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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커가면서 죽음을 준비했던 전쟁광 고구려인들

아이콘 신월야
댓글: 2 개
조회: 532
2012-08-23 11:27:39

 고구려는 철제기술을 기반으로 군사력이 발달한 기마민족 국가다. 제국의 특성을 지닌 고구려는 오직 '전쟁'이라는 두 글자만 믿고 달려오다가 결국 난관에 봉착한다. 그건 경제력이다. 명예로운 전쟁을 좋아하던 고구려인들은 초반에 '약탈 전쟁'보다는 그저 정복 전쟁에 의존하며 영토확장에 늘리기만 급급했다. 하지만 곧 고구려의 추운 산악지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농사를 지을 지형적 조건이 되지 못했고, 기마민족으로써 살아온 그들에게 문명은 친숙하지 못할 단어였다. 결국 고구려는 문명으로의 급부상과,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력을 얻기위해 할 수 없이 정복을 하여 그 중 전리품을 얻는 식의 '약탈 경제'를 선택했고, 그러면서 고구려의 전쟁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열악한 자연환경은 국가의 성격과 직결되기 마련이다. 결국 고구려인들은 국내에서 만족할 수없는 생산물의 부족을 전쟁으로 보충해야했다.
전투 자체가 중요한 생산 행위였으며, 일상화였다. 그랬기에 고구려인들은 커가면서 동시에 죽을때 입을 수의를 미리 만들었다.
고구려인들은 죽음 자체에 너무나 친숙해 있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가혹한 시련이 고구려인들의 용맹성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또, 그들을 세차게 정복전쟁으로 내몰게 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삼국지》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라고 하면서 기력있게 묘사되었다. 고구려인들의 성격에 급함과 흉폭함이 묻어나는 대사다.
또한 부족성이 짙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선 느긋하게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그같은 성격을 지녔으리라.


고구려는 3세기 단계에서 전투적인 훈련에만 전심하는 전사계층을
1만명 정도 확보했었다. 집집마다 부경 이라는 다락식 창고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은 약탈로 얻은 잉여물을 저장해 두는 공간이었다.
고구려인들의 비장하고도 다부진 모습은 그 밖에도 여러 군데에서 찾을수있다.
바로 칼을 뽑기에 용이하게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뒷다리를 길게 빼는 인사법인 '궤배(詭拜)' 가 그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사상은 유리왕의 아들인 해명 태자가 들판에 창을 꽂고 말을 달리다가 몸을 날려 찔려 죽거나, 유명한 호동 태자도 변명 하나 없이 칼에 엎어져 자결한데서 그 냉정하고도 맹렬한 성격을 어찌보면 잔인한 성격을 읽을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군대가 위(魏)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퇴각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장군 유유는 적진에 들어가 적장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그 답례로 화려한 그릇에 뚜껑이 덥힌 음식을 주는척하며 숨겨온 칼을 뽑아 적장의 목을 베고 군인이 오기 전에 자결한다.

숨어있던 고구려의 주력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전세를 역전, 격렬한 전쟁 끝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에서 고구려가 필요로 했던 군왕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단 침공을 당하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고구려 제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다. 장성하자 과연 흉학(凶虐)하여 자주 노략질했다(태조왕)"거나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검을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았다(동천왕)"고 한 유형이었다. 강건하고 뛰어난 체력과 걸출한 군사적 자질을 토대로 호전성(好戰性)을 한껏 발휘하는 전율할 만한 공포의 대상으로써 주변국들을 늘 압도하며 호령해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다."는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제왕의 전형으로서, 탁발한 군사적 능력과 용감한 체격을 운위(云謂)하고 있다. 검을 부리면 당할 자가 없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는데, 부여국 언어로 활의 명인을 가르키는 말은 '주몽'에서 이름이 연유한 고구려 시조왕을 필두로하여 그 같은 색채가 진하게 남아있다. 가령 "신체가 장대하며 훤칠한 키를 가졌다.[소수림왕]."

"전쟁에 날카로운 눈썰미를 지녔고, 훤칠하고 날렵한 몸매로 움직였다. 모든 군대가 그를 신망했고, 그래서인지 전쟁을 할때마다 패배하는 적이 없었다. 또한 이 모두가 개마무사(鎧馬武士)라는 강한 군대 덕분일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 "누구보다 용맹하고 전쟁에서 항상 선봉에 섰다. 그 심장은 그 어떤 거한보다 컸다.[장수왕]","담력이 있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 하였다[평원왕]"는 기록이 그것을 웅변해 준다.

칼바람 이는 고구려 사회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강력하고 체계화된 엄격한 법이다.《삼국지》에 따르면 3세기에 들어서 고구려에는 모든 감옥을 폐쇄했다고 한다. 살인, 방화, 절도, 반란, 적군과의 연통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있으면 여러 가(5부족)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와 연관된 가족이나 친구들도 잡아들여 노비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특히 고구려의 존망을 가름하는 모반죄의 대해서는 참혹하게 처벌하였다. 먼저 군중을 불러 모은다음 횃불로 서로 다투어 온몸을 그슬린 연후에 목을 베고 연관된 자들은(친구 혹은 가족) 노비로 만들었다. 또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람을 죽인자는 목을 베어 성문앞에 걸어둬서 죄의 대가가 이러하다는 걸 공표한다.
도적질한 자는 12배로 갚게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만들었다. 기마민족의 성질이 있는 고구려에서 말은 목숨보다 소중한 보물이나 다름없는데다가 당시 기병이 전쟁의 최고를 차지하던 시대에 말은 곧 국가의 재산이었다. 그런 귀중한 재산인 말을 죽인다는 것은 곧 국가의 반역죄까지 뒤집힐 수 있는 대역죄에 해당했기에 말을 죽이는 것은 인간을 살인하는 것 만큼이나 그 처벌이 엄격하였다. 국가의 중요한 기밀사항이나 특별히 비밀로 처리된 국가 안보의 군 기밀 자료, 핵무기에 대한 여러가지 기밀사항 등같은 1급 특급 기밀을 빼돌려 적군에게 팔아치운 것과 맞먹는 것이라 보면된다.


이처럼 잔인하고도 평등한 법과 제도가 고구려 사회를 뒷받침 해준 것이다. 심지어는 밤에 어린아이가 혼자 길을 걸어도 해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일도양단(一刀兩斷)식의 서릿발 같은 기강과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가 고구려였다.
이렇듯 칼날같은 법으로써 고구려는 그 체제를 유지할수 있었다.

요즘같이 집 안에서만 놀고, 전쟁이란 게 없는 현대의 사람들이 보면 감히 "이런 무서운 곳에선 살고 싶지 않다!" 라고 말하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군사제도와 체계적이고 균형잡힌 강력한 법, 그리고 그 정점에 강력한 군주가 버티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그토록 강한 정신을 가지며 아시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 中

Lv21 신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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