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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도전] [소설]TerA [EP 1-1. 티아라니아의 아이들]

아이콘 Noire1119
댓글: 11 개
조회: 1103
추천: 17
2016-04-20 22:39:56

 

 

 

 

TerA

~ The exiled realm of Arborea ~

 

글 : noire1119

그림 : 987654 

 

[ EP 1. 티아라니아의 아이들 ]

 

 

 

 

#1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파도소리가 귓가에 부딪쳐 조용히 부서졌다.

정오의 온기는 대지를 따듯하게 감싸, 잔디밭 특유의 향이 아지랑이와 함께 올라왔다.

짙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속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만발한 꽃잎을 흩날리는 것 같았다.

 

유이는 나무 위에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쉽게도 구름은 그녀의 생각만큼 푹신하지는 않았다.

길고 부스스한 군청색 머리카락은 약간 하늘색을 띄며 빛났다.

바람 때문에 계속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웠는지

그녀는 손목에 찬 머리끈을 이용해서 포니테일을 만들었다.

목덜미와 얼굴을 성가시게 굴던 머리카락이 없어지자 유이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천으로 된 반바지와 반팔 옷은 강한 햇빛 때문에 살짝 흘린 땀과 섞여

아주 조금이지만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소매를 쭉 펼치고 상의 아래 부분을 당겨 주름을 없앤 뒤 반바지 역시 비슷하게 옷태를 냈다.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것은 골반 윗부분에서 튀어나온 꼬리였다.

손질이 잘 되지 않은 듯 그녀의 꼬리 역시 머리카락처럼 길고 헝클어진 털에 뒤덮여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꼬리털도 한꺼번에 묶어버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심하게 털이 꼬여버릴 수도 있었다.

푸른 꼬리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듯 땅바닥을 두세 번 정도 탁탁 두드렸다.

하지만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 마음을 안정시켜 준 듯 이내 부드럽게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유이는 자신의 고향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섬의 반복적인 일상도, 매일 아침 마주하는 얼굴들도 그녀에게는 언제나 새로웠다.

티아라니아라는 이름도 그 유래를 알고 나서는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먼 옛날 신들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파괴되어가는 세계를 보면서 여신이 흘린 눈물.

고작 한 방울의 눈물은 씨앗이 되어 바다 속에서 거대한 나무를 잉태했고

그것이 지금 섬의 중앙에 있는 티아란 나무가 되었다.

‘여신의 눈물에서 자란 나무가 있는 섬’

직역하자면 ‘눈물의 섬’

티아라니아.

 

그녀에게 있어 티아란 나무는 신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무수히 많은 가지에서 피어나는 이파리는 일 년 내내 싱그러움을 유지했고

꽃잎은 섬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달콤한 향기를 퍼뜨렸다.

이곳저곳에 뻗은 거대한 뿌리는 나무가 가진 생명력을 대지에 부여했다.

덕분에 작은 섬에 불과한 티아라니아에서는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농작물이 매년 풍년을 이뤘다.

 

뿌리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티아란 나무의 뿌리는 그 크기에 맞게

한 줄기가 몇 십 년 묵은 고목과 비슷한 둘레를 자랑했다.

그런 것들이 수십 갈래가 얽혀 섬의 토양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뿌리에 의해 유지되는 섬의 특징은 유이가 서 있는 ‘큰 뿌리 해안’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었다.

 

큰 뿌리 해안에 퍼져 있는 뿌리줄기는 다른 지역의 뿌리보다 훨씬 굵고 생생했다.

덕분에 대륙에서 건너온 연구자들이 티아란 나무의 표본을 얻기에 제일 용이한 장소였다.

유이는 섬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 그들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한 때 여행자였던 촌장의 말에 따르면 섬에 들어와 있는 외지인들은

‘알레만시아’라고 불리는 거대한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기술력을 가진 ‘미스테리움’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며

티아란 나무와 티아라니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섬으로 들어와 있었다.

 

조금 멀리서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유이를 바라보는 ‘그렌 호크’ 역시

미스테리움에서 파견된 ‘티아란 나무 연구소’의 일원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차분하고 너그러웠지만 연구에 관해서는 엄격하고 선을 확실하게 긋는 성격이었다.

감상에 빠져있던 유이가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슴 한구석이 뜨끔 했던 것도

그렌에게 한 소리를 듣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서였다.

유이는 그렌이 티아란 나무의 표본을 채취하는 것을 돕기 위해 큰 뿌리 해안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유이는 그렌이 그녀의 불성실함에 불만이 있어서 곤란함을 느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키가 작아서 한 번에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두 어린 아이가 그의 발치에 서 있었다.

한 명은 팔짱을 끼고 왠지 모르게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짧고 단정하게 다듬은 금발과 붉은 머리띠 밑으로 뾰족한 귀가 쫑긋 거렸다.

약간 연보라색을 띈 드레스와 붉은 구두는 어른스러움을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즐겨 입을 법한 것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케이시’ 옆에서

붉은 원피스를 입고 양 갈래로 갈색머리를 묶은 ‘아샤’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아샤는 평소에도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았지만

살짝 떨어져 있는데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라면 뭔가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었다.

 

유이는 잠시 그렌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렌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젓자 유이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관련된 일은 언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녀는 스스로 좋은 보모는 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또 티아란 나무를 감상하고 있었던 거냐?」

 

그렌은 짐짓 잔소리를 하듯 유이에게 말을 걸었다.

유이는 그것이 진심으로 주의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건넨 대사임을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던 그렌 역시 아이 돌보기에 조예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티아란 나무의 모습에 눈을 떼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뿌리를 조사하러 나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죄송해요, 아저씨. 다음부터는 주의 할게요.」

 

유이는 그가 던진 화두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렌은 유이가 자신의 의도를 눈치 챘음을 깨닫고 머쓱해졌는지,

시선을 돌리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앞으로는 조금 더 집중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표본은 잘 채취 했니? 뿌리 속살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표피를 채취해야 해. 매일 하는 일이니 어렵진 않았겠지?」

 

유이는 허리춤에 맨 배낭에서 삼각형 시험관 세 개를 꺼내어 그렌에게 건넸다.

시험관 속에는 보라색 용액에 잠겨 녹색 빛을 희미하게 발하는 나무껍질이 대 여섯 개 들어있었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채취해 왔구나! 잘했다.」

 

「손에 익은 일인 걸요.」

 

「그래. 이젠 내가 따로 봐주지 않아도 잘 해오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수호자라는 것이 그저 싸움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란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의 일도 잘 도울 줄 알아야지……. 섬을 수호한다는 것은 땅만 지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킬 때 이뤄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흠, 흠!」

 

‘수호자’의 진정한 역할에 대한 그렌의 일장연설은 별안간 끼어든 높은 음색의 헛기침에 묻혔다.

자신이 바라던 주제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갈 기미가 보이자,

케이시가 입을 샐쭉하게 내밀고 그렌을 째려보았다.

그렌은 케이시와 아샤와 유이를 차례대로 번갈아보다가 허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렇지! 유이, 여기 케이시와 아샤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더구나. 내가 조금 바빠서 살짝 잊어버릴 뻔 했구나. 허허……. ……알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째려보는 것은 그만두지 않겠니? 케이시……. 조금 무섭구나…….」

 

진심으로 절절매는 그렌을 보면서 케이시는 살짝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유이를 향했다.

케이시가 살짝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유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비슷해서 명확하게 연장자가 있다고 볼 순 없었지만

케이시는 특히 다른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그녀가 어리다고 얕보다가 말 빨에 밀려 곤혹을 치룬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유이는 곁눈질로 그렌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이제 완전히 손을 떼고 모든 것을 유이에게 맡긴 듯 양 손바닥을 그녀에게 보였다.

 

「무슨 일이니, 케이시? 아니, 이건 아샤한테 물어보는 게 맞는 건가…….」

 

「마침 말씀 잘 하셨어요. 아샤, 네가 말해. 언제까지고 계속 울기만 하면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는다구. 혹시라도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거야?」

 

「훌쩍……흐응……아, 알았어. 케이시도 화내지 마…….」

 

아샤는 너무 운 나머지 눈 주변과 코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케이시의 다그침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아샤가 훌쩍이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녀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 할 준비를 하는 동안

유이는 아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놀고……있었는, 데……훌쩍……남자 애……들이……흐……막……집어 던, 지고, 막……훌쩍!」

 

「집어던졌다고? 뭘?」

 

「그……곰…흐응…흐……흐흑…흐아아앙!」

 

잘 설명하는가 싶던 아샤는 설움에 북받쳤는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유이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유이는 아샤를 달래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아샤의 울음은 더 서럽고 커져갔다.

일부러 우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유이는 다시 케이시를 바라보았다.

아샤의 설명만 들으면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던 아샤 앞에서 곰을 집어던진 것’이 되었다.

티아라니아에는 야생 곰이 꽤 많이 살고 있어서

유이 역시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의 길을 순찰한 적이 있었다.

종류도 다양해서 개중에는 조금 큰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곰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 아이들이 곰을 집어던지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결국 케이시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가 대신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샤가 해안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남자 아이들이 와서 아샤가 아끼는 곰인형을 빼앗았데요. 달라고 말했는데도 주지도 않고 던지면서 놀렸다고 하네요.」

 

「으아아아아앙!!!」

 

아샤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이 울기 시작했다.

아샤가 탈진할까봐 걱정된 유이는 황급히 달래려 했다.

결국 그녀가 나서서 아샤의 인형을 찾아줘야 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인 듯했다.

 

「괜찮아 아샤. 내가 인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저기……이제 조금 뚝 그치고 남자애들이 인형을 빼앗은 곳으로 가보자. 내가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뚝! 진정하고……. 숨 깊게 쉬고…….」

 

 

*

 

 

니아룽은 아이들 중에서도 제일 작고 어렸다.

케이시가 큰누나 역할이라면 니아룽은 그냥 달리기를 좋아하는 막내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마치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아기 고양이처럼 생긴 니아룽은 ‘포포리’라는 종족이었다.

포포리는 정확하게는 하나의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 고양이, 너구리, 판다 곰 등등 동물처럼 생긴 여러 인종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연합체였다.

물론 섬에서 태어난 니아룽은 이런 연합체와는 별 관련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날씨 좋은 날에 부드러운 풀을 밟으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햇빛에 적당하게 달궈진 잔디가 통통한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좋았고

둥근 자신의 꼬리에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풀밭 위를 달릴 때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따듯한 바람을 즐겼다.

 

그러니까 눈물과 콧물에 범벅이 된 아샤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찌르는 케이시와,

한 명의 수호자에게 둘러 싸여 있는 상황은 니아룽에게 있어 절대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달리기는커녕 손만 까딱해도 케이시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니아룽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히익! 난 아니다냥!」

 

「아직 아무 말도 안했거든? 뭔가 있긴 있네! 바른대로 말해 니아룽!」

 

「케이시, 너무 다그치면 오히려 무서워서 말 못할 거야…….」

 

「으아아앙!! 케이시, 니아룽은 괴롭히지마! 얘는 아무 짓도 안했어!」

 

또 다시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아샤를 보면서 유이는 살짝 속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일단 케이시와 아샤를 진정시키고 니아룽을 타일렀다.

 

「니아룽, 아샤가 아끼는 곰 인형을 남자 아이들에게 빼앗겼데. 그런데 보다시피 아샤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디에서 빼앗겼는지 알 수가 없어. 혹시 제르단이랑 피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

 

「혼날까봐 그러니? 걱정하지 마. 아샤도 방금 전에 니아룽은 괴롭히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어차피 이 섬에서 아이들이라고 하면 너희 다섯 명 뿐이고, 네가 아니라면 일 저지를 사람은 제르단하고 피터 둘 뿐이겠지……. 워낙에 천방지축들이잖니.」

 

「……진짜로 말해도 되는 거냥?」

 

니아룽은 케이시와 유이를 조심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유이에게 혼나는 것보다 케이시에게 혼날 것이 더 걱정스러운 듯했다.

유이는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 뒤 케이시를 돌아보았다.

케이시는 니아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쏘아붙였다.

 

「걱정 마. 아샤가 너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제르단과 피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도 말 안한다면……그 때는 진짜로 각오해!」

 

「흐냐앙!」

 

「자, 니아룽. 케이시는 저렇게 말하지만 정말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 하지만 알고 있다면 그냥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아샤를 봐. 많이 슬퍼하고 있잖니?」

 

「우웅……. 알았다냥……. 근데, 근데 절대로 내가 알려줬다고 하면 안 된다냥! 제르단하고 피터가 날 죽을 때까지 괴롭힐거다 냥…….」

 

「말 안하면 이 자리에서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더, 덤불냥! 피터랑 제르단이 인형을 갖고 놀다가 덤불로 던지는 걸 봤다냥! 그러고 나서 걔네들이 나한테 누가 물어봐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냥. 누가 이 사실을 알면 이번에는 날 덤불 속으로 던져버릴 거라고 했다냥…….」

 

「피터랑 제르단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인형을 덤불에 던지고 나서 마을 쪽으로 갔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냥.」

 

「어느 쪽 덤불에 던졌는지 기억해?」

 

니아룽은 짤막한 손으로 해안 저편에 있는 덤불 더미를 가리켰다.

거의 절벽 끝에 난 덤불들은 너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유이는 케이시와 아샤, 니아룽을 데리고 덤불로 다가갔다.

니아룽은 기억을 더듬어 피터와 제르단이 인형을 던진 덤불을 기억해냈다.

하필이면 그 많은 덤불 중에서도 굉장히 위태로운 곳에 자란 덤불이었다.

유이는 아이들을 기다리게 한 뒤, 조심스럽게 덤불을 살폈다.

덤불 밑동은 반 정도는 절벽에, 반 정도는 해안에 걸쳐져 있는 듯했다.

쉽게 다가갈 수는 없어보였다.

 

그녀는 한 번 가볍게 한숨을 쉰 뒤 오른손을 가슴께 까지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등에 매달려 있는 원반이 서서히 회전하면서 오른손 위로 떠올랐다.

원반은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로, 물체를 들어 올리거나

마력을 추출하기도 하고 방출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유이가 오른손을 뻗자 원반이 덤불로 날아가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시 후 원반을 통해 그녀의 손목에 무언가가 끌려오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유이는 조심스럽게 검지와 중지를 붙인 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었다.

덤불 속에서 작은 물체가 원반을 향해 끌려나왔다.

작은 곰 인형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덤불에서 빼내온 곰인형은 곳곳에 재봉선이 뜯어지고 솜이 삐져나와 있었다.

곰인형은 기본적으로 니아룽과 키가 비슷했는데, 아무래도 그 무게 때문에

날카로운 가지에 걸려 찢어진 듯했다.

오른쪽 귀와 다리, 그리고 배가 큼직하게 갈라져 속살을 드러낸 인형에

아샤는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제르단은 용처럼 생긴 아만족의 아이였다.

그들의 육체는 바위로 이루어진 바라카처럼 단단한 비늘에 덮여 있고

어떤 순간에도 용맹함과 단단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명의 전사로서,

한 명의 어른으로서 성장한 아만의 이야기.

자신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벌어진 일들 앞에서 제르단은 그냥 소년에 불과했다.

곤란한 것은 피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먼족 특유의 재치로도 아샤를 달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잠깐 피터랑 같이 가지고 놀다가 덤불 위로 날아갔을 뿐이야.」

 

「제르단, 아샤는 곰인형을 잃어버려서 하루 종일 울었어.」

 

「아샤를 울리려고 한 건 아냐! 금방 다시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망가지다니…….」

 

제르단은 뭔가 억울한 듯 자신을 타이르는 유이에게 항의했다.

유이는 팔짱을 끼고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아샤를 울린 것은 제르단과 피터였던 것이다.

그는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은 듯했으나 유이가 보내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입만 우물거릴 뿐 이었다.

 

「그만하자 제르단. 우리가 잘못하긴 했어.」

 

「……그건 나도 알아.」

 

「아샤, 수호자님, 미안해요. 우리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쳤어요. 다시는 그런 짓 안할게요.」

 

자존심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제르단을 보다 못한 피터가 대신 사과하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덕분에 유이는 아샤를 달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자, 아샤. 제르단과 피터가 너에게 사과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래?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겠데.」

 

그녀는 남자아이들을 사납게 노려보는 케이시 뒤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아샤를 다독였다.

하지만 아샤는 대답 없이 유이를 등지고 돌아앉을 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샤가 쉽게 마음을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곰인형일 수 있겠지만 아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다.

마을에서 잡화 상점을 운영하는 ‘에일리 위드’가 급하게 물건을 구하러 육지에 나갔을 때

아이들을 위해 사온 선물 중 하나였다.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바깥세상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는 점은

아샤가 곰인형을 제일 아끼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진심으로 사과한들 곰인형이 망가진 이상 부질없을 뿐이었다.

 

「너무 망가진 것 같다냥. 이제 어쩌냥…….」

 

「저기, 수호자님, 너! 어른이잖아. 어른이면 인형 정도는 고쳐줄 수 있지?」

 

니아룽이 아샤의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탄식하자

제르단은 안절부절 못하며 유이에게 구원요청을 보냈다.

그녀 역시 따지고 보면 17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최연소로 수호자가 되기도 했고 마법 실력도 어느 정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성숙함과 개인이 가진 능력은 별개의 것이지만 아이들은 둘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마련.

제르단은 유이를 스스로 먹고 살 능력 정도는 갖춘 ‘어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형을? 내가?」

 

「그래. 그냥 뜯어진 부분을 꿰매면 되는 거니까 간단하잖아.」

 

사실 그랬다. 유이도 간단한 재봉이나 수선은 할 줄 알았고

일을 하다가 배낭이나 옷이 찢어질 때를 대비해서 실과 바늘 정도는 상비하고 있었다.

또, 아샤가 다시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곰인형을 고쳐주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다만 유이는 제르단에게 한 소리 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르단은 소위 말하는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보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제르단이 그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하려면

조금은 그를 꾸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다음 조금 짐짓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르단.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 전에,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여줘. 멀쩡한 인형을 빼앗아서 망가뜨린 것은 너와 피터야. 그러면 적어도 아샤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인형을 고쳐주려는 노력이라도 하도록 해.」

 

「하지만!」

 

「다시 돌려주려고 생각했다고 해도 결국 망가뜨렸잖아. 진짜로 장난만 칠 생각이었다면 좀 더 소중히 다뤘어야지. 아샤는 울고 있고 인형은 솜이 다 삐져나와 있는데, 그럴 줄 몰랐다는 말로는 아무도 납득하지 않아.」

 

갑자기 단호해진 유이의 말투에 제르단은 물론 잠자코 있던 피터와

화난 표정으로 일관하던 케이시, 아샤를 위로해주려고 꾹꾹이를 하던 니아룽까지 놀라는 눈치였다.

 

「네 말대로 인형을 고쳐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냥 도와줄 수는 없어. 네가 직접 아샤에게 사과하고, 너와 피터가 인형을 고쳐주는 것을 도와주지 않으면, 나 역시 인형을 고쳐주지 않을 거야.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봐.」

 

「사과라면 아까 했는데…….」

 

「꿍얼대지 말고. 그리고 아까 제대로 미안하다고 말한 건 피터뿐이야. 남이 해주는 사과는 의미가 없어. 자기 잘못을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넌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니?」

 

「난 강한 남자야! 강한 남자는 그런 비겁한 짓 안 해!」

 

「그렇다면 강한 남자답게, 아샤가 들을 수 있도록 너의 목소리로 사과했으면 좋겠어. 그러고 나서 인형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나도 함께 인형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제르단은 여전히 뭔가가 억울한 듯 보였지만 유이의 말대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샤에게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침울해져 있는 아샤를 보니 사과의 말을 목구멍 너머로 꺼내기가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한참을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발로 풀을 짓이기면서 딴청을 피우던 제르단은 겨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미안해. 아까 인형을 빼앗은 것도, 그걸 망가뜨린 것도. 하지만 정말, 진짜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공중에서 주고받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아무튼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나도 인형을 원래대로 고칠 수 있게 도울 테니까 용서해줘. 이제 안 그럴게. 약속해.」

 

쥐구멍에 들어가듯 작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유이가 바라던 대로

제르단은 제대로 아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남은 것은 아샤가 마음을 푸는 것뿐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제르단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아샤가 끝까지 토라진 채 그대로 돌덩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행히 아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르단을 향해 섰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케이시의 뒤에 숨은 채였지만

그녀가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제르단에게는 안심이 되었다.

 

「……진짜로 약속하는 거야?」

 

「그, 그래! 진짜로!」

 

「곰돌이도……꼭 고쳐줘야 해?」

 

「그것도 약속할게. ……수호자님이 도와준다면.」

 

아샤에게 장담하던 제르단은 말끝을 흐리며 유이의 눈치를 보았다.

유이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제르단이 약속을 지켰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아샤가 더 이상 우는 모습을 보면 나도 마음이 아프니까.」

 

「그렇지? 봐봐! 나랑 수호자님이 말끔하게 고쳐서 돌려줄 테니까 걱정 마! 완전히 새것처럼 만들어줄게!」

 

「새 것처럼은 무리지만 망가지기 전처럼은 고쳐줄게. 그러니까 기운 내, 아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약속하는 제르단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유이를 보고

아샤의 표정에 밝은 빛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날 유이는 처음으로 아샤의 미소를 보았다.

오전 내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이었지만 작은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도드라졌다.

웃고 있는 눈꼬리 끝에는 진심을 담은 기쁨이 맺혀 있었다.

아직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웃음소리가 아이들 사이로 퍼졌다.

 

「나도 도와야겠지?」

 

「당연하지! 너랑 제르단이 같이 저지른 일이니까. 나도 도울 거야. 어디 사는 바보들이 또 바보짓 못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도와주겠다냥! 저기 아샤, 다 고치고 나면 잠깐만 빌리고 싶다냥……. 전부터 한번만 꼬옥 안고 낮잠 자보고 싶었다냥!」

 

「싫어.」

 

「흐냐앙…….」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인형을 고치는 것도 새로운 놀이처럼 느껴졌는지

아이들은 어느새 들떠서 제각각 떠들고 있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을 보면서 유이는 보모 역할도 꽤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새처럼 지저귀면서 장난기 많은 요정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왠지 성취감이 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어른 흉내는 낼 수 있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유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어른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듣고 보았던 ‘어른의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완전한 어른이었다면 아이들을 좀 더 잘 다독여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케이시 앞에서 적잖게 식은땀을 흘렸던 그렌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어른이라고 모든 것에 능숙하진 않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 수호자님! 이제 어떻게 하면 되?」

 

유이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여 있었다.

그 순간 유이의 마음은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문득 그렌이 그녀에게 했던 잔소리를 떠올렸다.

‘진정한 수호자는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당연하고 옳은 말은 오히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무게를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 그렌의 말은

정말로 ‘수호자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유이는 다섯 아이들 한명 한명씩 눈을 들여다보았다.

수호자로서 지켜야 할 티아라니아의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보았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파도소리가 귓가에 부딪쳐 조용히 부서졌다.

정오의 온기는 대지를 따듯하게 감싸, 잔디밭 특유의 향이 아지랑이와 함께 올라왔다.

 

짙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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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은 좀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썼는데도 아직 아샤랑 놀아주는 구간까지 가지도 못했어요!

하하하하하하하!!!!!!!!!!!!!!!!!!!!!!!!!!!!!!

 

 

Lv41 Noire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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