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美 박스오피스 2위의 기적, 비결은? "애니메이션을 영화처럼 찍다"

인터뷰 | 김병호 기자 |
지난 4월, 미국 할리우드 박스오피스에 눈에 띈 변화가 있었다.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 거대 자본이 장악한 북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한국 제작사가 만든 ‘킹 오브 킹즈(The King of Kings)’가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찰스 디킨스의 미발표 원작을 재해석한 이 작품은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흥행 2위라는 기록까지 세우며 글로벌 시장에 'K-애니메이션'의 저력을 증명했다.

이 기적 같은 성과의 중심에는 25년간 250편 이상의 영화 VFX(시각효과)를 담당해 온 '모팩 스튜디오(MOFAC Studios)'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무기는 다름 아닌 게임 엔진, '언리얼 엔진'이었다. 최근 60억 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유치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은 모팩 스튜디오의 박영수 CTO를 만났다.

박영수 CTO는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제작 방식은 철저히 영화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우가 연극하듯 끊김 없이 연기하고, 촬영 감독이 가상 공간에서 직접 조명을 세팅하는 '버추얼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해 기존 공정의 한계를 깨부셨다. 실시간 렌더링 기술이 어떻게 창작자들에게 '직관'을 선물했는지, 그리고 모팩이 그리는 콘텐츠의 미래는 무엇인지 박영수 CTO에게 물었다.



▲ 에픽 게임즈 킴 리브레리 CTO(왼쪽)과 모팩(MOFAC) 스튜디오 박영수 CTO(오른쪽)

모팩 스튜디오는 국내 VFX 업계의 맏형 격입니다. 서비스 수주를 넘어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도약하며 내놓은 첫 작품 <킹 오브 킹즈>가 대성공을 거뒀는데요. 이 도전의 시작점과 언리얼 엔진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모팩 스튜디오는 지난 25년간 250편 이상의 영화 VFX를 작업하며 기술력을 쌓아왔지만, 자체 IP(지식재산권)에 대한 갈증은 늘 있었습니다. 그 첫 시도로 찰스 디킨스의 숨겨진 원작 '예수의 생애'를 발굴해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죠.

문제는 '방식'이었습니다. 장성호 감독님은 애니메이션 작업이 처음이었기에, 기존의 애니메이션 공정이 아닌 익숙한 '영화 문법'으로 이 작품을 만들길 원했습니다. 우리는 영화 스태프들의 전문성이 디지털 공간에서도 그대로 발휘될 수 있는 솔루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리얼타임 엔진을 활용한 버추얼 프로덕션이었습니다. 에픽게임즈의 '메가그랜트' 지원을 받으며 우리는 이 혁신적인 파이프라인을 과감히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기술로 영화적 연출을 구현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구체적으로 기존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 무엇이 가장 달랐습니까?
핵심은 '퍼포먼스 캡처'와 '연극적 연기'의 결합입니다. 보통 애니메이션은 컷(Cut) 단위로 쪼개서 작업하지만, 우리는 배우들에게 연극 무대처럼 시퀀스 전체를 끊김 없이 연기하도록 했습니다.

감독은 가상 공간 속 배우의 연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디렉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캡처된 데이터는 언리얼 엔진에 즉시 저장되었고, 이후 카메라 워킹과 장면 설계를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창작의 도구가 되어 배우와 감독의 직관을 100% 살려준 순간이었죠. "이 방향이 맞다"는 확신이 든 것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 배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캡처하여 가상 캐릭터에 입히는 모습. 영화적 호흡을 애니메이션에 이식했다

프리비주얼라이제이션(사전 시각화) 단계에서 언리얼 엔진을 핵심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현장의 고질적인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주었나요?
기존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추측(Guesswork)'과 '소통의 부재'였습니다. 스토리보드만으로는 감독의 머릿속 그림을 수많은 애니메이터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리얼 엔진은 감독, 배우, 촬영 감독이 동시에 같은 화면을 보며 소통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가상 카메라에 실제 영화 촬영 기능을 매핑하여, 김우형 촬영 감독(DP)님이 게임 컨트롤러를 잡고 마치 실제 현장처럼 가상 세계를 촬영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동선과 앵글을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었기에 소통의 오해로 인한 비용 낭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실시간 프리비즈가 스토리텔링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습니다. 기술이 서사에 개입한 구체적인 사례가 있을까요?
기술 덕분에 우리는 "실패할 기회'를 더 많이, 더 빨리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메시지 전달이 약한 장면은 과감히 들어내고, 더 나은 연출을 위해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 있었죠. 이것은 엄청난 기회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정말 놀라웠던 사실은, 본 제작에 들어가기 전 만든 '프리비즈 편집본'의 내부 시사 점수와, 영화 개봉 후 배급사가 진행한 관객 평점이 거의 일치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기술을 통해 스토리텔링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미리 완벽하게 검증했다는 뜻입니다. 버추얼 프로덕션의 가장 강력한 힘이 증명된 사례라고 봅니다.


협업 과정에서의 시너지도 궁금합니다. 연출, 아트, 기술 팀이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과거에는 각 파트가 서로 다른 상상을 하며 작업했다면, 언리얼 엔진 도입 후에는 모두가 '하나의 모니터'를 보며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감독이 "이 장면의 분위기를 좀 더 어둡게 가보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조명과 앵글을 바꿔 결과를 확인합니다. 단계별 컨펌을 기다릴 필요 없이, 모든 창작진이 즉각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통합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직관적 합의'는 작품의 퀄리티를 수직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작품 특유의 신화적이고 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있어 빛(Lighting)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작업하셨나요?
촬영 감독님이 마치 후반 작업실에서 색 보정(Color Grading)을 하듯, 언리얼 엔진 안에서 직접 조명을 세팅했습니다. 가상 조명기들을 배치하고 빛의 세기와 방향을 조절하면 '루멘(Lumen)' 기술이 이를 실시간으로 계산해 화면에 뿌려줍니다.

시간과 물리적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촬영 감독님은 무한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흥분되는 작업 과정이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기술이 아티스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입니다.


실시간 엔진이 제작 환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애니메이션과 VFX 산업의 경계는 어떻게 재편될 것이라고 보십니까?
실시간 렌더링 품질의 비약적인 발전은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이미 모팩은 영화 VFX, 시네마틱,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의 표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 있던 스태프들이 하나의 툴 안에서 협업하는 '통합 제작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효율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창작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킹 오브 킹즈>의 성공 이후가 더 기대됩니다. 모팩 스튜디오의 차기작 계획과 기술적 로드맵을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킹 오브 킹즈>가 가능성을 확인한 프로젝트였다면, 차기작부터는 언리얼 엔진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할 계획입니다. 기존에는 프리비즈 단계에서 주로 활용했다면, 이제는 최종 결과물인 '파이널 픽셀(Final Pixel)'까지 엔진 안에서 모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파이프라인을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AI 기술을 접목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준비도 마쳤습니다.


누구나 고품질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시대, 미래의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요?
결국 본질은 '스토리(Story)'입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보편화될수록 "어떤 시각적 언어로,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자신만의 통찰력과 진정성 있는 메시지만 있다면, 기술은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줄 것입니다. 에픽게임즈와 모팩이 열어갈 미래도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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