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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시 쓰는 마영전]별의 불꽃. 4

그락란라우
조회: 955
2015-07-26 03:43:09

  대지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움직임은 무척 조심스러워서 집중하지 않는 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그것도 제법 넓은 범위에 걸쳐서. 그리고 그 움직임의 중심에는 한 사내가 서 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빛이 바다를 비추면 볼 수 있는 찬연한 황금색 물결처럼 요동치는 금발머리를 가진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사내의 금색 머리칼이 발하는 찬연함의 대부분을 앗아갔지만, 전부 다 가져갈 수는 없었던 듯하다. 사내의 살굿빛 피부는 먹구름의 영향인지 평소보다 더 하얀 빛을 띤다.

  대지가 미세하게 움직이던 순간부터 사내는 지금 선 자리에 아무런 미동조차 없이 서 있다. 사내는 그렇게 며칠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옷차림은 평범했다. 방한 기능은 고려하지 않은 얇은 옷가지를 걸쳤다. 상의는 어두운 갈색 계통이었고, 바지도 어두운 밤색이었다. 옷가지의 전체적인 특징을 꼽자면 주머니가 많다는 것이었고, 그 외에 특징으로 삼을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오른팔을 팔꿈치 아래까지 빈틈없이 감싼 회색 붕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붕대는 공기가 들어갈 틈도 없이 꽁꽁 싸매어져 있었는데, 마치 큰 상처를 가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붕대가 가진 회색 빛깔은 천의 부드러움이 아닌, 쇠 같은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다.

  어디선가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내가 눈을 떴다. 구름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작은 구슬 안에 담아놓은 듯 청명함을 가득 안은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금발 사내의 눈이 떠짐과 동시에 대지의 움직임도 멈췄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붕대가 감기지 않은 왼팔을 들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은빛의 광선을 흩뿌리며 덩치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사내의 왼팔을 이정표 삼아 착지했다. 물이 메말라 보기 흉하게 갈라진 땅을 연상시키는 감정을 찾아보기 힘든 딱딱한 얼굴과 굳게 다물린 입, 그리고 왼팔로 쓰다듬고 있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매와 똑 닮은 눈. 전체적으로 사나운 인상을 가진 사내는 왼팔로 쓰다듬고 있는 독수리의 녹색 고리가 걸린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며 말했다.

  “전해 주었나보구나. 잘했다.”

  사내는 독수리의 머리를 회색 붕대가 감긴 손으로 쓰다듬는다. 독수리는 사내가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은 듯 머리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쓰다듬는 손길이 멈추자 독수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키울 때만 해도 주먹만 했던 것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새삼 놀랍다. 무뚝뚝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내를 향해 독수리는 이렇게까지 크게 자란 게 자기 잘못은 아니지 않냐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는 독수리를 보며 사내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았다.

  사내는 편하게 자세를 잡고 앉은 실버레이를 건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실버레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사내는 오른손을 들었다. 회색 붕대로 감긴 오른팔이 실버레이의 시선을 붙잡는다. 대지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사내는 미세하게 떨리는 대지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독수리의 눈매를 닮은 눈이 들어 올린 오른손의 손바닥을 주시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바닥 위의 허공이었고, 사내를 따라 실버레이도 그의 손바닥 위를 주시했다. 

  깃털이 하나둘 곤두서기 시작한다.

  실버레이는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금발의 사내는 오른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세하게 떨리던 대지의 틈새에서 작고 시커먼 것들이 개미떼가 줄지어 가는 것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가 손에 힘을 풀자 검은 것들은 바람에 흩날리듯 사라졌다. 사내의 오른손이 내려갔다. 실버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의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던 것들을 독수리의 눈으로는 보는 게 가능했다. 실버레이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이제 이 몸으로도 어느 정도 힘을 글어낼 수 있게 됐단다. 그래봐야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쓸만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 3년 만에 이런 수확을 걷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이정도면 ‘엘더나이트’의 부름에 응해도 좋겠구나. 그 자는 용병단의 부단장인 ‘카이’란 사내를 원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사내는 실버레이에게 옷에 달린 수많은 주머니 중 하나에서 꺼낸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다. 실버레이는 고기를 한순간에 낚아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먹는다기보다는 마신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고기를 삼킨 실버레이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내의 뒤를 좇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는 실버레이가 뒤따라오려 일어나는 모습을 보자 망설임 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지친 몸을 공터에 마련된 벤치에 앉혔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음 같아서는 눕고 싶다. 거기다 오늘따라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칼이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그는 앉아 쉬는 동안이라도 몸에서 칼을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걸어두었던 칼을 풀어 던지듯 벤치 위에 올려두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사내는 먹구름이 잔득 끼어 태양이 보이지 않는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청명한 하늘을 환영하지는 않는 터라 이런 날씨는 언제나 반긴다. 겨울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가을 하늘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도 괜찮다. 

  뜨거운 지방에서 퍽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더위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추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더위는 못 참겠다. 이런 성향으로 미루어보아 사내는 자신의 출생지가 제법 추운 땅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별 의미 없는 추측이긴 하다.

  어릴 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땀을 흘린 탓인지 사내는 땀 흘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추운 날을 좋아한다. 격하게 움직여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문득 사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치고 있던 검은색 외투의 품속을 뒤졌다. 품속에서 두 장의 봉인 된 편지를 꺼낸 사내는 그 중 하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의 봉인을 뜯었다.

  편지를 받은 지는 퍽 오래됐다. 일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다보니 미처 뜯어 볼 생각을 못했다. 사내는 사죄하는 마음에서였는지 편지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다 읽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용은 짧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돋보인 사내의 속독 능력 때문이다. 사내는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외투 주머니 속에 넣었다. 사내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헤매도 소득은 없다. 언젠가는 ‘그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 주리라 생각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사내는 벤치에 내팽개쳤던 두 개의 칼을 다시 양쪽 허리춤의 걸쇠에 걸었다. 갑자기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같은 이름을 나눠가진 사내의 얼굴. 서로 떨어진지 이제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얼굴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옥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버팀목인데. 물론 지금도 가끔 연락하기는 한다. 그쪽도 ‘그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동서분주하는 듯하다.  

  가만히 서 있던 사내는 허리춤에 걸린 칼을 피해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바람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바람을 이루어 주고나면 둘 모두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내는 가벼운 콧방귀를 뀌었다. 없이 사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 친구나 사내가 바람을 이루어 주고 난처하게 된다 해도 난처해하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잠시 후면 훌훌 털고 아무렇지 않게 인생을 나아갈 것이다. 없이 사는 것에는 익숙한 남자들이니까.

  외투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다시 꺼내본다. 편지는 퍽 손길을 많이 거쳤는지 곳곳에 손때가 지독하게 묻어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 듯 조심스럽게 편지를 만지작거리던 사내는 편지에 적힌 수신인의 주소를 확인했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보아도 주소는 변한 것이 없다. 하긴 적힌 주소가 변하는 게 이상한 것이긴 하다. 

  이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면 그의 바람을 이뤄주는 게 가능했어야 한다. 하지만 십 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낭비해가며 찾아가보았지만 바람을 이루어줄 수는 없었다. 이 주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무리 흔적을 좇아도 찾을 수 없다. 사내는 편지를 집어넣었다.

  왕국의 인간일 것이 분명하건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는 건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일족 전체가 몰살이라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생각해보고 고민한다한들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사내는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이유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목적지 없이 정처 없이 걷던 사내는 세상이 더 어두워졌다는 걸 개달았다. 밤하늘을 말없이 쳐다보던 사내는 답답함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쯤 당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창, 그 친구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도 언젠가는 만나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허리에 찬 두 칼의 칼자루를 붙잡았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답답함이 가신다. 오랜 버릇이다. 사내는 그렇게 칼자루를 움켜쥔 채 목적지 없는 깊은 방황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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