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펫 만들다가 심심해서 쓰게 된 이야기임을 사전에 알립니다.
이 이야기는 래드 쉽이 불꽃 쉽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루테란에서 어느 작은 마을, 노을이 아름다운 이 마을에는 이름 모를 농부의 말인 래드 쉽이 있었다. 금발이 잘 어울리던 그는 마을의 제일가는 훈마로 루테란성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어린 실리안은 그가 궁금하여 루테란을 졸라 구경가자고 했다. 며칠이 지나고 갈대밭이 붉게 물들어 온 세상이 황혼의 품에 감싸질 때, 실리안이 마을에 도착했다. 래드 쉽은 그가 온 지도 모르고 마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실리안은 저 멀리 래드 쉽을 보자마자 기쁜 마음에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그는 순간의 속도에 못이겨 앞발을 높이 들어 멈춰보려고 했다. 간신히 실리안 눈 앞에서 멈춘 그는 실리안을 피해 조심스레 옆으로 앞발을 내려놨다. 실리안도 그의 배려를 느꼈는지, 감사 인사로 콧등에 손을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것이 그와 실리안의 첫 만남이었다.
루테란은 며칠간 래드 쉽과 실리안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농부에게 부탁했다. 농부는 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실리안의 간절한 눈빛에 흔쾌히 허락했다. 루테란은 소정의 골드를 농부에게 지급하려 했지만, 농부는 인자한 얼굴을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실리안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경비원을 배치해달라고 부탁했다. 루테란은 이를 받아드리고 이곳에 머물며 그간 마을의 실태 조사를 하기로 했다. 실리안과 래드 쉽은 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노을이 비치는 날이든 비가 내리는 날이든 언제나 함께하며 우정을 이어갔다. 때때로 실리안이 래드 쉽과 함께 마구간에서 잔다고 때를 쓰다가 다음 날 래드 쉽과 같이 감기에 걸리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러 루테란이 성으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실리안은 아쉬움에 발길을 때기가 무거웠다. 이렇게 정든 말은 처음이었고 그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래드 쉽의 가치는 황금빛 노을이 아름답게 비치는 이 마을에 있을 때 더욱 빛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리안은 울먹이며 눈물을 감추려고 애썼다. 래드 쉽은 실리안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얼굴을 가까이 다가가 실리안의 얼굴에 비볐다. 그가 친구로 인정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실리안은 슬펐지만, 빙그레 웃으며 그의 콧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서로의 콧등을 비비며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성인 말이 되었을 무렵, 루테란에 악마들이 쳐들어왔다. 그가 살던 마을도 악마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탔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가 사랑하던 주인과 마구간을 읽은 래드 쉽은 복수심에 정차 없이 달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악마들을 발로 짓밟았다. 아침과 밤의 구분이... 그는 달렸다. 그의 자랑이었던 금빛털은 어느샌가 악마의 피로 붉게 물들어 불길처럼 치솟았고 그 모습을 본 수많은 모험가는 그의 이름을 불꽃 쉽이라 불렀다. 실리안도 모험가도 최선을 다해 루테란에서 악마들이 무찔렀고 슈헤리트가 실리안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며 루테란은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불꽃 쉽도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 다시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노을이 아름답던 마을은 이제 없다. 모든 것이 황폐해졌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모든 것이 사라졌고 그곳에는 그만 남아있었다. 공허함과 허무함, 잊을 수 없었던 무기력했던 자신과 공포와 혐오의 감정들이 그를 매일 밤 찾아와 잠들 수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괴로움에 그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고향을 떠난다면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갈기파도 항구에 도착한 그는 움직이는 큰 나무를 보았다. 그건 나무였기도 했고 철로 된 무언가였다. 증기를 배출하며 큰 소리를 냈다. 불꽃 쉽은 그 커다란 무언가가 곧 떠날 것을 직감하고는 문이 닫히기 전 뛰어올라 배에 승선했다. 그 배는 아르데타인으로 가는 배였다. 비교적 다른 말들에 비해 크기가 작았던 불꽃 쉽은 사람들 몰래 화물칸에 숨어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직감하며 주변을 살핀 뒤, 배 밖으로 나왔다. 갈색 모래 알갱이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루테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철 구조물과 황폐하기만 한 이 도시의 풍경.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으며 사람들이 많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갔다. 때때로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사냥하며 배를 채우고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물건들을 등에 차곡차곡 쌓았다.
눈 앞이 침침해지고 발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말발굽도 헐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멈출 순 없었지만, 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눈이 점점 감겼다. 여기까지인걸까. 여기가 내 마지막 자리인 것 같다. 체념하고 멈춰서 침착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모래폭풍 너머로 거대한 성체 같은 게 보였다. 전기가 투명한 관을 따라 번쩍이는 남색의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슈테른이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그 무렵 슈테른의 서부 최전방, 경비원들은 레이더에 무언가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신호를 받았다. 전투태세를 강화하고 아드레날린을 투약할 준비을 했다. 뿌연 먼지 사이로 불꽃이 일렁이는 몬스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감은 최고조에 다다르고 모두가 숨을 죽일 때 전방 100m쯤 불꽃의 몬스터는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시야에 들어온 그것은 아르데타인에서 볼 수 없는 말이었다. 불꽃 쉽은 실리안이 했었던 것처럼 경계하지 않도록 최대한 편한 걸음과 표정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다다갔다. 고개를 숙여 몸을 낮춘 그를 본 경비원들은 안심하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이윽고 상관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얀색 가운에 살색 스타킹, 가슴이 풍만하고 눈과 머리색이 빨간 아름다운 여자였다. 동물 인간화 개조 연구자였던 애쉬였다. 인류의 발전이라고는 하나, 비인간적이라고 느낀 몇 학자들의 반대에 의해 사샤가 어쩔 수 없이 슈테른의 외곽지역에 있는 경비 시설로 좌천시킨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불꽃 쉽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자신을 도와줄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등 뒤에 있던 물건들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속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속삭였다. 경비원들은 푸드덕 되는 그의 말을 당연히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옛날 실리안이 했던 것처럼 그의 코등을 쓰다듬었다. 먼 길을 쉴새 없이 걷던 그는 그녀의 따듯한 손길에 안심이 되어 곧바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