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의 감시자. 아크라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을 꿰뚫는 자.
세상은 고요한 빛으로 가득했다. 얼핏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 했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빛이었다.
빛은 아득히 밝아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프리우나에게 있어 모든 존재를 꿰뚫듯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네가 프리우나구나."
눈이 시릴듯이 푸른 빛이 넘실거렸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지만, 신비하게도 그 어떤 밝은 빛보다 강렬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너는 참 똑똑한 아이였지."
차가운 무언가가 눈가를 덮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시리게 눈을 괴롭혔던 모든 빛무리들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이내 빛무리에 덮여있던 제각기 존재의 색깔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한 날이었다.
"너는 규율의 아이다. 함께 가자."
그는 넘치도록 푸른 색을 가졌다. 처음으로 마주한 나의 하늘이었다.
"너 눈이 왜그래?"
사랑스러운 붉은 색이었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는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내 눈이 어떻길래? 내 눈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움츠려 있었다.
"내가 보이긴 하는거구나! 미안해.. 나는 너 눈이 그렇길래 어디 아픈 줄 알았어. 나는 니나브야. 넌 이름이 뭐야?"
"..프리우나."
"루페온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나는 저 쪽 헤스테라 정원 쪽에 살고 있어. 넌 어디 살아? 저 쪽에는 말이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자상한 붉은 빛에 몸을 맡기고 있는 동안,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 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러니까! 안되겠어, 내가 구경시켜 줄께. 따라와!"
포근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손을 잡아 끄는 그녀를 놓치기 싫었고 그녀를 따라 처음으로 뜀박질을 했다.
그 후로는 라우리엘님을 따라 규율의 감시자로 임명되었고, 그녀가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우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눈이 그 애에게 어떻게 보였는 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색이었을까?
그의 푸른 빛은 어찌 보면 이 엘가시에서 가장 차가운 색깔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가장 강렬한 뜨거움은 푸른 색을 띈다는 것을 알았다.
집무가 끝날 때면 나는 검의 원탁으로 향했다. 노을 빛이 하늘을 물들 그 시각에 그는 항상 원탁의 중앙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때때로 그는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어쩌면 나에게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선명한 푸른 빛이 안타까울만큼 흐려질 때였다.
무엇이 그를 몰아세우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절박해 보이는 그의 옷깃에 손을 얹어 몰래 생명의 기운을 묻혀줄 때면, 어떻게 알았는 지 한참이나 지나서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항상 고맙다."
그의 온기가 나에게도 전염이 된 탓일까, 세상이 온통 열기가 도는 듯 했다.
대신전은 엘가시아에서 유일하게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잠든 것 같은 고요한 엘가시아에서 이 곳만큼은 모두가 본인의 의지로 루페온 신께 기도를 드렸다.
대신전 중앙을 오르는 계단은 유독 빛 바래있었기에 그 희미한 온기가 더욱 눈에 띄었다.
"프로키온 신이란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잃은 신. 아자키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멈춰 있는 나의 손을 잡고 계단 위로 이끌었다.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희미한 온기는 인사하듯 깜빡이며 사라졌었다.
여느 날처럼 집무를 마치고 검의 원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강렬한 푸른 빛은 대신전의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지만 그 날은 꺼져가듯 깜빡이는 푸른 빛이 희미했다.
급히 뜀박질로 들어선 원탁에는 그가 쓰러져 있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불규칙한 심장박동과 탁한 빛.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분노의 빛까지..
원탁의 중앙에서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향하는 발걸음이 떨려왔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이윽고 곁에 있는 나를 보고서는 미소지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제가 볼 줄도 아셨겠군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의 차원을 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무한한 시간.. 항상 내 곁을 지켜주던 건 너였다, 프리우나."
그는 당연하게도 내가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사실 누구보다도 거절하고 싶었음에도.
"미안하구나."
"대책 없이 밝은 건.. 오백년이 지나도 여전하군요."
"프리우나..?"
처음과 같이 항상, 사랑스러운 붉은 빛은 오히려 나를 염려하는 듯이 상냥하고 밝았다.
오백년 전, 느꼈었던 포근함에 마음이 아려왔다. 운명이 다가오고 있구나.
"원탁으로 오세요. 저는 그저 라우리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것 뿐입니다. 그럼 이만.."
흘긋, 옆에 있는 자가 바로 그 선택받은 자인 모양이었다. 한낱 OO이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부정해왔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선명한 색깔이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황금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균형의 감시탑은 그 어떤 균열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시리게 차가웠다.
"뒤를 부탁한다. 프리우나."
"...네. 당신의 뜻대로."
내 착각이었을까? 그의 푸른 빛이 잠시나마 망설이듯 깜빡이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멀어지는 푸른 빛과 따스함.
저 멀리에서 적란운의 불길한 빛의 소용돌이와 함께 하늘고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당신의 뜻이 곧 나의 뜻입니다. 라우리엘님.
"프리우나! 더 이상 우릴 막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제발.."
"..저는 라제니스의 검. 엘가시아를 지킬 것입니다."
붉은 빛이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 휘몰아쳤다. 이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마음이 느껴져 입술을 질끈 씹었다.
이들을 막으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규율의 감시자로써 부여된 힘은 어떠한 경우에도 섭리를 어긋나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나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이미 운명은 틀린 것일지니.
굉음과 함께 규율의 원판이 무너져 내린다.
찰나였다. 수백 수천년의 무게를 짊어진 그의 피로함을 생각했고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틈을 선택받은 자는 놓치지 않았다.
"잔인한 신이시여.."
기어코 제 마지막 소망마저 무너트리는군요.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멀어지는 붉은 빛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차가운 암흑으로 잠길것이지만..
"라우리엘 님, 당신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갈라진 가면의 틈새로 푸른 하늘을 보았다. 수 없이 많은 시간 나를 지켜봐왔을 그 하늘이었다.
"흐윽....."
희미한 온기가 손끝에 감겨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강렬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반전되었다.
차갑고 딱딱한 회색빛의 세상이 따스한 온기로 가득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라우리엘 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질서의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감시탑과 균형의 계단, 그 어디에서도 푸른 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프로키온 신께서 기적을 일으켰고, 라우리엘님의 희생으로 미래는 비틀어졌을 것이다. 수 천, 수 만번 봐왔던 단 하나의 운명이었다.
라우리엘님의 큐브는 그 곳에서 결말을 맞이했겠지만..
수 천, 수 만번을 봐왔음에도 익숙해질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신전의 중앙에 다 타버린 모양새로 꺾여진 날개와 함께 쓰러져 있었고, 나는 그를 향해 기어가는 것이었다.
규율의 감시자로써, 나는 큐브의 권한을 이어받아 나의 운명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힘이 다 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극히 적었기에, 오직 그의 최후를 바라보는 것만이 나의 마지막 운명이었을 것이지만,
티엔의 서고, 오래된 스크롤에서 보았던 금기의 주술.
나는 무너져가는 마지막 힘을 모아 품에서 꺼내 든 스크롤을 찢어내었다.
술자의 생명력으로 대상을 봉인하는 금기의 스크롤은 어째서인지 단 하나가 남아있었다.
가면 없이 그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꿈꿔왔는데. 마주하는 그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내가, 이루어질거라고 했죠?"
그의 뜻이 곧 나의 뜻.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오랫동안 그려 온 이 순간, 나의 의지로 그를 구원할 것이다. 부디.
"예쁜 꿈 꾸시기를...."
내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의 품에 쓰러지듯이 기대었다. 눈부신 하얀 빛이 새장처럼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을 지켜보며 눈을 감았다.
나는 하얀 빛이었구나,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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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dreams my dear을 듣고 프리우나 입장으로 해석해봤음 사연있는 악역이 좋아
+라우리엘 재등장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