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WarmSnow)'이 바로 그랬다. 하데스에 200시간을 쏟아부은 뒤, 스팀은 집요하게 이 게임을 '비슷한 게임'이라며 추천하기 시작했다. 역시 알고리즘의 안목은 정확했다. 다크 판타지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내게, '난설'의 비주얼은 정확히 취향을 저격했다. 그렇게 이 게임은 자연스럽게 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찜 목록에 담아두고 잊히는 게임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설'을 찜한 게 2023년 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근까지도 플레이는커녕 찜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 목록을 뒤져보니 2017년에 담아둔 게임도 있더라. 디지털 시대의 '적립만 하는 마일리지' 같은 존재들이다.
문득 찜 목록의 기억이 떠올라,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을 실행했다. '액션 로그라이트'라는 장르, 생각 없이 즐기기에 딱 좋지 않은가?
빠른 템포 & 무한에 가까운 빌드
'난설'은 2D 액션 로그라이트 장르에 무협 세계관을 접목한 작품이다. 중국의 BadMud Studio가 개발하고 빌리빌리가 퍼블리싱한 이 게임은 2022년 1월 출시 이후 스팀에서 약 35,000개의 평가를 받으며 '매우 긍정적'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출시된 지 3년 가까이 흐른 게임임에도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를 확보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게임의 완성도와 재미 요소가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현재 무료 DLC 1개와 유료 DLC 1개가 출시되어 있으며, 일각에서는 '중국판 하데스'라 불리기도 한다.
이 장르에서 하데스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난설'만의 차별점은 명확하다. 바로 템포다. 로그라이트 장르를 즐겨본 게이머라면 누구나 공감할 문제가 하나 있다. 런 초반의 단조로운 구간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캐릭터가 아직 제대로 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초반 스테이지를 수십 번 돌파하다 보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난설'은 이 구간을 과감하게 압축했다. 게임의 전개 속도가 상당히 빠르며, 초반부터 강력한 스킬 조합을 맛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본편 기준 한 번의 런은 약 20분 정도다. 지나치게 길지 않아 부담이 적고, 빠르게 반복 플레이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빌드를 실험해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 진행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체감하는 '재미'의 밀도가 높다는 의미다.



이러한 빠른 템포는 방대한 강화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여타 로그라이트 게임이 그렇듯 '난설'의 강화 요소 역시 휘발성과 영구성으로 나뉜다. 먼저 휘발성 강화 요소, 즉 한 번의 런에서만 유효한 강화 시스템은 종파 기술, 성물, 신병(무기)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종류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10시간 가량을 플레이했음에도 여전히 구경조차 못 해본 성물과 신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더 흥미로운 건 이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파 기술과 성물, 신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화염 속성과 관련된 성물이 다른 성물과 얽히고설켜 뜬금없이 중독 대미지를 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난설'은 이러한 구조로 인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빌드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옵션이 많은 만큼 원하는 강화 효과를 얻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지만, 그렇기에 우연히 강력한 시너지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은 배가된다.


영구적 강화 요소로는 기억 복원과 불상 해금이 있다. 기억 복원은 공격력 증가, 회복 횟수 증가 등 기본적인 캐릭터 스탯을 올리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런을 거듭할수록 캐릭터가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느낌을 주며, 이전에는 버거웠던 구간을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게 만든다.
더 흥미로운 건 불상 해금이다. 이는 단순한 무기 해금이 아니라, 사실상 플레이 스타일 전체를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어떤 불상을 해금하고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전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며, 같은 스테이지도 전혀 다른 게임처럼 느껴지게 한다.



여기에 '봉인' 기능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존재한다. 원하지 않는 성물이나 신병을 봉인하면 이후 런에서는 드롭되지 않는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기능은, 사실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상당히 영리한 장치다. 로그라이트 장르는 무작위성이 핵심이지만, 지나친 무작위성은 플레이어에게 좌절감을 안긴다. '난설'은 이 딜레마를 봉인 시스템으로 해결했다. 반복 플레이를 통해 점차 아이템 풀을 좁혀나가면, 결국 운에 의존하지 않고 원하는 빌드를 구성할 수 있다. 방대한 콘텐츠와 무작위성 사이에서 플레이어에게 통제권을 부여하는, 균형 잡힌 설계다.

용어의 장벽, 그러나 넘을 만한 가치
다만 이 게임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 게임 특유의 고유명사 범람이다. '파계산력', '수유촌광', '적혼기진' 같은 용어들이 쏟아지는데, 무협물에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라면 특정 기술이나 성물의 효과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무기'라고 쓰면 될 것을 '신병'이라 표기하는 식이다.
더 불편한 건 도감의 부재다. 도감이 존재하긴 하나 런 도중에는 열람이 불가능하다. 상점에서 성물을 구매할 때, 구매하기 전까지는 어떤 효과인지 알 방법이 없다. 한 번 획득했던 성물이라도, 정확한 효과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매번 도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직접 메모하거나 스크린샷을 찍어두는 수밖에 없다. 현대 게임 디자인 기준으로 보면 분명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번역의 일관성 문제도 눈에 띈다. 같은 용어가 '이문록'과 '견문록'으로 혼재되어 있는 등, 일부 용어 통일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보이는데, 게임 플레이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게임 내 설명 역시 불친절한 편이다. 예를 들어 난이도 설정 화면에서 '신몽에는 난이도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표시되는데, 정작 '신몽'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다. 게임을 충분히 플레이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몽'은 DLC의 이름이었다. 문제는 스팀 상점에 DLC 제목이 한글이 아닌 중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한자를 모르면 이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개발사가 이 부분을 개선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게이머들이 '난설'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풍성한 콘텐츠, 그리고 독특한 매력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을 감안하더라도, '난설'은 분명 수작이다. 우선 시각적 완성도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크 판타지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와 세련된 아트 스타일은 첫 화면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 디자인, 배경 구성, 이펙트 연출 모두 높은 수준이며, 스크린샷만으로도 게임의 분위기를 충분히 전달한다.



스토리텔링 방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핵심 세계관인 '따뜻한 눈이 내리며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간다'는 설정 자체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난설'은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흩뿌려놓고, 플레이어가 스스로 퍼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여기에 무협 용어와 고유명사가 낭자한 텍스트까지 더해지며 약간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하지만, 이것이 게임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콘텐츠의 분량 또한 혜자롭다. 본편만 해도 총 5명의 메인 보스와 6개의 난이도 설정이 존재한다. 각 난이도는 단순히 몬스터들의 능력치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 패턴이 추가된다거나, 몬스터 구성이 변경되는 등 반복 플레이의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무료 DLC는 5명의 추가 보스와 6개의 멀티 엔딩을 제공한다. 보통 게임에서 무료 DLC라고 하면 소소한 추가 요소를 기대하게 마련인데, '난설'의 무료 DLC는 사실상 본편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유료 DLC는 5개의 새로운 스테이지와 함께 새로운 성장 요소, 강화 효과까지 추가한다. 인벤게임즈 스토어 기준 '난설'의 가격은 본편이 18,500원, 유료 DLC가 7,800원이다. 본편과 무료 DLC만 하더라도 수십 시간은 거뜬히 플레이할 수 있는 볼륨이며, 가격 대비 플레이 타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다.

템포와 깊이를 모두 잡은 수작
'난설'은 빠른 전개와 깊이 있는 빌드 구성이라는, 언뜻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가지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한 로그라이트다. 많은 로그라이트 게임들이 둘 중 하나를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 빠른 전개를 위해 깊이를 포기하거나, 복잡한 시스템을 위해 템포를 늦추거나. 하지만 '난설'은 방대한 강화 시스템과 빠른 게임 진행이라는 두 요소를 절묘하게 균형 잡았다.
고유명사로 가득한 무협 세계관과 불친절한 UI는 분명한 진입장벽이다. 특히 게임 초반, 무슨 말인지 모르는 용어들이 쏟아질 때는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장벽만 넘어선다면, 그 너머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로그라이트의 정수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게임이 '갓겜'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특히 빠른 템포의 액션을 선호하고, 복잡한 시너지를 구축하는 재미를 아는 게이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더 빠르고 다채로운 경험을 원하는 사람. 다크 판타지 분위기와 동양적 미학을 좋아하는 사람. 이 조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난설'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이다.
찜 목록에서 2년 넘게 잠들어 있던 이 게임을, 이제야 깨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당신의 찜 목록에도 이런 숨은 보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