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꿈속 한 장면인 줄 알았다. 누군가 아궁이에 장작을 과하게 넣었는지 코끝이 매캐했다. 몸을 한 번 돌리자 눈꺼풀 안쪽이 붉게 비쳤다. 벽지에 스며든 듯한 붉은 기운이 어렴풋이 일렁였다.
“연후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연후의 눈을 완전히 뜨게 만든 건 목소리가 아니라, 숨이 막히는 듯한 연기였다.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들고,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컥, 켁…!”
연후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방문 쪽으로 기어갔다. 방문 아래 틈새로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밤에도, 그저께도 보지 못한 빛이었다.
“어머니?”
대답 대신, 방 밖에서 누군가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우지끈 울렸다. 문틀이 흔들릴 만큼 크게.
“연후형 , 일어나! 불이야!”
이번엔 막내 동생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방 안으로 더 짙은 연기가 밀려 들어왔다. 연후는 그제야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뭐, 뭐야…?”
발밑의 온기가 이상했다. 따뜻함을 넘어 뜨거웠다. 마치 방바닥 아래에서 불길이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연후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억지로 추스르며 몸을 번쩍 일으켰다.
문고리를 잡고 힘껏 당기자 달아오른 나무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문을 겨우 비집고 나오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집안 전체가 불 타고 있었다.
안채 지붕 위로 불꽃이 치솟았고, 기와 사이사이에서 붉은 불똥이 튀어 올랐다. 마당에 내걸어 두었던 빨래들은 이미 새까맣게 그을려 축 늘어져 있었고, 처마 밑에 매어둔 장독들이 터져 끓어오르던 간장과 된장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머니!”
연후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안채 쪽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 앞길은 연기와 불길로 가로막혀 있었다. 안채 마루로 통하는 쪽은 이미 시야조차 흐릿했고, 기둥 하나는 반쯤 타들어가 휘어져 있었다.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들어가면 안 돼!”
뒤에서 누군가 그의 허리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거칠게 팔을 휘감는 손이었다. 연후는 본능적으로 그 팔을 뿌리쳤다.
“놓으세요! 어머니랑… 동생들이 안에…!”
“거긴 이미 늦었어! 들어가면 너까지 죽는다, 이놈아!”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옆집 아주머니의 남편,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김 서방이었다. 그는 기침을 하면서도 연후의 어깨를 움켜쥔 채 마당 쪽으로 끌어냈다.
그때 안채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마루 한쪽이 주저앉는 소리였다. 안방문이 안쪽으로 무너져 내리며 검은 연기가 한꺼번에 솟구쳤다.
“어머니!”
연후의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그 소리를 집어삼키듯 불길이 기와를 핥고 지나갔다. 타는 나무, 무너지는 서까래, 깨지는 기와 소리가 뒤섞여 귀가 멍멍해졌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세요!”
눈이 따가워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연후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마당을 휘둘러 보았다.
그때였다.
마당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람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연후는 비틀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쓰러진 몸 옆으로 무언가가 흘러나와 바닥에 번져 있었다. 어둑한 틈으로 보이는 그것이 그을음인지 피인지, 그는 분간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 아버지!”
연후가 몸을 뒤집으려는 순간, 김 서방이 또다시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사람부터 더 불러와야지!”
“놓으세요! 아버지가…!”
“죽으면 다 끝이야! 살아 있는 놈부터 살리고 봐야지!”
김 서방의 외침에 마당 주변에 모여들던 사람들까지 같이 연후를 붙잡았다. 아무렇게나 덮어쓴 겉옷 위로 재가 수북이 내려앉았고, 맨발 밑으로는 뜨거운 바닥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웃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마당에 뿌리고, 누군가는 마른 짚단을 치우려 허둥댔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집의 심장부를 집어삼킨 뒤였다. 안방, 건넌방, 부엌, 다락까지. 불은 한 번 물어뜯은 것을 놓아주지 않는 짐승 같았다.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머니의 목소리인지, 동생들의 울음인지, 아니면 연후의 마음이 만들어낸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불길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하늘을 가득 메웠던 연기가 옅어질 무렵, 안채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내려앉아 있었다. 검게 탄 서까래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기와 조각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물이 더 필요하다! 아직 남쪽 벽 쪽이 뜨거워!”
누군가 소리쳤고, 여기저기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연후는 그 모든 소리를 물 밖 어딘가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멍하게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쓰러져 있던 아버지 쪽을 향해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 그 위에 거친 천을 덮어두어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후야.”
누군가 그를 불렀지만, 연후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팔과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듯 무거웠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온몸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말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불이 완전히 꺼졌을 때에는, 해가 이미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연기는 대부분 걷혔지만, 불이 닿았던 자리마다 아직 뜨거운 열기가 배어 있었다. 그제야 관아에서 나온 군졸들과 아전들이 도착해 잿더미를 헤집기 시작했다.
누렇게 그을린 장판 조각, 타다 만 기둥, 부서진 그릇들 사이를 뒤적이며 그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소?”
허리를 굽힌 아전 하나가 물었다.
“예, 이 방 쪽에서는 특별한 건 안 나옵니다.”
입과 코를 헝겊으로 막은 다른 아전이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얼굴에는 피곤이 어렸지만, 눈빛만큼은 슬픔이 아닌 냉랭한 호기심과 의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장독대 근처는 샅샅이 살펴보시오. 이 집안, 모두 몸이 안 좋다고 형조에서 약을 내려 보냈다 하지 않았소?”
“예.”
몇몇이 장독대 쪽으로 옮겨갔다. 불길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깨진 항아리와 타버린 뚜껑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진한 장 냄새와 그을음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아,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누군가 잿더미 속에서 반쯤 탄 작은 봉지를 집어 들었다. 벼룩만 한 글씨들이 쓰여 있었으나, 종이의 절반은 이미 타 없어져 있었다. 봉지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먹빛이 간신히 글자의 형태를 붙잡고 있었다.
“형… 조…”
아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머지 글자를 더듬었다.
“형조…에서.”
그는 봉지를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곧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냄새…”
“약 아닙니까?” 옆 사람이 물었다.
“약 같지가 않소. 너무… 독하오.”
아전은 봉지를 들고 군졸 쪽을 돌아보았다.
“독일지도 모르니,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그 말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적막 속에서, 그들의 시선이 서서히 한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아직 그을음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서 있던 연후였다.
연후는 장독대 근처에 반쯤 주저앉은 자세로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재가 잔뜩 붙어 잿빛이 되었고, 입술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너.”
아전이 그에게 다가와 섰다.
“이게 무엇이냐.”
연후가 고개를 드는 데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봉지를 가리키는 손끝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제… 관아에서 하인 아저씨가 가져다 준 약입니다.” 연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머니랑 동생들이… 기침이 심해서…”
“그래서 네가 그 약을 먹였느냐?”
“…예.”
“누가 먼저 먹었느냐?”
“어머니와… 막내 동생이요. 저는… 저는 아직…”
연후는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 불길이 치솟던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불이 처음 번지기 전, 어머니가 약을 물에 타서 식구들에게 나눠 주던 모습. 그때까지도 그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형조에서 약을 내려줬다는 말 앞에서 의심이라는 것은 떠올리지 못했다.
아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가 곧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이라.”
그의 말은 연후에게만이 아니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몇몇이 눈을 크게 뜨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형조에서 잘못 보낸 게요?”
“쉿.”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그 말을 막았다. 아전은 대꾸하지 않고 봉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잿더미 위에서 쓰이는 글씨 소리만이 잠시 동안 조용한 마당을 채웠다.
“어젯밤에, 내가 이 집 근처에서 이상한 걸 봤소.”
불길이 잦아들고, 집터 가장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을 때였다. 장터에서 입심 좋기로 유명한 상인 하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이오?” 아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밤이 깊었는데도, 이 집 머슴아… 아니, 큰아들 연후가 우물가 근처를 서성이고 있더이다. 물을 뜨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참을 서서 들여다만 보고 있더군요.”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연후에게로 쏠렸다.
연후는 새까맣게 그을린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옷에는 타다 남은 천 조각이 매달려 있었고, 손등에는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고개를 들기가 더 어려웠다.
“그때 표정이 심상치 않았소.” 상인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마치… 큰 결심을 한 사람 같다고나 할까. 괜히 겁이 나서, 말도 못 걸었지.”
“우물가에서 뭐 하고 있었느냐.”
아전의 질문에 연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때… 막내가 열이 심해서… 물을 떠오라고 해서…”
“그러면 물을 뜨면 되지, 왜 서성이기만 했느냐?”
“저도… 잘…”
연후는 말끝을 흐렸다. 그때의 자신이 어떻게 서 있었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어젯밤은 그저 모든 것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가족의 기침, 어머니의 손, 약 냄새, 깊은 밤의 적막.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 떠오를 뿐이다.
“집안 모두가 앓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아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런데 왜 너만 멀쩡하냐.”
연후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온 말은 없었다. 정말로 자신만 멀쩡했다. 열도 나지 않았고, 기침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넌 아직 젊어서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주변이 술렁였다.
“그러고 보니… 다들 앓았다는데, 저 애는 얼굴빛 하나 안 변했지.”
“어젯밤에도 혼자 밖을 서성이었다지 않나.”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야…”
수군거림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자기 가족을… 죽인 건 아니겠지…?”
작은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불씨처럼 번져 나갔다.
“뭐라고?”
“아니, 그냥… 요즘도 그런 흉흉한 일이 있지 않소. 글자 좀 안다는 자들이, 집안을 통째로 말아먹고…”
“쉿, 입 조심해.”
누군가 급히 말렸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눈빛이 더 험악해졌다.
아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연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연후라 했지?”
“…예.”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넌 멀쩡히 살아 있다.”
그는 말끝마다 힘을 실어 또박또박 말했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은 독일지도 모른다. 그 약을 먹인 것도 너다. 불은… 네가 직접 질렀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구나.”
아전의 시선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이 집안에서 살아남은 건, 너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연후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뜨거운 피 맛이 입안에 번졌다.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겨우 그 말만 짜냈다.
“저는… 가족을 해치지 않았어요.”
아전은 비웃음 섞인 숨을 내쉬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해가 기울 즈음, 관아에서 내려온 군졸들이 연후의 두 팔을 뒤로 꺾어 포승줄을 감았다. 거친 새끼줄이 손목 피부를 파고들었다.
“형조로 압송한다.”
아전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가족을 독살하고, 불로 죄를 감추려 한 패륜의 죄. 그 죄를 물을 것이다.”
‘패륜.’
그 단어가 연후의 귀에 이상하게 크게 박혔다.
친척 몇이 구경꾼들 사이에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쳤고, 누군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속삭였다.
“어쩌다 저런 놈이 나왔냐…”
“피는 못 속인다더니…”
“조상님들 얼굴에 먹칠을 했구나.”
연후는 고개를 숙였다. 발앞의 흙바닥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언제부터 자신이 ‘패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 쉽게 사람들의 입과 귀를 타고 번져 간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하지 않았는데.’
그는 속으로 수십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말했다.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의심조차 아닌, 이미 결론을 내린 눈빛들뿐이었다.
군졸이 포승줄을 한 번 더 세게 당겼다.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끌고 가라.”
짧은 명령과 함께, 연후의 발이 마당을 벗어났다.
한때는 동생들과 뛰놀던 마당, 어머니가 빨래를 널던 마당, 아버지가 저녁마다 장부를 펼쳐 앉던 마당이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잿더미와 그을음뿐이었다.
연후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집터를 돌아보았다. 무너져 내린 기둥, 검게 그을린 장독, 천으로 덮인 아버지의 몸.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그림처럼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 뒤에서 누군가 침을 뱉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패륜아 같은 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름으로 불리던 자신은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단 세 글자였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의 첫 번째 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