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조가 시청에서 블랙윙을 상대하기 시작할 무렵, 공격조 또한 레벤 광산 인근 언덕에서 그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무전을 통해 방어조의 소식을 접한 헬레나가 카이린에게 이를 알렸고, 곧 레벤 광산 돌입 준비가 시작되었다. 카이린의 저격 신호와 함께 광산 입구의 문지기들이 신속하게 제압되자, 공격조는 즉시 광산 안으로 진입했다.
공격조가 진입하자 그 앞에는 길다란 통로가 있었고, 그곳에는 토끼 형상의 블랙윙 경비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우왓, 이거 완전 덩치 큰 토끼들이네."
경비병들을 본 론도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열의 모험가들과 아론, 테스가 전투 자세를 잡고 돌격하려던 순간, 카이린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길은 내가 뚫어줄 테니, 너희들은 방해 안 되게 물러서 있어."
카이린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양손에 쥔 총을 정면으로 겨눴다.
"래피드 파이어!"
퍼버버벙—!
그녀의 외침과 함께 총구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총알이 빗발쳤다.
매 발사마다 대포 터지는 소리가 울렸고, 그 위력에 좁은 통로는 화약 연기와 먼지로 자욱해졌고 순간적으로 양측의 시야가 모두 가려졌다.
"콜록, 콜록… 으, 눈 따가워!"
"이러다 적이 다가와도 몰라보게 생겼구만…"
전열에서 화약을 뒤집어쓴 테스와 아론이 투덜대자, 카이린은 코웃음을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훗, 이걸 맞고도 멀쩡하면 내 모자를 주마."
그녀 말대로 연기가 걷히자 통로에는 쓰러진 적들만 남아 있었다.
카이린은 위풍당당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가고, 다른 모험가들과 아리 일행도 그녀를 따라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간간이 적들이 나타났지만, 카이린의 총탄 앞에 모두 쓰러졌다.
그들은 넓은 홀에 도착했고, 론도가 앞장서서 이전에 찾았던 바로크의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저기예요! 저쪽 방에 봉인석이 있어요!."
론도가 문을 열려고 다가가자, 다른 모험가들도 그의 뒤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낀 카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흠… 이거 쉽게 보내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모험가들이 뒤를 돌아보자, 수많은 경비 로봇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들은 에델슈타인에서 본 순찰 로봇보다 훨씬 거대했고,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헬레나가 앞으로 나섰다.
"여긴 저와 상급 모험가들이 막겠습니다. 카이린 님은 아리 씨와 파티원을 이끌고 봉인석을 찾아와 주세요!"
헬레나의 말에 카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론도를 돌아봤다.
"들었지? 얼른 문 따, 도적 친구."
"거, 거의 다 했어요!"
얼마 뒤, 론도가 문을 열자마자 카이린과 아리 일행은 서둘러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전처럼 길게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론도가 앞장서서 안내하려 하자, 카이린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세웠다.
"이봐, 어디를 그렇게 막 걸어가? 함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 안 해?"
"전에 왔을 땐 함정 같은 거 없었어요! 게다가 저희 지금 시간 없는거 아니에요?"
"흠, 함정이 없다고?"
카이린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 여러 개를 꺼내 통로 바닥으로 굴렸다.
구슬이 바닥을 구르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잠시 뒤 양 벽에서 총신이 튀어나와 구슬이 지나간 자리를 향해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그 모습에 론도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어째서…? 분명 저번엔…"
"그때는 일부러 길을 열어줬을 수도 있지."
카이린의 말에 아리 일행은 서둘러 봉인석이 있는 방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함정을 하나하나 피하며 전진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카이린은 손을 턱에 가져다대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성큼성큼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위, 위험해요! 카이린 님!"
올리비아가 만류했지만, 카이린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시간 없으니 터프하게 가보자고, 잘 따라와야 한다?"
그녀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벽에서 총신이 튀어나와 카이린을 겨누었지만, 총알이 발사되기도 전에 카이린이 먼저 사격으로 총신을 망가뜨렸다.
그녀는 마치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는 듯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고, 그 모습에 아리와 파티원들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미친… 저게 사람이냐?"
"저게 최상위의 모험가라는 사람들인가.."
론도가 중얼거리자 테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던 아리네를 향해 복도 끝에서 카이린이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멍하니 구경만 할 거냐?!"
"가, 가자 얘들아!"
아론의 재촉에 따라 파티원들도 재빨리 전진했다. 그들이 서둘러 달려가자 카이린은 이미 복도 끝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카이린은 그저 문 앞에서 가만히 선채로 방 안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파티원들이 의문을 가지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카이린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말로 이 방안에 봉인석이 있던거냐?"
카이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론도도 그 방의 풍경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분명 이전에는 단촐하긴 했어도, 책상과 책장, 그리고 봉인석을 보관해 두었던 제단까지 있었는데, 그들의 눈 앞에는 그런 물건은 커녕 방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동굴의 벽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론도와 아리는 그 풍경에 할 말을 잃고말았다.
"아무래도 저번에 너희가 봤다던 봉인석은 바로크의 환술인게 분명하겠군."
카이린의 말에 슈가가 당황한 듯 물었다.
"그, 그럼 봉인석은 어디에 있는걸까요?"
“더 깊은 곳에 숨겨놨겠지. 우선 밖으로 나가 헬레나에게 이 사실부터 알려야 하겠군. 빨리 움직이자.”
카이린은 파티원들을 이끌고 통로를 따라 재빨리 밖으로 되돌아갔다.
밖에서는 헬레나가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한 뒤, 남은 경비 로봇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카이린이 나오자 헬레나가 다가와 물었다.
“봉인석은 찾으셨나요?”
“이들이 봤다는 건 환술이었던거 같습니다. 아마 봉인석은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겠죠."
카이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런…”
바로 그때, 금빛의 긴 머리칼을 한 여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 봉인석이라는 게, 혹시 보라색 보석 맞나요?”
"응? 누구?"
카이린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자, 헬레나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이 분은 가브리엘 씨예요. 알베르트 의회장님의 따님인데, 저희가 감옥에서 구출했습니다.”
헬레나 또한 가브리엘에게 방금 언급한 ‘봉인석’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가브리엘양, 방금 봉인석에 대한걸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네. 보라색 보석 이라면, 전에 블랙윙 간부들이 갤리메르의 연구실로 옮긴다고 말하는 걸 본 적 있어요.”
“갤리메르의 연구실이라… 어디죠?”
카이린이 묻자, 가브리엘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답했다.
“이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나와요. 사실 레벤 광산이 외길이라, 다른 갈림길은 없거든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이린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작전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조를 나누도록 하지, 나와 여기 초보 모험가 친구들은 갤리메르의 연구실로 향하겠다. 그리고 헬레나님과 나머지 모험가들은 이 곳에 남아 다른 인질들의 구출을 돕도록 "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사람들은 분주히 흩어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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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갤리메르의 연구실
“갤리메르 님, 놈들을 함정이 있던 곳으로 유인했지만, 피해는 없는 듯합니다.”
바로크의 보고에 갤리메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흠, 역시 그 정도 함정으로는 안 되는 건가.”
“또 하나, 놈들이 이쪽으로 전진해온다고 합니다.
정보에 따르면 카이린과 모험가 여섯 명이라고 합니다.”
갤리메르는 낄낄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년에게 흘린 정보를 들었나 보군 좋아 좋아, 계획대로 진행이 되는군.”
바로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저, 그런데 어째서 그걸 알려주신거죠? 알려주지 않았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 필요한 기술과 자원은 이미 모두 확보했다. 봉인석에 대한 연구도, 그리고…”
갤리메르는 연구실 한쪽에 있는 거대한 유리관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고, 갤리메르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이 꼬마에 대한 연구도 말이다.
이제 이 공간도 필요 없어. 여길 정리해버리면 귀찮은 벌레들이 한동안 꼬이지 않겠지. 하지만..."
“놈들도 내게서 소중한 걸 빼앗아 갔으니, 나도 놈들의 소중한 걸 하나 가져가야 균형이 맞는 법이지.
엘레오노르와 이베흐한테는 연락이 왔느냐?”
“네, 조금 전 에레브 인근 상공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끌끌, 그래. 그러면 몽땅 불태워 버리라고 전해.
난 마무리할 게 좀 남았으니.”
“네, 알겠습니다.”
바로크는 갤리메르에게 예를 갖추고 방을 나섰다.
연구실 한복판에서, 갤리메르는 유리관 안에 잠든 소년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 연구가 완성될 것 이다, 끌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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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슈타인 시청 앞 광장 - 방어조
(시그너스 기사단 & 레지스탕스)
정체를 드러낸 호크아이를 필두로, 시그너스 기사단의 이카르트, 오즈, 이리나와 함께 레지스탕스 단원들은 시청 주변에 포진한 순찰 로봇과 블랙윙 잔당들을 하나둘씩 제압해 나갔다.
“여러분, 저희 단원의 안내에 따라 시청 안으로 대피하세요!”
지그문트의 지시에 따라, 시청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한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알베르트 또한 시청 내부에서 이들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지그문트! 사람들 대피가 모두 끝났어!”
벨이 소식을 전하자, 기사단과 레지스탕스 병력이 일제히 적을 밀어내며 전진했다.
“시청에서 최대한 떨어져야 합니다! 적의 사거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몰아내세요!”
지그문트의 명령에 따라 이들은 적진을 밀어냈다. 애초부터 에델슈타인에 남은 블랙윙은 주로 하급 순찰 로봇이나 비전투원뿐이라, 별다른 저항 없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 자식들… 이러고도 네 놈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
그 모습에 시청 광장 한쪽에서 묶여 있던 바반이 이를 갈며 노려봤다.
“흥, 그런 말 하나도 안 무섭거든?” 호크아이가 코웃음을 치자, 이카르트가 그를 말렸다.
“아직 전투 중이다. 싸움에 집중해, 호크아이.”
“알아, 하지만 여기 놈들은 죄다 허약해 보인단 말이지. 나도 그냥 레벤 광산 쪽을 도와주러 갈 걸 그랬나…”
“후…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이카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반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호크아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이봐, 아저씨.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지금이 웃을 때야? 아니면 미쳐버린 건가?”
“크큭,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네 놈들이다.”
“뭐? 이 아저씨가 뭔 소릴 하는 거야?”
“우리가 너희 작전을 모를 줄 알았나? 이미 엘레오노르 님과 이베흐 님이 너희 기사단 영토에 도착했을 게다!
이제 너희 여제는 끝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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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에레브
"모두 자신의 자리를 지키세요!"
여제의 말에 따라 주변의 기사단원들과 피요족은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무기를 들고, 적이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과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는 블랙윙의 간부 엘레오노르와 이베흐가 선두에 서 있고, 그 뒤로는 여러 소형 비행정들이 줄지어 있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많은 기사단원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지만, 여제와 나인하트는 침묵 속에서 적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제님, 적 선두가 곧 우리 측 사정거리에 들어옵니다.”
나인하트가 조심스레 전했다.
“아직..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합니다."
나인하트의 말에 대답을 한 그녀는 뒤를 돌아 유일하게 남은 기사단장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에델슈타인 지원을 위해 4명의 단장이 나가고, 현재 에레브에는 미하일만이 남아 있었다.
여제는 미하일에게 가볍게 미소 지은 뒤, 다시 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적의 사정거리가 아니에요. 우리의 반격은 적이 공격할 때 부터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인하트 또한 조용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적의 선두였던 엘레오노르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 기사단을 유심히 살폈다.
기사단 측에서 아무런 대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실망한 듯 이베흐에게 물었다.
“이봐, 고작 저런 애송이들 상대하려고 날 부른 거야?”
“갤리메르 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불태우라고 하셨습니다.”
“하… 정말 짜증나는군.”
엘레오노르는 투덜대며, 비행정 선미에서 지팡이를 높이 들어 기사단을 노려봤다.
곧 그녀 앞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진들이 형성되더니, 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얼음 창이 기사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방어진을 전개하라!"
가장 앞에 있던 기사단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방진을 만들었다.
마법사들의 보호 마법과 방패의 결합 속에서, 그들은 엘레오노르의 얼음 창이 쏟아지는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었다.
얼음 창이 부딪힐 때마다, 에레브의 하늘엔 강렬한 파열음이 울렸고, 기사단은 떨리는 근육과 흔들리는 방패를 붙잡고 겨우겨우 버텼다.
"하?"
비록 진심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는 모습을 본 엘레오노르는 한 쪽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 저번과는 다르다, 이거지?"
"그럼 어디 한 번 이것도 막아봐라!"
분노를 표출하는 엘레오노르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하더니, 곧 그곳에서 거대한 화염 덩어리들이 비처럼 쏟아져 에레브를 덮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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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 어쩌라고?”
바반의 말을 들은 호크아이가 콧구멍을 파는 시늉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방금 말했잖아! 엘레오노르 님이랑 이베흐 님이 에레브에 도착했다고!”
바반이 화를 내며 말하자, 호크아이는 하품을 하더니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거기서 걔들이 뭘 할 수 있는데?”
호크아이의 반응에 바반은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검은 마녀’ 엘레오노르 님이라고! 예전에 너희 기사단이 그녀 때문에 레지스탕스 지원도 못 했잖아?
이번엔 기사단장 다섯 중 네 명이나 에델슈타인에 와 있으니, 에레브를 지킬 전력은 없을 거다!
곧 그분이 에레브를 몽땅 불태워 버릴걸!”
씩씩거리며 설명하는 바반을 보던 호크아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이 아저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야, 이카르트, 이거 웃기지 않냐? 푸핫!”
호크아이가 팔꿈치로 이카르트를 툭툭 치며 웃자, 이카르트는 흥미 없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다.
바반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그들을 바라봤고, 호크아이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크큭… 아, 진짜 웃기네.”
호크아이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다가 바반을 노려보았다.
바반이 움찔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좋아, 아저씨. 잘 들어.
우린 시그너스 기사단, 여제님의 방패야. 창이 아니라고.”
“우리가 그날 너희를 뚫지 못했던 건, 너희가 강해서가 아니야.
우리 공격력이 모자라서 그랬을 뿐이지.”
호크아이가 아쉽다는 듯 턱에 손을 올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안타깝게도, 우린 많은 적을 한 번에 쓸어버릴 정도로 강한 공격수가 없어.
그나마 ‘오즈’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애도 오래 싸우긴 힘들단 말이지.”
바반은 이 말을 놓치지 않고 반박하려 들었다.
“결국 너희가 약해서 우릴 못 이긴 거 아니냐? 그런데도 왜 그렇게 여유로운 태도지?”
호크아이는 여전히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저씨, 방금까지 뭘 들은 거야?
우리가 너희를 못 뚫은 건 우리가 방패라서야. 방패가 어떻게 방패를 뚫어? 바보야?”
바반이 씩씩거리며 호크아이를 노려봤지만, 호크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잘 들어, 아저씨. 우리는 방패야. 뚫는 건 못 해도 막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그리고 지금 에레브에 누가 남았는지 알긴 해?”
호크아이는 비장한 눈빛을 띠며 선언했다.
“시그너스 기사단, 아니 메이플 월드 전체를 통틀어, 그분보다 튼튼한 방패가 또 있을까?
찾을 수 있으면 찾아봐.”
말이 끝나자, 바반은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엘레오노르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펼쳤던 마법 공격이 대부분 소멸되거나, 심지어 되돌아와 아군 비행정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내 마법을 튕겨낸 거지…?”
그녀는 기사단을 노려보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때, 한 남자가 기사단 사이를 가르며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를 본 엘레오노르는 이름을 부르며 억눌린 분노를 표출했다.
“미하일…! 감히 네가…!”
“오랜만이군요, 검은 마녀.”
미하일이 엘레오노르를 보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더욱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고작 한 번, 내 공격을 막아냈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난 검은 마녀, 엘레오노르란 말이다!”
“기고만장이라니.. 오히려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뭐…?!”
미하일의 뜻밖의 발언에, 엘레오노르는 잠시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전 습격 땐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제게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엔 덕분에 크게 활약할 수 있게 되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미하일의 도발에 엘레오노르가 다시 마법진을 소환하자, 미하일도 방패를 치켜들며 자신의 무기를 발동시켰다.
“빛의 방패여, 전장을 수호하라.”
그가 방패의 힘을 발동하자, 황금빛 보호막이 에레브와 기사단을 감싸며 거대한 방패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 벅찬 광경에, 엘레오노르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미하일은 작게 미소 지으며 외쳤다.
“시그너스 기사단 제1단장 미하일, 검은 마녀를 뵙습니다.”
“건방진…!”
에레브의 상공에서, 방패와 창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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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 광산- 공격조 <카이린&아리 파티>
광산 내부 깊숙이 진입하자, 이전에 봤던 경비 로봇들보다 훨씬 정교한 형태의 안드로이드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카이린이 앞에서 적들을 제압해주는 사이, 아리와 파티원들도 각자 힘을 합쳐 몰려드는 적들을 해치워 나갔지만, 적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젠장, 이러다 시간만 끌리겠어…”
아론이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은 카이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 전사 친구. 우리에게도 아직 카드가 한 장 남아있으니까.”
“카드…라니요? 그게 뭔데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파티원들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카이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최강의 카드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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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에델슈타인 산책로
에델슈타인 산책로 중 한 구역에는 정체 모를 입구가 있었다.
겉으론 상자들로 가려져 있어,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창고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한 남자가 그곳의 기계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기계 장치가 우르릉거리며 작동하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비밀 통로로 가는 승강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강장에 오른 남자는 지하로 내려가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800년 만에 깨어나자마자 이런 큰 전쟁이라니…
네가 원하던 평화는 언제쯤 찾아올까, 아리아.”
되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던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케인과 모자를 매만지며 몸을 풀었다.
“자, 길을 비켜라, 악당들아."
"괴도 팬텀 님의 등장이시다!”
그 말과 함께, 승강장은 어둠 속 지하를 향해 더욱 깊숙이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