 받은 최초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한양에 돌아온 이승훈은 전교 활동을 펼치고 신앙 모임을 가졌다. 이후 임시로 전례를 행하던 그는 자신의 행동이 교리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사제 파견을 요청,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다.

하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계속됐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돼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 이승훈 베드로의 묘는 그가 태어난 인천, 오늘날의 남동구 장수동에 안장됐다.



유적 & 아이템
● 장수동 은행나무
● 인천 남동구 장수동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정도로 오래된 나무로 병충해가 없고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며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가져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일찌감치 많이 쓰였다.

높이 30m, 둘레 8.6m의 큰 크기를 자랑하는 장수동 은행나무는 나이만 해도 800년으로 추정되며 5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뻗어있어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마을 사람들은 액운이나 돌림병이 돌면 수호수와 같았던 이 은행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빌었다고 한다. 또한, 10여 년 전까지도 7월과 10월 제사를 지내며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했다고 한다.


● 토끼와 두꺼비가 사는 이상세계, 청동산수문경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미지: 인천광역시)

고려시대 유물인 청동산수문경은 청동에 산수무늬를 새겨 만든 원형의 거울이다. 앞면은 사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특징을 지녔고 뒷면에는 한 편의 풍경화를 그리듯 표현되어 있다.

뒷면은 가운데에 있는 고리를 중심으로 화려한 전각이 구름 위에 솟아있고 커다란 나무, 무성한 잎, 넘실대는 물결 위의 용,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그 위에는 두 사람이 보인다. 다리 건너에는 토끼와 두꺼비가 마주 보고 있으며 뒤로는 구름을 타고 오는 듯한 선인이 표현되어 있다.

선인과 토끼, 두꺼비 등은 도교와 관련 있는 도상으로 고려 시대 널리 유행했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의 신무기, 불랑기(佛狼機)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미지: 인천광역시)

15세기 포르투갈을 포함한 서구 제국에서 만들어진 대포의 한 종류다. 1517년 서역 상선이 들어오면서 전해졌다.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했다. 임진왜란 이후 적극 도입되었고 거북선 등에 장착되어 전란 극복을 위한 신무기로 활용되었다. 불랑기는 포가 포신,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로 분리되어 있다. 특히 포 하나에 여러 개의 자포가 있어 1차 사격 후 재장전-사격까지의 발사 간격이 매우 짧았다. 기존의 조선 화포는 총구로부터 화약을 넣은 후 도화선을 통해 점화하는 방식이었다.

불랑기는 이런 장점을 통해 전장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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