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약자들의 비탄.
5년 전, 런던 주점.
주점은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선원들. 그리고 그런 선원들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바다에서 고된 작업을 해야 하는 선원들에게는 여기서 하는 도박만이 유일한 놀이였고, 주점 여급이 보여주는 미소만으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해야 했다. 도시에 가족이나 연인이 있는 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이들에게 있는 건 자기들끼리의 끈끈한 전우애였고, 그걸 제외하면 고독뿐이었다. 적어도 이 곳에서만은 함장도 일개선원일 뿐이었다.
주점의 맨 구석에서는 맥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열띤 고성을 지르는 사내와 그를 달래는 사내가 보였다. 입은 옷으로 봐선 꽤나 잘 나가는 상인으로 보였지만 선원들에게는 그저 술맛 떨어지게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술에 취한 선원들이 한두번씩 시비를 걸려고 다가갔지만 소리지르고 있는 사내의 덩치를 보고는 돌아서기 일수였다. 만약 그가 자기를 달래고 있는 사람만큼 덩치가 작았다면 이미 싸움을 벌여 주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이 마른 듯 맥주를 단숨에 들이킨 그는 다시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잉글랜드인은 북해 밑으로는 내려가지 말라는 거 아냐?”
이젠 듣다 질렸는지 상대도 술을 들이키고는 조용히 말을 했다.
“제임스. 한 번만 더 하면 50번 채우는거다.”
제임스라고 불린 남자는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가 주저앉았다. 자기보다 훨씬 작은 사람임에도 꼼짝 못 하는 것 같았다.
“한두번 겪은 일도 아니잖아.”
“필립 형!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 땜에 우리가 날린 손해가 얼마냐고!”
“그럼, 이런 일 있을 때마다 그렇게 열 받을 참이야?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데.”
그 말을 들은 제임스는 욕을 내뱉더니 주저앉았다. 필립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장사는 나름대로 짭짤했다. 낙후된 잉글랜드에서는 보기 힘든 갖가지 미술품들과 의복, 세공품들은 겉멋만 든 귀족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베네치아가 독점하고 있는 지중해 무역은 포르투칼이나 스페인도 꿈꾸기 어려운 것이었고, 면화만이 유일한 수출물인 영국에게는 불가능이나 다름없던 것이었다. 위험부담이 큰 만큼 최대한 빠른 길을 통했고, 지중해를 무사히 벗어나는 듯 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막 벗어난 세비야 앞바다에서 갑작스런 포성이 그들을 덮쳤다. 서인도 제도로 가는 무장상선대로 추정되는 함대가 그들을 덮친 것이다. 아니, 덮쳤다기보단 그냥 심심풀이용 사격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감히] 영국 함대가 지브롤터를 넘은 것에 대한 연례행사였고 그저 묵묵히 도망가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중 한 발이 절묘하게 기함 뇨르트의 창고에 명중했고, 안전을 요하는 세공품이 대부분 훼손되었다. 부서진 세공품은 한낱 유리조각보다 가치가 없었다. 적재능력이 가장 좋은 뇨르트에 최대한 교역품을 밀어넣은 게 실수였다.
뇨르트와 보급함 알펜에는 충분한 무장이 돼 있었지만, 그리고 호위함 예인예하르까지 있었지만 반격은 할 수 없었다. 세비야 앞바다라는 점 외에도 스페인 함선을 공격한다는 건 곧 상단의 붕괴를 부를 뿐이었다. 결국 런던에 도착했을 때 팔 수 있는 교역품은 처음 싣고 온 것의 절반 수준이었다.
필립은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는 최대한 교역품을 나눠 실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한텐 단골이 있잖아? 거기도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 그놈들보단 바이킹들이 차라리 낫겠지.”
제임스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그 때, 그가 갑자기 필립의 뒤를 가리켰다.
“저 자식은 뭐지?”
필립도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물건을 줍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필립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는 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거기 서라!”
제임스가 무서운 속도로 그를 쫓기 시작했다. 필립이 자리를 정리하고 그를 뒤따라갔을 땐 이미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간 뒤였다.
“술 취한 놈의 얘기가 뭐가 엿들을 게 있다는 거지?”
필립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엔 황당한 광경이 있었다.
무장한 병사 두 명이 제임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제임스가 쫓아가던 자는 삐쩍 마른 중년귀족 뒤에 숨어서는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귀족이 필립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 자도 한패라는 얘기지?”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큭!”
몸을 비틀며 반항하는 제임스의 배에 병사의 주먹이 꽂혔다. 거대한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필립이 귀족 앞으로 가서 말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굳은 목소리가 나왔다.
“저희는 주점에서 술만 마셨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붙잡는 겁니까?”
작은 몸집에서 나오기 힘든 무게감, 그 귀족은 잠시 움츠러드는 듯 하더니 곧바로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나는 잉글랜드 해군 총사령관 킬링류다. 듣자하니 네놈들이 주점에서 조금 이상한 얘기를 했다는데?”
“술에 취해서 장사 얘기를 했을 뿐입니다. 잉글랜드의 명예와는 관련 없는 쓰잘데기 없는 얘기였습니다.”
“그래? 자세한 건 조사하면 나오겠지. 따라오도록.”
킬링류의 옆에 있던 나머지 병사 둘이 필립의 주위로 다가왔다. 필립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칼집에서 머뭇거렸다. 그 때,
“제 친구에게 뭘 하는 거죠?”
또박또박하지만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킬링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미들튼 경 아니신가. 그런데 친구라니?”
킬링류를 부른 사람은 젊은 여군이었다. 바다에서 오래 살았을 법한데도 하얀 얼굴을 가진 미인. 그녀를 호위하듯 시종들과 귀족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당신이 잡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의 친구라구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주점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요.”
그러면서 그녀는 킬링류를 향해 다가왔다. 킬링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더니 웃으면서 순순히 물러섰다.
“그래. 알았네. 틀림이 없겠지? 미들튼 경?”
이번의 물음은 그녀가 아닌 그녀 뒤에 있는 귀족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경께서 오해하신 듯 합니다.”
날카로운 여자와는 외모에 걸맞게 달리 점잖고 단정한 말투. 그를 잠시 바라보던 킬링류는 고개를 젖고는 말했다.
“알겠네. 이번에는 내 실수로 하지. 돌아가자.”
뭔가 가시돚힌 말투였지만 킬링류는 병사들을 모아서 돌아갔다. 그 초췌한 입에서 나오는 웃음이 거슬렸지만 일행은 그가 간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필립이 말을 걸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
“라이자 미들튼이예요. 아까 그 사람은 신경쓰지 마세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범죄자로 모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아까의 차가운 표정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도 그 하얀 얼굴에는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이 남아있었다.
“네. 라이자 미들튼 경. 저는 상단 발할라의 상주 필립 노먼입니다. 그리고 이 쪽은...”
제임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엔 뭔가 알 수 없는 감회가 끼여 있었다.
“제임스 노먼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호드라고 불러주십시오.”
“제임스!”
“뭐 어때? 형도 발두르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하잖아?”
산적 같은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작은 사람 앞에서 촐랑대는 모습에 라이자도 조금은 당황한 듯 했다. 그 때 라이자 옆에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윌리엄 미들튼이라고 하네. 둘 다 잉글랜드 해군의 사관이지. 만나서 반갑네. 발할라의 명성은 나도 잘 알고 있네. 발트해는 물론 베네치아까지 무역루트를 개척했다지?”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군. 그럼 수고하게. 바빠 보이지만 나름대로 공무 중이라서 말이지.”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두로 향했다. 라이자도 윌리엄을 돌아보더니 작별인사를 했다.
“호드. 그리고 발두르라고 했죠? 그럼 다음에 봐요.”
그들이 떠나면서 그들을 호위하던 병사들 역시 부두로 향했다. 필립은 벗어뒀던 모자를 다시 썼다.
“태풍이 지나간 것 같군. 우리도 돌아가자.”
제임스도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곧 필립을 따라 주점으로 들어갔다.
“놀라운데. 저들이 미들튼이었다니...”
“왜? 그 무서운 미들튼이 저런 선남선녀였다니 신기하냐?”
“신기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우리가 동경했던 해적인데.”
“그래서? 아직도 해적을 꿈꾸는 거야?”
필립이 제임스의 가슴을 툭 쳤다. 제임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 그래도 우리는 노먼(Norman)이라구. 바이킹의 후손이란 말이야.”
“아이구, 그래. 잘났어. 뭐 그래도 라이자라는 여자가 해적이었다는 건 재밌긴 하군.”
진지하던 제임스의 표정이 다시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필립은 제임스의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우린 저런 여자를 한 명 더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제임스는 자리에 주저앉더니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필립은 그런 제임스를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부두를 보고 있었다. 아니, 부두를 훨씬 넘은 바다 저 편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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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챕터의 제목과는 관련없어보이지만 OTL;;; 암튼 영국이벤트를 마음대로 바꿔버렸습니다 ~_~ 네덜란드 이벤트 쪽으로 가면 비장미가 조금은... 묻어나야겠죠? OTL
뇨르트 = 북유럽신화에서 바다의 신. 알펜 = 엘프. 예인예하르 = 전사들이 전장에서 전사하면 발할라에서 라그나로크를 기다리며 싸움을 준비하는데 그들을 일컫는 말.
라고 주석을 달기는 할께요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