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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도전] [소설]TerA [EP 0. 검은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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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개
조회: 1066
추천: 23
2016-04-19 13:30:18

 

 

 

 

TerA

~ The exiled realm of Arborea ~

 

 

 

 

[ EP 0. 검은 태양 ]

 

 

 

   

#0

      

빛나는 번개가 먹구름 낀 하늘을 찢었다. 그 뒤를 이어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불온한 기운이 먹구름에 섞여 세상을 적셨다.

거센 바람 앞에서 초목은 자신의 싱그러움을 숨겼고 아름답게 지저귀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땅 위에 존재하는 생물들이 어둠을 피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말발굽 소리만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마름모 대열로 늘어서 달리고 있는 열 마리의 군마들은, 발을 구를 때마다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얀 열기가 군마에 탄 기수들을 감싸고 빠르게 식으며 사라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거세게 내리는 비가 그들을 덮쳤다. 강철로 만든 갑주는 빗방울에 맞을 때마다 맑은 소리를 내었다.

덩치 큰 기수들은 정면에서 달려드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다.

위대한 창조주에게서 받은 그들의 몸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태풍이 가져온 비바람은 그들의 신체를 무겁게 만들 수 없었다.

 

우람한 체격과 방대한 지식에 버금가는 지혜를 가진 기수들은 ‘바라카’ 라고 불리는 종족이었다.

대열의 선두에서는 붉은 밤 우른이 달리고 있었다.

군마를 타고 협곡을 빠져나가려는 나머지 다섯 명의 바라카는, 그가 이끄는 남문 경비대의 대원들이었으며

그들의 고향인 이르카를 지키는 전사들이었다. 우른을 비롯한 대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긴박감이 감돌았다.

새하얀 번개의 빛이 또 다시 시야를 감쌌다. 우른의 등에서 거대한 도끼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마치 앞으로 있을 비극을 기대하는 듯 초승달 모양의 도끼날이 차갑게 웃었다.

 

 

*

 

 

괴물들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현세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형상들은

광기어린 비명을 지르며 침입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창과 송곳니, 화살과 뿔, 검과 꼬리가 춤을 추며 서로를 탐했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살덩이와 피가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흐드러졌다.

 

바라카들의 몸은 여기저기에 금이 가 있었지만 그들의 피를 보기 위해서는 더 깊은 상처를 내야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날카로운 손톱이나 가시가 돋은 꼬리를 세 번도 휘두르지 못하고 도륙 당했다.

우른과 그의 부하들은 용맹하고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경비대이면서도 직접 북방의 아크데바족과 싸우며 경험을 쌓아왔다.

조직적이지 못하고 그저 짐승처럼 날뛰는 괴물들은 그들에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쓰러뜨려도 벌레처럼 끊임없이 나타나는 괴물들은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통로에서 나타난 한 마리를 죽이면 바닥의 구멍에서는 두 마리가, 천장의 틈에서는 세 마리가 뛰쳐나왔다.

 

「이 빌어먹을 데모크론 놈들!」

 

은색파도 갈두르가 거친 목소리로 저주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방패가 뒤에서 달려들던 원숭이와 닮은 생물의 정수리를 박살냈다.

뇌수가 하얀 털을 붉게 더럽혔고 등에 돋은 한 쌍의 촉수가 경련을 일으키며 힘없이 늘어졌다.

갈두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푸른 첨탑 에룬이 쌍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그와 등을 맞대었다.

 

「이 놈들, 데모크론이 맞습니까? 뭔가 평소에 상대하던 놈들과는 느낌이 다른데…….」

 

‘데모크론’은 다른 생물들을 고문하거나 억지로 합쳐서 탄생한 괴물들이었다.

아크데바족은 흑마법의 힘을 이용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실험을 거쳐 데모크론을 만들었다.

끔찍한 고문과 탄생과정 때문인지, 일반적인 데모크론은 시체와 같은 푸른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괴물들은 새하얀 털에 덮여있었고 괴물이 되기 전의 모습을 꽤 많이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데모크론들과는 또 다른, 광기에 가까운 기운이 눈에 서려 있었다.

맹목적인 살육의 충동이 온몸의 근육을 통해 요동쳤다.

 

「잡소리 할 여유가 있으면 한 마리라도 더 줄이도록 노력하게!」

 

갈두르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돌진하는 창 앞에서 짐승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밀려오는 살의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승기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괴물들이 나타나는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갈두르는 우른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슬슬 앞으로 전진해도 괜찮지 않을까 제안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갈두르는 우른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결정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우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방의 거대한 통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통로 저편에서 거대한 울림과 미세한 진동이 벽과 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린내와 불길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횃불 하나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통로였지만 거대한 존재감이 다른 감각을 통해 느껴졌다.

 

곧 그것은 모습을 드러냈다.

상체에 달린 두 쌍의 거대한 팔은 세 개의 관절을 가지고 있었다.

네 개의 손은 손가락이 여섯 개였고 손톱은 사마귀의 갈고리처럼 가시가 빽빽이 돋아 있었다.

하체는 말과 흡사했는데 발굽이 있어야 할 곳이 예리한 송곳처럼 뾰족하다는 점이 달랐다.

얼굴은 휴먼처럼 생겼으나 안구 대신 각각 크기가 다른 날개가 돋아 펄럭거렸다.

 

무엇보다도 그 크기, 통로의 입구보다도 거대한 몸은 새하얀 괴물을 더욱더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거대한 괴물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피부보다도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흘리는 모습에 다른 괴물들도 겁을 먹은 듯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거대한 괴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괴성을 질렀다.

마치 여러 사람이 극심한 고통에 빠졌을 때 내는 목소리 같았다.

 

규가 방을 뒤흔들자 벽돌 사이사이에 묵은 먼지들이 떨어져 나왔다.

흙먼지가 얕게 바닥에 깔렸을 때 다른 괴물들은 정신없이 그들이 나타났던 곳으로 도망쳤다.

거대한 괴물은 미처 벗어나지 못한 괴물 몇 마리를 손으로 낚아 채 통째로 씹어 먹었다.

뼈가 부서지고 가죽과 살이 터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갈두르, 헤톤.」

 

소름끼치는 살육의 만찬에 아연해 있던 갈두르는 우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함께 불린 바위날개 헤톤이 우른의 옆에 섰다.

헤톤은 경비대의 신출내기지만 방패와 창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저돌성만큼은 갈두르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뚫고 간다.」

 

「협공해서 확실하게 쓰러뜨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 몇 놈 더 있는 것 같다. 일일이 다 상대하기에는 시간이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지원을 기다리지요. 함부로 덤볐다가는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너무 늦어. 지금은 도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해.」

 

우른은 그의 도끼를 고쳐 쥐었다. 거대한 도끼날이 괴물을 향해 기울었다. 남은 일행들이 그의 뒤로 모였다.

 

「갈두르가 우측, 헤톤이 좌측에 서라. 삼각진(三角陳)으로 간다.」

 

갈두르와 헤톤은 각각 우른의 오른쪽, 왼쪽에 나란히 섰다.

거대한 방패가 그들의 몸을 가렸고 그 너머로 창끝이 전방을 향해 뻗어 나왔다.

도끼와 두 창은 마치 고룡(古龍)의 뿔처럼 삼각형을 그리며 적을 위협했다.

 

식사를 끝마친 괴물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듯 천천히 몸을 부풀리며 앞다리를 낮췄다.

동시에 뒷다리의 근육이 팽팽해지면서 철근 같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먹잇감을 전속력으로 덮치기 직전의 맹수 같은 자세였다.

바라카들과 괴수 사이에는 미세한 호흡, 꿈틀거리는 움직임, 오고가는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오린의 빛으로…….」

 

우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을 찬양했다. 자신의 손으로 사지에 끌어들인 부하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들은 지원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인물이 괴수의 뒤, 어두운 복도 끝 어딘가에 있었다.

자신만의 힘으로는 그곳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 다른 이의 생명을 저울질 할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두려워했다. 두려워했으나 그들도 선택했다.

그들의 대장을 믿기로 했다. 믿음의 뒤에는 전진만이 남아있었다.

이윽고 발이 움직였다. 단단한 돌바닥을 받침대로 삼아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몸을 날렸다.

곧 충돌이 있을 예정이었다.

뚫거나, 뚫리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

 

 

칠흑 같은 밤을 온 몸에 두른 듯 몸은 검게 빛났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 하나 하나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우아했고 두 눈은 태양을 담은 듯 황금빛을 띠었다.

그러나 인자한 미소 속에는, 창조주의 위광을 잃고 필멸자들의 탐욕으로 더럽혀진 세계,

모든 것이 존재의 의미를 잃고 열등해진 세계를 향한 조롱과 혐오만이 가득했다.

 

한때 가장 지혜로운 자로 칭송받았던 시안은 고통에 신음하는 옛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시련에도 물러설 줄 모르던 불굴의 전사, 또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줬던 동료가

배신감에 휩싸여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은 그에게 예상치 못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배신의 순간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때였던 것이다.

지배욕과 소유욕. 그 둘은 시안의 일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본성과도 같았다.

 

시안의 머리 위에는 기이한 구체가 떠 있었다.

구체는 심연의 구멍처럼 새카맸지만, 동시에 강렬한 빛을 뿜으며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구체는 위 아래로 길고 뾰족한 기둥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고

양 옆으로 각각 7개의 커다란 시험관이 늘어서 있었다.

 

「결국은,」

 

시안은 허리를 굽혀 우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우른은 반쯤 망가진 도끼에 기대어 겨우 서 있었다.

갑옷은 찌그러져 있었고 여기저기 찢겨져 흉측한 요철을 드러냈다.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 속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흘러나왔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도 그저 사람일 뿐이었군 그래.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어리석은. 」

 

「반대로 네놈은 괴물일 뿐이지. 이 저주받을 실험실에 있는 어느 괴물보다도 가장 흉측하고 사악한 괴물!」

 

「이 이상 날 실망시키는 언동은 그만둬주겠나? 이래 뵈도 나는 자네가 나의 유일한 동반자라고,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우른은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그의 몸은 사자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시안의 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시안은 수많은 죄 없는 생명들을 납치하여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괴물로 만들었다.

잔인하게 고문당한 영혼들은 안식을 찾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길을 잃은 분노와 슬픔은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고 희생자가 희생자를 만드는 비극이 일어났다.

 

‘동반자’. 고난의 때에도, 행복의 때에도 서로를 의지하고 믿으며 살아가는 자.

또한 서로 다른 생의 가치관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소중한 존재.

우른은 눈앞의 바라카가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참하게도, 그의 분노는 바닥에 팽개쳐졌다.

천장에 숨어있던 한 마리의 괴물이 우른의 몸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도마뱀같이 생긴 괴물은 앞발과 뒷발을 쭉 펼쳐 우른의 양 팔과 양 다리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단단한 육체를 파고들어오자 우른은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않고 자신을 비웃으며 내려다보는 시안에게 침을 뱉었다.

피가 스며들어 다홍색을 띄는 타액이 시안의 발치를 더럽혔다.

 

「이것이……. 이 따위 것이 네놈이 말한 구원이냐, 시안! 죄 없는 생명들을 학살하고 네 멋대로 주물러 끔찍한 괴물로 만드는 것이!」

 

「과정과 결과에 있어, 다소 실패한 것은 인정하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난해도 좋아. 하지만 아까부터 그 ‘괴물’이라는 말이 정말 거슬리는군.

그 누구에게도 자네와, 자네의 용맹한 전사들이 썰고, 베고, 찌르고, 박살낸 이들을 감히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네. 그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운이 없었다고! 그딴 단순한 말로 얼버무리려 하는 거냐!」

 

「누구나 완벽한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거야……. 그렇지 않나? 그러나 불완전한 우리들 피조물들이 감히 그런 차원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었다면, 내 연구는 생각할 가치도 없었겠지. 그렇기에 운이 필요하다네.

‘세상에서 가장 밝은 길은 절벽 아래에 있나니.’ 세계에 깨우침을 주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 이들을 폄하하지 말게. 비록 운이 없어 흉측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한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의 증거. 오히려 신상을(神像) 세워 찬양받아도 모자라단 말일세.」

 

「오린의 가르침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마라……. 그 분께서 내려주신 지혜는 살인을 포장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야! 네놈이 하는 말들은 어설픈 사탕발림에 불과해! 원하지 않게 끌려와 원하지 않게 희생된 것이 어디가 숭고하다는 말이냐!」

 

시안에게 노성을 토할수록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우른의 몸은 점점 격하게 들썩였다.

그럴수록 그를 짓누르고 있는 괴물은 몸을 고정시키기에 힘에 겨운 듯했다.

이제 우른의 마음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슬픔과 절망도 자리잡아갔다.

안의 앞에 서기 위해 그는 동료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달려왔다.

동료들의 희생이야말로 진정 숭고한 희생이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가.

희대의 살인마가 제멋대로 지껄여대는데도 자신은 그의 입을 틀어막지도 못하고

무기력한 반박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지혜로운 척, 고고한 척 하고 있지만 결국 네가 한 짓은 단순한 살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검은 태양’ 시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일세. 하지만 자네의 무지함 정도야 얼마든지 용서해주지. 본래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 그리고 축하하네. 자네는 새로운 여명의 탄생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유일무이한 증인이 되는 거야.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말이야.」

 

시안은 발버둥치는 우른에게서 등을 돌려 검은 구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양 팔을 서서히 들어 올리자 구체에서 수많은 빛이 시험관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불덩어리 같기도 하고 별빛 같기도 한 빛의 덩어리들은 7개의 시험관을 가득 채워갔다.

 

「……새로운 시대에 온 것을 환영하네. 붉은 밤 우른.」

 

순간 우른의 몸이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해방된 팔다리는 깨진 도끼날을 낚아채고는 그를 구속하고 있던 하얀 괴물의 목을 몸통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혀를 길게 뺀 머리통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뒤돌아 있는 시안을 향해 날아갔다.

 

우른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7개의 시험관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중에 떠 있는 검은색 구체가

그것들을 채우고 나면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했던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이라고.

만약 시안이 말하는 새로운 시대가 지금까지의 세계를 부정하는 시대라면

시험관 안에 있는 것은 그 결과물.

그렇다면 그 존재는 ‘괴물’이라기보다는 ‘절망’이나 ‘최후’에 가까울 것이었다.

 

도끼날은 섬뜩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목표를 향해 둥근 궤적을 그렸다.

지나간 자리에 초승달 모양의 잔영이 남는 듯했다.

시안의 목덜미는 마치 산맥 끝에 펼쳐진 지평선처럼 멀게 느껴졌으나

실제로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빠르게 하고 우른은 자신의 팔을 재촉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복부에 느껴지는 새로운 통증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충격파 같은 것이 공중에서 우른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시안은 그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그의 웃음은 지금까지 우른이 본 어떤 웃음보다도 잔인해보였다.

멀리 날아갈 것 같던 육중한 몸은 공중에 고정된 채 떠 있었다.

내장을 다친 듯, 우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미 늦었어, 우른! 완전한 세계로 가는 문은 열렸다! 우리는 드디어, 살아있을 뿐인 기계에서 진화한 거다! 너의 그 작달막한 머리로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지금이야말로 피조물들이 창조주가 정한 운명의 속박을 뛰어넘는 순간이란 말이다!」

 

시안의 얼굴은 광기로 인해 점점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바위 같은 바라카의 안면에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그는 흥분한 상태였다.

숙명을 다 바친 연구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가장 친애하던 벗이면서

동시에 그를 막을 유일한 적인 우른이 너덜너덜해진 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던 것이다.

 

가학성이 고개를 들자 시안은 가볍게 몸을 떨며 양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우른은 무언가에 목을 잡힌 듯 숨이 막힌 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시안을 더욱 흥분시켰다.

 

「가만히 있어……. 그대로 잠들어라…….」

 

우른은 시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목 주변을 필사적으로 더듬거렸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듯 들려왔다.

그는 확실히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우른이 느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과 원통함이었다.

먼저 떠난 부하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미치광이 살인마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한을 풀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런 모습으로 최후를 맞고 싶진 않았다. 그의 임무는 이르카를 지키는 것.

동족들을 지키다가 명예롭게 죽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의무이자 소원이었다.

 

이 세상과 그를 연결하는 마지막 실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오린에게 기도했다. 부디 자신의 영혼을 인도해 달라고.

그리고 죽어간 이들이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굽어 살펴달라고.

또 다시 저 멀리서 굉음과 함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중을 나온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검은 구체가 전격을 뿜으며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일삼았다.

천장과 벽을 부수면서 배관이 드러났고 여기저기에 숨어있던 괴물들을 불태웠다.

구체 자체도 커졌다 작아졌다를 미친 듯이 반복하며 충격파를 지속적으로 내뿜었다.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구체는 폭주하고 있었다.

7개의 시험관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과도하게 힘을 주입받은 듯 심하게 금이 가, 터질 것 같이 진동했다.

 

흔들리는 것은 시험관뿐만이 아니었다.

건물 전체가, 나아가 주변 지형 자체가 폭주하는 힘에 의해 극심하게 진동했다.

당황한 시안은 우른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황급히 구체를 향해 달려갔다.

숨이 돌아온 우른은 피거품을 뿜으며 숨을 헐떡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있는 힘껏 의식을 다잡았다.

 

우른과 시안은 거의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렸다.

검은 구체가 작아졌을 때 그 중심에 박힌 쇠붙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에게 붙잡히기 직전, 우른의 신체는 그가 시안에게 닿을 수 없음을 느꼈다.

그것은 전사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른의 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우른은 가장 눈에 띄는 물체에 도끼를 던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시안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안 돼……. 안 돼! 멈출 수가 없어!」

 

시안은 구체 바로 아래에 있는 계기판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구체에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계기판은 불똥을 튀기며 폭발했고 그와 동시에 시안도 뒤로 자빠졌다.

이제 구체는 팽창 할 때마다 두 배씩 커졌고 수축할 때마다 두 배씩 작아졌다.

우른은 자신의 몸을 가만히 살폈다.

팔 다리는 힘이 없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몸 전체를 움직여서 조금씩 기어 다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움푹 팬 구멍에 기어들어가 몸을 숨기려고 했다.

 

별안간 불덩이가 우른의 얼굴을 스치고 벽에 부딪쳐 폭발했다.

시안의 황금색 눈이 우른에게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이, 이 쥐새끼가 감히! 감히 내 연구를! 숙원을!」

 

그는 다리를 다친 듯 바닥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미친 듯 팔다리를 놀려 우른에게 기어오는 모습은 우른에게 없는 닭살마저도 일어나게 했다.

우른은 검은 구체와 시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구체는 집채만큼 커졌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구체와 닿은 물체는 흔적도 없이 재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최후가 멀지 않은 듯했다.

 

우른은 기다렸다.

자신도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기다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시안이 그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우른의 발목을 잡으려고 버둥거리는 손아귀는 길 잃은 망령을 낚아채려는 악마의 갈퀴와도 같아보였다.

어느 새 검은 구체의 비명이 멎은 것 같았다.

정적 속에서 시안의 저주가 메아리쳤다.

 

「네놈을 산채로 불태워 버리겠다!」

 

시안의 손이 우른의 발목을 잡아채려함과 동시에 우른은 구멍을 향해 힘껏 굴렀다.

시안의 손은 허공을 가르고 우른의 몸은 구멍 속에 숨었다.

시안은 울음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모를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몇 번이고 내리쳤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대지가 갈라지고 그 속에서 하얀 섬광과 뇌전이 솟구쳤다.

하늘에서 배려오는 벼락과 땅에서 승천하는 전격이 부딪쳐 수십 가지로 갈라졌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번개를 맞은 풀과 나무들은 맹렬히 불타올랐다.

초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재해는 거대한 바위기둥을 무너뜨리고 산사태를 일으켰다.

거대한 파괴의 격류가 하늘과 땅을 초토화 시켰다.

종말의 광경은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다.

지진은 멈출 줄 몰랐고 크고 작은 용오름이 곳곳에서 똬리를 틀었다.

 

*

 

 

밤이 찾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고 세상은 잠잠해졌다.

풀벌레의 노랫소리나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폐허의 적막만이 뒤집어진 땅 위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전사들과 괴물들의 격렬한 혈투도, 미치광이 마법사와 배신당한 친구의 대결도

마치 옛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흙과 돌로 덮인 무덤 속에서 불쑥 나타난 하얀 손이 적막함을 쫓아냈다.

소녀의 손처럼 가늘고 부드러워 보이는 손이었다.

달빛에 반사된 피부는 별보다도 창백한 빛을 발했다.

손은 바닥을 짚고 서서히 나머지 부위를 끌어 올렸다.

팔꿈치와 어깨가, 목덜미와 머리가, 가슴과 허리가, 이윽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그것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 몸을 뒤덮는 머리카락 사이로 새하얀 눈동자가 반짝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화폭(畵幅)에는 은하수가 찬란히 흘렀다.

 

그것은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주저앉아 아무 말 없이 별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시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세계는 완전했다.

완전한 세계가 도래해 있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에피소드0 : 검은 태양>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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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테라 세계관을 정리하던 Noire1119 입니다

세계관 마지막 글에서 소설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두 달이 지났네요.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__)

 

소설 TerA는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를 적절하게 재구성하고

오리지널 요소를 도입하여 테라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다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세계관 때 처럼

하루에 두 편씩 올리거나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열심히 재미있게 써보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뵈요!

 

p.s : 일단 팬픽 게시판과 자유게시판 양쪽에 올리고 있는데 다른곳에 어디 또 올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사이트나 게시판 추천받습니당...

 

p.s : 혹시 표지 좀 그려주실분 있으시면 쪽지 던져주세요..ㅠㅠ

Lv41 Noire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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