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칼은 예정대로 오후에 출항했다. 그날 칼의 복장은 평상시의 쥐스토코르가 아니라 갑옷이었다. 그러나 갑옷도 유럽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 차림의 칼을 처음 본 사람은 에스텔이었다.
“너, 너 이건 또 뭐야?”
“뭐가?”
“갑옷도 이상하게 생겼잖아! 게다가, 이거 철재가 아니잖아. 이래 갖고 검 막아 내겠어?”
“괜찮아, 괜찮아. 이거 입고 싸움 많이 했고. 진적 없어. 걱정 마.”
에스텔은 그의 갑옷을 자세히 살폈다. 철로 만든 갑옷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론 붉은색이고 겉 표면은 금속으로 덧붙인 형태였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투구도 헬름의 형태가 아닌 전혀 다른 형태였다. 하지만 선원들은 이미 익숙한지 인사만 하고 자기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칼은 에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제임스와 대화에 들어갔다.
“플리머스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예정대로라면 내일 저녁입니다.”
“그래? 그럼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엔 파리들이 꼬이겠군.”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린 그때에 대비만 하면 되는군. 알겠네, 계속 수고해주게.”
“알겠습니다.”
칼은 선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텔은 자신도 모르게 칼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칼의 곁에 다가갔을 때쯤, 칼은 바다를 가리켰다.
“잘 봐두라고. 이렇게 평온한 바다가, 내일이면 피의 바다가 될테니.”
“무슨 소리야?”
“너도 쉬어 두는게 좋을거야. 내일은 쉴 틈도 없어. 살고 싶으면 죽여야 해.”
“…….”
칼은 그 말을 끝으로 에스텔과의 대화를 끊었다. 에스텔 역시 더 반문할 의사가 없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날 정오. 선원들은 일찍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모두 마쳤을 무렵 망루에서 선원이 외쳤다.
“선장님! 저기 보십시오! 남서쪽입니다!”
“남서쪽?”
칼은 옆에 서있던 제임스로부터 망원경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선원이 말한 남서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망원경을 눈에서 뗀 뒤에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흐음. ‘북해의 깡패’라 불리는 녀석들이다. 별 시덥잖은 녀석들이었잖아. 적의 전력은 전투용 카락 1척, 프류트 1척, 무장 코그 7척이다. 전원 전투준비! 디트리히 가문의 선원들이 얼마나 강한지 저들에게 보여주자! 뒤의 갤리온은 포격준비를 기함인 클리퍼는 백병전 준비를 하라!”
“네! 알겠습니다!”
선원들은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물론 단 한사람, 에스텔을 제외하고. 잔뜩 겁에질린 그녀의 모습을 본 칼은 그녀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폭언을 했다.
“뭐하는거야! 너 지금 나랑 장난쳐? 너 그러고도 군인이야? 그렇게 쥐새끼마냥 쫄고 있으면 어쩌라는거야!”
“싫어!”
“뭐?”
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군인 출신 부관이 전투에 임하는걸 거부하고 있었다. 칼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싫어! 싫다구! 나 저놈들 토벌 못해서 잘린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무서워…”
“웃기고 있네. 어디 전투 시작되고도 그딴 소리하기만 해봐라.”
갑옷 차림의 칼은 백병전을 지휘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에스텔은 갑판 구석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칼은 그녀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나까지 20명의 인원이다. 9명은 3개조로 나누어 뒤에서 엄호 사격을 하고, 나머지 11명은 도선하여 적을 섬멸한다. 적의 기함만 카락이고 나머진 코그나 프류트 수준이니 겁먹지 말고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와아아아!!!!”
쾅쾅! 콰앙!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워낙에 조그만 7척의 코그중 4척은 이미 대형갤리온의 포격 앞에 침몰했다. 남은 3척은 대형갤리온에 접근하는걸 포기하고 클리퍼에 달려들었다.
“기껏해야 한 척당 10명이다! 우리의 힘을 보여줘라! 으랴앗!”
콱!
칼의 검이 난간으로 올라온 적병의 쇄골을 갈랐다. 숨이 끊어진 적병은 힘없이 바다로 추락하였다. 3개조로 나뉜 화승총 부대(?)는 도열하여 발사 장전을 반복했다. 코그에 타고 있던 적병들은 단 30분만에 모두 생포되거나 칼과 선원들에 의해 베어졌다.
“다음엔 프류트가 접근한다! 정신 바짝 차려라! 갤리온에 신호를 보내 포격을 명령하라!”
“네, 선장님!”
칼은 붉은 피가 진득하게 묻은 자신의 검을 털어내며 선원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선원이 깃발로 신호를 보내자 대형갤리온의 포실에서 엄청난 수의 포탄이 날아들어 프류트의 난간을 때렸고 그 요동으로 많은 수의 선원들이 바다에 빠졌다. 그러나 프류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접근했고 이윽고 클리퍼와 맞닿았다.
“공격!”
“와아아아!!!”
콱! 서걱! 탕! 탕!
살점이 베어져 나가는 소리, 뼈가 날카로운 무기에 의해 베어지는 소리, 그리고 총성과 함께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엔 칼이 있었다.
“이얍!”
콱! 푸하학!
칼의 검이 다시 적병의 쇄골을 갈랐다. 역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뒤에서 단도를 들고 뛰어들던 적병을 어떻게 느꼈는지 검신을 뒤로하게 한 뒤 자루를 뒤로 밀어냈다. 정확히 복부를 관통 당했는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러다 에스텔을 보았다.
“너 안 일어날래! 네가 그렇게 대가리 처박고 쳐 울어도 저놈들이 널 살려줄 것 같아? 일어나! 어서 검을 뽑아! 싸우란 말이야!”
“싫어! 싫다고 했잖아!”
“호오? 그래? 넌 조금 이따가 보자.”
“선장님! 적 기함만 남았습니다!”
“배를 붙여라! 적의 기함에 배를 붙여라!”
칼의 명령대로 조타수는 적의 기함인 카락을 향해 배를 돌렸다. 방향을 체크한 칼은 에스텔의 뒷덜미를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뭐, 뭐하는거야?”
“이 방법까지 쓰게한 네가 잘못된거야.”
곧 클리퍼는 적의 기함인 전투용 카락과 접현하였다. 칼은 에스텔을 끌고 난간으로 가서 에스텔을 적의 선원들 한가운데에 던져버렸다.
“꺄악!”
에스텔은 비명을 지르며 갑판에 널브러졌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때쯤엔 이미 적 선원들이 그녀를 빙 둘러싼 후였다.
“오오, 여자다.”
“잉? 이년 그때 우리 토벌하겠다고 와서 신나게 깨지고 간 여자 아니여?”
“여자는 죽이지 말고 선장실로 데려와라. 후후.”
해적들의 말에 잔뜩 겁을 먹은 에스텔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때.
“으악!”
해적선의 선원들-선장포함-은 모두 비명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눌러쓴 남자가 선원 하나를 베고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그 위압감에 눌려있었다.
“누, 누구냐?”
“호오, 내 부관이 실례를 저질렀나? 대접이 엉망이군.”
“넌 누구냐!”
“일개 해적선 선장 따위가. 좋아, 저승가는 선물로 알려주지. 내 이름은 칼리온 디트리히다.”
“허, 허억!”
선원들 모두가 동요했다. 그러나 칼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그들에게 유지한 채 에스텔에게 말했다.
“에스텔.”
“왜, 왜?”
“앞으로 5번만 살려주겠다. 그 이후론 나도 몰라! 하압!”
칼은 에스텔 주위로 다가온 해적 하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칼은 그녀에게 접근하는 적 선원 4명을 더 베었다. 그의 말처럼, 그는 더 이상 에스텔을 보호해주지 않고 앞으로 접근했다. 마침 선원 하나가 그녀를 향해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시, 싫어! 오지마!”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녀는 죽었구나 생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적 선원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호오? 이제야 정신 차린 모양이군. 살고 싶으면 베어! 어서!”
칼의 말을 들었는지, 그녀는 적 선원들을 베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목숨을 거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따윈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 칼은 적 선장과 1대1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네 이름도 기억난다. 마샬. 무국적 해적 조무래기 주제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잘도 영업을 해왔군.”
“시, 시끄럽다! 이얏!”
챙! 챙!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양측 선원들은 그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서로 한 발짝 물러났을 때 마샬이 말했다.
“내가 소문으로 전해들은 칼리온 디트리히는 이렇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너무 약하군 그래. 하하하!”
그의 말을 들은 칼의 표정은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봐주고 있으니까 건방져졌군. 그럼 이것도 막아봐라.”
“이, 이게! 윽!”
칼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더욱 빨라졌다. 원형을 그리며 들어오는 공격을 마샬은 자신이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 막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반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검을 고쳐 잡은 칼이 외쳤다.
“고작 그따위로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뭐, 뭐라고?”
“잘 봐두거라. 내가 바로 칼리온 디트리히다!”
칼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그의 눈이 붉어진건 일순간이었고 칼의 인영이 마샬의 몸을 지나갔다. 칼이 자세를 풀었을 때 마샬의 옆구리에 붉은 선이 그어졌고 곧 피가 흘렀다.
“뭐하느냐!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어서 묶어라!”
“네, 네!”
칼의 선원들은 재빨리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는 마샬을 묶었다. 그리고 칼은 검을 적 선원들에게 겨누고 말했다.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는 자는 여기서 베어주겠다.”
그의 말에 적 선원들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칼의 선원들은 그들역시 포박하여 배 한편에 묶어 두었다. 칼은 간부급으로 보이는 선원에게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너희들 사람까지 납치한다고 들었다.”
“모른다.”
콱!
칼은 바닥에 칼을 깊숙이 꽂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숨도 부지할 수 없을테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말하건 말건 대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바, 바른대로 말하겠다. 코그엔 사람은 없다. 그 작은 배에 우리 선원 말고는 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프류트와 이 카락엔 사람이 있다. 물론 우린 여자들만 납치했다.”
“훗, 뭐 좋다. 당분간 살려두도록 하지. 사이먼.”
“네.”
“선원 15명을 붙여 줄테니 잘 지키도록.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어차피 처형 면하긴 어려울 것 같지만. 나머지는 날 따르도록. 그리고 갤리온 쪽에도 알려라. 그쪽은 프류트를 수색하라고 이르도록.”
“네!”
칼은 에스텔을 비롯해 4명을 이끌고 카락의 선실로 들어갔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흡사 감옥과 비슷한 수용 시설 세 개가 있었다.
“아, 아니?”
칼은 그 안을 들여다보고는 경악했다.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가릴 곳만 가린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칼을 보자 더욱 공포에 질려 얼굴들이 하얗게 질렸다.
“에스텔.”
“응?”
“네가 진정시켜.”
“알았어.”
“제임스! 제임스!”
칼은 복도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제임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와서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네, 부르셨습니까?”
“가서 모포를 있는대로 모두 가져오게. 그리고 따뜻한 수프를 끓여서 내오도록 하게.”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꼭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가? 그럼 저길 보게.”
제임스는 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제임스의 표정은 칼이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아, 아니!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프류트 쪽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란 보고가 들어왔는데…”
“꼭 일일이 명령해야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칼은 문을 유심히 살폈다.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빌어먹을. 자물쇠를 채웠군. 에스텔 물러나.”
“뭐? 뭐?”
“자물쇠를 잘라 내야겠어.”
“뭐, 뭐라고? 네 검이 아무리 좋아도 이 큰 자물쇠를 무슨 수로 잘라내려고!”
“젠장, 잔말 말고 비켜!”
칼은 흥분했는지 평소와 같이 냉정한 말투가 아닌 격앙된 말투로 말했다. 그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에스텔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칼은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검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아아아!”
팡!
놀랍게도 자물쇠가 잘려나갔다. 물론 칼의 검엔 조금의 이상도 없었다. 에스텔이 놀라워 하며 그를 보고 있는 동안 제임스와 선원 몇 명이 모포를 들고 들어왔다.
“가주님! 명령하신대로 모포를 들고 왔습니다. 자, 자물쇠?”
“그래, 자물쇠. 하나는 내가 잘랐지만 두 개는 모르겠네.”
“선장님. 제가 열어보겠습니다.”
사이먼이었다.
“그래, 자물쇠 따기는 네가 전문이었지. 열어봐.”
사이먼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바늘같은 물건을 들고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개 모두 열었다.
“일단 여자들을 밖으로 내보내는게 좋겠군. 어서 시행하게.”
“예! 자 이쪽으로.”
칼이 앞장서고 다른 선원들과 에스텔이 여자들을 이끌었다. 선실 밖으로 나온 칼은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이 사람들을 클리퍼로 오를 수 있게 도와드리도록. 다른 쪽은 갤리온에 수용하고.”
선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모습을 본 칼의 표정은 상당히 착잡했다. 기껏해야 자신과 같은 나이 또래거나 자신보다 조금 많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주님!”
“무슨 일인가?”
“여기.”
제임스가 있는 쪽으로 가본 칼은 기가 막힌 광경을 보았다. 에스텔이 쓰러져 있었다.
“긴장이 풀린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에스텔은 내가 옮길테니 자네는 여자들을 도와주게. 몇 명 보내 여기 이놈들도 지키도록 하고…큭!”
칼이 갑자기 눈을 가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 가주님!”
“크윽…아아악! 으으으…”
칼은 눈을 가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제임스가 다가오려 하자 칼은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의 눈을 얼핏 본 제임스는 깜짝 놀랐다. 눈동자가 붉은색이었기 때문이다.
“허억, 헉, 헉.”
“괜찮으십니까?”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군. 걱정 말게. 에스텔은 내가 데리고 갈테니. 자넨 임무를 수행해주게.”
칼은 에스텔을 안아들고 클리퍼에 있는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네...이번편 무지하게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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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꾸 알프레드님 출연시기 늦어지면 안되는데....
어쨌든...
전 이거 올려놓고 군렙하러 갈랍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