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출시 예정인 'ANNO 117: 팍스 로마나' 또한, 이 아노 시리즈의 전통적인 유전자를 잘 지니고 있다. 시대와 그래픽은 바뀌었을지언정, 게임은 여전히 아노 시리즈 그 자체라는 뜻이다.

장르명: 시뮬레이터
출시일: 2025.11.14
리뷰판: 사전 리뷰 버전개발사: 유비소프트 마인츠
서비스: 유비소프트
플랫폼: PC
플레이: PC
고대 로마는 빵만 먹고 살지 않았다수요와 공급의 퍼즐을 맞춰라
아노 시리즈의 특징은 매우 명확하다. 좁은 땅, 많은 섬, 그리고 무역.
아노 2205 즈음에 이르러 게임성이 다소 단순화되긴 했지만, 이 디자인만큼은 첫 작품부터 본작인 아노 117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진다. 플레이어는 황제의 명을 받은 속주의 관리자로서 거렁뱅이밖에 없는 섬을 개척해야 하고, 이 섬을 거점으로 개척과 무역을 병행해 군도의 최강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매우 정형화된 시티 빌더의 룰이 더해진다. 기본적인 주거지를 짓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주면 된다. 여기서 특징은, 다른 시티 빌더류에 비해 물품의 공급과 물류 이동을 조금 더 세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한 니즈의 충족과 발전이 아노 시리즈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우 기본적인 건설 자재인 '목재'를 얻으려면 벌목장과 제재소만 만들어 주면 되지만, 물건에 따라 제작 난이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가령, 평민 계급을 위한 식재인 '소시지'만 해도 돼지 농장과 약초 농장, 그리고 숯가마를 만들어 고기와 허브, 숯을 수급해야 제작이 가능해진다.
당연히, 모든 재료를 하나의 섬에서 수급할 수는 없다. 본작은 로마 시대 중에서도 최전성기인 2세기 초를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온갖 사치재와 건설재들을 구현해 두었는데, 테라코타 정도는 아무 섬에서나 수급이 가능하지만 콘크리트나 대리석 정도에 즈음에 이르면 섬에 자원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 식재를 봐도 올리브나 캐비어 등은 애초에 섬에 존재하지 않으면 자가 수급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섬의 중심이 되는 교역소에서 부족한 물품을 구매하고, 남아도는 물건들을 판매하며 무역 수지를 맞춰야 한다.

이를 통해 만족시켜야 하는 건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만족도. 부자가 될 수록 좋은 곳에 살고 싶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기에, 더 많은 물산이 유통될수록 섬의 생활 만족도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거렁뱅이들은 대충 술집 하나 정도만 지어주고 생선만 먹여도 살 수 있지만, 바로 위 평민 계급으로 올라서면 소시지와 밀빵을 제공해야 하고, 기사 계급은 은제 브로치와 토가, 글을 기록하는 서판 따위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귀족 계층인 '파트라키'에 이르면 온갖 복지 시설은 물론 캐비어 올린 굴이나, 젤리에 담근 새의 혀 등 미식까지 달라고 아우성치며, 이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행복도가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아노'라는 게임 시리즈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 구조를 지닌 것 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니즈와 공급의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을 담은 게임이다. 별걸 다 요구하는 귀족이나 기사 계층이 존재해야 고급 병종과 함선, 문화를 꽃피울 수 있고, 게임 트레일러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같은 로마의 식민 속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고대 로마는 할 일이 너무 많다식민지 두 개를 한 번에 관리하라굽쇼?
그 과정에서, 게이머는 정말 많은 것을 직접 컨트롤해야 한다. 아노 117에는 전통적인 로마풍을 따르는 속주인 '라티움' 외에도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켈트 문화권을 포함하는 '알비온' 속주도 등장하는데, 첫 번째 속주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두 번째 속주에 정착이 가능하다는 알림이 온다. 그 때부터는 이 두 개의 속주를 한 번에 컨트롤해야 한다.


알비온과 라티움은 지리적으로 엄청나게 멀다는 설정이기에, 당연히 이 속주 간에는 무역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 때부터 게이머는 라티움과 알비온이라는 두 개의 속주를 실시간으로 컨트롤해야 한다. 한 쪽에서는 파트라키들의 미식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캐비어와 굴을 캐야 하고, 세계지도 한 켠의 다른 땅에서는 새로운 거렁뱅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개를 캐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양쪽 속주 모두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전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바빠진다. 한 쪽을 플레이한다고 해서 다른 한 쪽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알비온을 한참동안 건들다 복귀하면 시민 소요로 건물이 부서져 있거나, 경쟁 총독이 군대를 코앞에 가져다놓고 전쟁을 걸어대는 경우가 숱하다.
게다가 알비온과 라티움은 문화권부터 구분되는, 전혀 다른 동네기에 과정이 비슷하긴 해도 엄연히 다르다. 라티움은 마른 땅에서 대부분의 자원을 얻지만 알비온은 습지대에서 온갖 것들을 채취하며, 완전히 다른 건축 자재와 니즈를 지닌다. 선택을 통해 문화를 어느 정도 통일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도 근본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다.


물론, 아노 시리즈의 특성 상 어느 정도 게임이 궤도에 오르면 대부분의 행정 사안이 자동화되고, 그 때부터는 딜레마 선택지를 고르는 식으로 비교적 편하게 도시를 관리할 수 있다. 무역도 교역소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동 구매하도록 돌려 두면 자동화가 가능하며, 고급 시민인 파트라키 이후의 시민은 존재하지 않기에 생산과 소비의 보합세를 맞추고, 군사력만 벌충해두면 그 때부터는 신경 쓸 요소가 현저히 떨어지긴 한다.
문제는, 주 정착지가 한창 바쁜 시기에 두 번째 정착지가 열리기에 손이 무진장 바빠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건설 시뮬레이터는 템포 상 초반이 가장 바쁘며, 점점 갈수록 손 댈 부분이 적어진다. 하지만 본작은 여유가 생길 만 하면 두 번째 정착지가 열리면서 다시 엄청나게 바빠져 도무지 여유를 가질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한 술 더 뜨는 것이 아노 시리즈 특유의 경쟁형 게임 디자인이다. 대부분의 시티 빌더는 외부 교역이 존재하는 경우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싱글 플레이 게임에 가깝다. 하지만 아노 시리즈는 한 게임에 최대 3명의 경쟁 총독이 함께하며, 이들은 게임 내내 플레이어와 경쟁한다. 주변 섬을 점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걸기도 하면서 말이다. 또한, 이보다 더 위에 있는 '황제'라는 거대한 중재자 겸 배후세력이 있다. 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건 외교 관계에서 꽤 중요한 일이고, 평판 관리를 위한 온갖 퀘스트를 던져주기에 마냥 외면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아노 117은 게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게이머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알비온 진출 또한 다른 모든 경쟁자들이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게이머는 3명의 경쟁 상대와 각각 두 개의 바둑판을 놓고 벌이는 정신없는 경쟁 구도를 이어가야 한다. 황제의 이쁨을 받아 상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든, 정예병을 육성해 물리적으로 박살내든 말이다.


고대 로마는 시장을 원하는 게 아니다시장이 아닌, 총독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게임
정리하면, 아노 117은 기존 아노 시리즈가 보여준 특징인 좁은 땅과 많은 섬, 그리고 무역을 통한 수요와 공급의 퍼즐맞추기를 그대로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두 개의 정착지를 관리해야 하는, 굉장히 정신없는 시뮬레이터다.
게임을 시작할 때는 나만의 작은 섬에 소규모 정착지를 꾸리며 아기자기한 섬 식민지를 만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게임이 본 궤도에 오르는 시점부터는 빗발치는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막만한 땅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굴릴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며, 그 와중 경쟁 총독들과의 갈등도 고려해야 한다.

때문에, 이를 그냥 여러 시티 빌더 중 하나로 생각하고 플레이하면, 점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노 117에서 시티 빌딩은 게임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일 뿐, 결국 게임의 흐름은 누가 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이를 통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군사적인 방비를 갖출 수 있느냐로 갈린다. 황제는 시시때때로 온갖 물품을 요구하며, 때로는 경쟁 총독과 플레이어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하기에 단순히 정착지를 관리하는 시뮬레이터라 생각하기엔 생각해야 할 건덕지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일반적인 시티 빌더에서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도시 만들기'의 재미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땅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사회는 화이트칼라만으로 돌아가지 않듯, 아노 117의 세계도 웬만한 기반 산업은 하위 노동자를 필요로 하기에 도시 중앙의 번화가는 몰라도 외곽은 허름한 주택들과 돼지 농장 등을 둘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도시 가치를 끌어올리고 부가가치 산업을 끌어올려 웬만하면 다 돈으로 퉁쳐버리는 두바이식 운영을 하려면 꽤 긴 시간 동안 부족한 땅과 싸워야 한다.

다행이라면, 꽤 볼륨있게 구성된 캠페인을 통해 아노 117이라는 게임 자체를 배우는 건 무척 쉽다는 점이다. 게이머는 캠페인 상의 흐름에 따라 라티움에서 게임을 배우고, 반란 세력에 쫓겨 알비온으로 도주한 후 켈트 정착지를 키워야 하고, 이 과정에서 온갖 정치적 모략과 무역, 시민들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 위한 콘텐츠로서 캠페인은 100% 완벽하게 작동하며, 그냥 캠페인만 플레이해도 사실 재미는 충분하다.
다만, 이 게임이 일반적인 시티 빌더와는 추구하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건 플레이하기 전에 인지해야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게이머는 시장이 아닌 총독이며, 총독의 마음가짐으로 게임을 플레이해야 아노 117이라는 게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방향에 옳고 그름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취향에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 호불호의 영역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아노 117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게임이다. 정치, 행정, 종교, 군사, 외교에 이르기까지 압축하긴 했지만 빠짐 없이 담아둔 게임이 바로 아노 117이니까. 하지만 그냥 시티 빌더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