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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온 제독 1부 5장-도망자 바다에 떨어지다

아이콘 하자와츠구미
조회: 48
2025-11-23 03:52:05

밤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때, 바다는 이미 제멋대로였다.

파도는 더 이상 일정한 간격으로 배를 두드리지 않았다. 한 번은 옆구리를 세게 후려쳤다가, 또 한 번은 밑에서 들어 올리듯 밀어 올렸다. 배는 아이가 흔드는 장난감처럼 위아래로, 좌우로 뒤집히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선창 안의 죄수들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누군가는 바닥에 미끄러져 욕을 했고, 누군가는 머리를 들지 못한 채 구역질만 반복했다.

연후는 의자 모서리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최대한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배가 기울 때마다, 포승줄에 묶인 팔이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줄에 매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의 상처가 다시 갈라졌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가 거세졌다. 돛대와 밧줄이 삐걱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 소리와 섞였다.

“이거… 정말 뒤집히는 거 아니냐…”

어디선가 죄수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던 말이, 이제는 진짜 공포에 가까워진 목소리였다.

그때, 갑판 위에서 길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왜구다!”

짧은 외침이 바람을 가르고 내려왔다.

선창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 뭐라고 했냐 지금…?”

“왜구라고 했어… 분명 들었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잠시 뒤,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인간의 고함이 본격적으로 바다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활을 들어! 가까이 붙이는 놈들만 쏴!”

“노를 멈추지 마라! 배를 돌려, 저놈들이 옆구리를 물지 못하게!”

벼락이 번쩍였다. 짧은 순간, 선창 위쪽 틈으로 빛이 스쳐 들어왔다. 연후는 그 틈 사이로, 멀리서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봤다.

작고 낮은 선체, 돛은 작지만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들.

왜구였다.


선창 문이 쾅 하고 열리며, 거친 바닷바람과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일어나, 이 자식들아! 물이 새기 시작했다!”

군졸 하나가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등 뒤의 등불이 요동쳐, 선창 천장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이미 얇게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배가 기울 때마다, 그 물이 이쪽저쪽으로 쏟아졌다. 죄수들의 발꿈치와 종아리를 적셨다.

“저기, 저쪽 이음매에 헝겊이라도 틀어막아! 곡식까지 젖으면 위에서 난리난다!”

군졸 둘이 선창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며, 항아리와 포대 사이를 헤집었다.

연후 쪽으로 다가오던 군졸 하나가 욕을 했다.

“이 놈들 왜 이렇게 몰려 앉았어! 저리 좀 비켜!”

배가 다시 한 번 크게 기울면서, 군졸의 몸이 연후 쪽으로 쏠렸다. 군졸은 중심을 잡으려고 옆에 있던 의자와, 죄수의 어깨에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군졸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열쇠꾸러미가 연후의 눈앞으로 툭, 떨어졌다.

찰나였다.

열쇠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기울어진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듯 흘러가다가, 연후의 맨발에 닿았다.

찬 금속의 감촉이 발바닥을 스쳤다.

연후는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오므렸다. 열쇠가 발가락과 바닥 사이에 끼었다.

군졸은 그걸 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욕을 내뱉으며, 다른 쪽으로 가서 물 새는 틈을 막기 바빴다.

선창 안쪽에서 누군가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네…”

희미한 목소리로, 연후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속삭였다.

“발을 더 당겨.”

연후는 말없이 발을 안쪽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열쇠는 더 깊이 발바닥 아래로 숨었다. 물이 출렁이면서 발가락 사이를 한 번 더 쓸고 지나갔지만, 열쇠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군졸들이 일잠동안 선창 안쪽으로 몰려 있으면서, 의자 쪽은 잠시 시선에서 벗어났다.

“시선 아래로 내리지 마라.”

사내가 다시 속삭였다.

“지금 고개 숙이면, 떨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냥 앞만 봐.”

연후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코 안으로는 축축한 나무 냄새와 바닷내,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여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쇠를…’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허리를 숙여 발밑의 열쇠를 줍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포승줄에 묶인 손으로는 그보다 더 힘들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옆의 사내가 그 작은 떨림까지 읽은 듯 말했다.

“배는 좀 더 흔들릴 거야. 그러다 보면, 너만 엎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 말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배가 더 요동치면,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은 언젠가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포승줄이든, 상체든, 어쨌든 몸 전체가 아래로 쏠린다.

발밑의 열쇠도, 그때 함께 따라올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연후는 그 생각을 반복했다.

형조로 가는 길 위에서, 이런 우연이 또 한 번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갑판 위에서는 여전히 고함과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붙었다! 오른쪽 선미 쪽이다!”

“화살 준비해!”

번개가 또 한 번 하늘을 쪼갰다. 선창 문 틈으로 들어온 빛 사이로,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이 찢어지듯 들려왔다.

그 비명과 함께, 배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그 흔들림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배의 옆구리를 파도가 세게 후려치면서, 배 자체가 한쪽으로 아예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잡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선창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의자나 기둥을 붙잡았다. 그러나 포승줄에 묶인 몸으로는,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연후도 의자 모서리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배가 기울면서, 의자에서 그의 몸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몸이 옆으로 쓰러지는 순간, 발밑에서 열쇠가 함께 움직였다.

연후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웅크렸다.

포승줄이 당겨지며 손목이 바닥에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발가락 사이에 끼인 금속이 다시 한번 발바닥을 쿡 찔렀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연후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목을 최대한 아래로 내리고, 손가락을 뻗었다. 포승줄에 묶인 탓에 손을 제대로 펼 수 없었지만, 손끝의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나무판과 발바닥 사이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연후는 숨을 죽였다.

파도가 한 번 더 배 옆을 때렸다. 선창 바닥을 가로질러 고인 물이 몰려와, 그의 팔과 얼굴을 적셨다. 그 물살 속에서, 열쇠가 손끝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손가락을 더 힘주어 오므렸다.

찰칵.

금속 몇 개가 서로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물소리와 고함 소리 사이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연후는 마침내 열쇠꾸러미를 손에 쥐었다.

“일어나라!”

위쪽에서 군졸의 고함이 들렸다.

“밑에 있는 놈들, 쓸데없이 넘어져 있지 말고, 제자리로 앉아!”

선창 안을 둘러보던 군졸 하나가 연후 쪽으로 걸어오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배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갑판에서 “붙었다!”라는 고함과 함께, 화살이 날아가는 휘파람 소리가 바다 위를 가르며 지나갔다. 누군가의 비명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군졸은 연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위로 뛰어올라갔다.

“문 단단히 닫아! 이 놈들 올라오면 더 골치 아프다!”

그의 외침과 함께, 선창 문이 쾅 하고 닫혔다. 걸쇠가 제대로 잠겼는지, 철과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더 났다.

선창 안은 다시 어둠에 가까운 어스름으로 가라앉았다.

연후는 바닥에 쓰러진 채, 손 안에 쥔 열쇠를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옆에서 사내의 숨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가졌냐.”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잘했다.”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건, 쇠사슬뿐이다.”


열쇠꾸러미는 생각보다 낡아 있었다.

금속 표면에는 녹이 살짝 슬어 있었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손이 묶인 채로는 하나하나 살펴볼 수도 없었다.

연후는 몸을 조금 일으켜, 등을 의자에 기대고 앉았다. 손목은 여전히 포승줄에 묶여 있었지만, 손바닥은 다행히 열쇠를 감쌀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손 안에서 열쇠들을 더듬었다. 모양과 크기를 가늠하며, 어느 것이 쇠사슬 자물쇠에 들어갈 만한지 추측했다.

옆의 사내가 다시 속삭였다.

“네 손목 묶은 줄부터 풀어라. 쇠사슬은 그 다음이다.”

맞는 말이었다. 손이 풀리지 않으면, 쇠사슬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연후는 손목 위쪽, 매듭이 묶인 부분을 더듬어 찾아냈다. 꽉 죄어 묶어놓아서 매듭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매듭의 틈 사이로, 실 한 올 정도는 열쇠 끝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균형을 잡기 힘든 상황에서, 손목을 비틀며 매듭을 더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시간이… 있을까요.”

연후가 숨을 고르며 낮게 물었다.

“시간?”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형조에 도착하기 전까지 있겠지. 그 전에 배가 부서지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고.”

말끝은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거웠다.

연후는 대답 대신, 손에 쥔 열쇠를 하나 골라 매듭 틈 사이에 밀어 넣었다. 쇠 끝이 올바른 방향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매듭 일부가 미세하게 들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숨을 멈추고, 손목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배가 기울 때마다 쇠 끝이 다시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해라.”

사내가 말했다.

“급히 할수록 손만 다친다. 어차피 길은… 곧 열릴 거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배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엔 단순한 파도 때문만이 아니었다.

쿵, 하는 충격이 배 전체를 울렸다.

배 옆구리에 무엇인가가 그대로 들이받은 듯한 소리였다.

“붙었다!”

갑판 위에서 또 다시 고함이 터졌다.

“저놈들이 배 옆에 사다리를 걸었다!”

“잘라내지 못하면, 여기까지 기어오를 거다!”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내려왔다.

연후의 손목도 그 충격에 덩달아 흔들렸다. 매듭 틈에 들어가 있던 열쇠 하나가 툭 빠져나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괜찮다.”

사내가 낮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저 위가 더 시끄러워질수록, 여긴 잠깐씩 비게 된다.”

사내의 말대로였다.

갑판 위는 이미 전쟁터였다. 화살이 날아가고, 칼과 창이 부딪히고, 누군가는 바다로 떨어졌다. 그 소란 속에서, 선창 안까지 신경 쓸 여유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연후는 열쇠들을 다시 손 안에서 모았다.

이제는 손끝 감각만으로, 어떤 것이 좀 더 날카롭고 얇은지, 어떤 것이 더 두툼한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가장 얇고 길쭉한 열쇠 하나를 골라, 다시 매듭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감이 왔다.

매듭이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줄이 손목을 죄는 힘이, 이전보다 미세하게나마 줄어들었다.

연후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손가락 끝에 힘을 더했을 때였다.

웅– 하고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 위에서 들려왔다.

천둥과는 다른 소리였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돛을 가득 머금은 채 비틀어대는 소리.

곧이어, 배 전체가 한쪽으로 미끄러지듯 쏠렸다.

“잡아!”

누군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선창 안의 대부분이 동시에 한쪽 벽으로 미끄러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죄수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항아리 몇 개가 굴러가며 깨졌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물과 곡식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연후도 그대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포승줄이 다시 한 번 손목을 잡아당겼고, 그는 몸을 웅크리며 벽에 부딪히지 않으려 했다.

그 충격에, 손목을 조이던 매듭이 한 번 더 삐걱거렸다.

그리고, 느슨해졌다.

수십 번 문질러진 끝에 이미 닳을 대로 닳아 있었던 줄이,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미세하게 풀린 것이다.

연후는 숨을 들이켰다. 손목을 살짝 비틀자, 줄이 더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모으고 있던 자세에서, 그는 천천히 손목을 반대로 밀어냈다.

문득, 손등을 감싸고 있던 압박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포승줄 매듭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손을 빼낼 수 있을 만큼은 헐거워져 있었다.

연후는 거의 숨도 쉬지 않은 채, 손을 빼냈다.

오랫동안 꽉 묶여 있던 탓에, 손목 위쪽엔 붉게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피가 다시 흐르면서 쓰라린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잊은 듯했다.

자유로워진 두 손이 어색했다.

‘풀렸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됐느냐.”

옆에서 사내가 물었다.

연후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좋다.”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이제 쇠사슬이다.”


선창 안쪽, 바닥에 고정된 쇠고리에 굵은 쇠사슬이 몇 줄 매달려 있었다. 출항할 때엔 죄수들의 발목을 그 쇠사슬에 묶어두려 했으나, 형조까지 거리가 길지 않다는 이유로, 아직 완전히 채우지 않은 채 일부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갑판 위가 혼란스러워진 지금, 누구 하나 그걸 다시 확인하러 내려올 여유는 없어 보였다.

연후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바닥으로 기어갔다. 다른 죄수들 사이를 비집고, 쇠사슬이 모인 곳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배가 계속 기울고 있었기에,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넘어지거나 들키면, 모든 게 끝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위쪽에 쏠려 있었다.

“살려줘라!”

“피해! 저놈이 내려온다!”

누군가는 기도하듯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욕을 내뱉었다.

연후는 그 틈을 이용해, 쇠사슬이 모인 기둥 옆까지 몸을 밀어 넣었다.

쇠사슬 끝에는 작은 자물쇠들이 달려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이미 채워져 있었고, 몇 개는 빈 채 바닥을 긁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손 안의 열쇠들을 더듬었다.

손이 떨렸다.

처음 자물쇠에 열쇠를 넣었을 때, 열쇠는 들어가지 않았다. 방향도, 크기도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자물쇠 구멍보다 열쇠가 굵거나, 모양이 달랐다.

“침착해라.”

사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언제 이쪽으로 기어왔는지, 그는 바로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모든 자물쇠는 하나에만 맞는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는 반드시 맞는다는 뜻이다.”

연후는 손가락의 힘을 조금 뺐다.

서두르면 손이 먼저 부러질 것이다.

그는 가장 얇고 길쭉해 보이는 열쇠 하나를 골라, 자물쇠 구멍에 맞춰 넣었다.

이번에는, 들어갔다.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달랐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전해졌다.

연후는 숨을 삼켰다.

조금 힘을 주어 열쇠를 돌리자, 자물쇠 안쪽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자물쇠가 풀렸다.

쇠사슬 한 줄이 느슨해지며 바닥으로 덜렁 떨어졌다.

그 순간, 배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이번엔 옆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선창 천장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나뭇조각과 먼지가 죄수들 위로 쏟아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선창까지 부서지는 거 아니냐!”

“윗놈들이 싸우다 말고, 아랫놈들 관까지 무너뜨리겠군!”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연후는 쇠사슬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에 둘둘 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정돈된 쇠사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물쇠가 풀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든 끊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로 도망치는 일은, 한 번에 모든 걸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씩, 조금씩, 준비를 쌓아야 했다.

손목이 자유로워졌고, 쇠사슬도 하나 풀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언제, 어디로 뛰어야 하는가.’


배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갑판 위 소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왜구들의 배는 몇 척인지, 어디까지 붙었는지, 이 배가 이길 수 있을지, 질지, 그 어떤 것도 선창 안의 죄수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배가,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것.

파도와 바람, 그리고 외부에서 들이받는 힘에 밀려, 배가 원래의 항로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어긋난다는 건, 곧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 배가 뒤집히면, 우리는…”

누군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위에서는 살려고 싸우고, 아래에서는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구나.”

사내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근데 있잖냐, 연후야.”

“예…”

“사실 위나 아래나, 죽을 놈은 죽는다.”

그 말에, 연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지막에 어디에 서 있을지는, 결국 자기 선택인 거다.”

사내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넌 어디에 서고 싶으냐.”

육지. 형조. 형장. 곤장. 교수형. 능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바다.

정의도, 판결도, 문서도 없는 곳.

오직 물결과 바람만 있는 곳.

연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내가 작게 웃었다.

“좋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둥 소리는 조금 멀어졌지만, 파도는 여전히 거칠었다. 갑판 위에서 고함치는 소리는 줄어들었고, 대신 누군가의 신음과, 무너지는 나무 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선창 문은 아예 잠긴 채로 열리지 않았다. 누구도 아래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연후는 그 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나무판자 한 장. 그 너머에 있는 밤하늘과 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 순간, 배가 또 한 번 크게 기울었다.

이번엔 이전보다 더 깊게.

선창 안의 죄수들이 한쪽 벽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어떤 이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그대로 쓰러졌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에게 깔렸다. 곳곳에서 비명과 욕설이 터졌다.

그리고, 선창 위쪽 어디선가,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굵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금속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소리였다.

갑판과 선창 사이를 지탱하던 어딘가의 쇠사슬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그 충격에, 선창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걸쇠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문이 틀어지면서, 그 사이로 더 넓은 틈이 벌어졌다.

저 너머로, 빗물과 바닷바람, 그리고 아주 조금의 밤하늘이 보였다.

연후는 그 틈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결정했는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손목에 아직 남아 있는 포승줄을 한 번 감았다가 풀며, 손 감각을 다시 확인했다. 손 안의 열쇠꾸러미는 이제 쓸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 대신, 쇠사슬을 감아놓았던 의자 다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쇠사슬 끝을 한 번 잡아당기자, 자물쇠가 이미 풀려 있던 탓에, 쇠사슬이 쉽게 벗겨졌다.

그 순간, 사내가 낮게 말했다.

“결정했느냐.”

연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뛰어라.”


선창 문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하지만 배가 기울어진 덕분에, 몸을 굴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쪽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연후는 허리를 낮추고, 손과 무릎으로 기어갔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죄수들 사이를 비집고, 물이 고인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등 뒤에서는 누군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가, 이내 놓았다.

“어디 가는 거냐…”

누군가가 흐릿하게 물었지만, 연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창 문 아래까지 도달했을 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문은 반쯤 틀어진 채, 한쪽이 위로 들려 있었다. 그 틈으로 바닷물이 튀어 들어왔고, 차가운 공기가 선창 안을 휘감았다.

계단 위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갑판으로 나가 싸우고 있는 듯했다.

연후는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물과 피가 섞여 미끄러웠지만, 손가락으로 나무결을 깊게 움켜쥐었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위로 올라갈수록, 소리가 더 커졌다. 파도가 배 옆을 치는 소리, 돛대가 꺾어지는 소리, 사람의 비명과 고함.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을 때, 거대한 소리가 그의 귀를 갈랐다.

하늘에서 천둥이 터졌다.

동시에 번개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짧은 빛 속에서, 연후는 모든 것을 보았다.

부서진 난간, 피로 물든 갑판, 쓰러져 있는 수군과 알 수 없는 옷차림의 사내들, 배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배들의 그림자, 그 위에서 칼을 들고 올라타려는 왜구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넘실대는 어두운 물결.

바다.

누군가 연후를 발견하고 고함쳤다.

“야, 거기! 밑에서 뭐가 올라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한 번 더 크게 기울었다.

이번에는,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배를 들어 올린 뒤, 다시 내던지는 것 같았다.

연후는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손이 난간을 찾았고, 그 난간 너머로, 끝없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물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번개의 빛을 받아, 찰나 동안 철빛으로 반짝였다.

그 순간, 연후의 머릿속에 한 문장이 지나갔다.

‘육지는 나를 죄인이라 불렀다.’

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바다는 정직하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불 속에서, 그는 그 말을 붙잡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물 위에서, 그는 그 말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난간을 딛고 일어섰다.

누군가가 그의 옷깃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물기와 피에 젖은 천은 쉽게 손을 빠져나갔다.

연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았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끌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길을 택하지 못한 죽음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짜디짠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덮쳤다.

처음 부딪히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가슴이 조여들었고, 귀 안쪽으로 물소리가 들이쳤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흐릿한 어둠뿐이었다. 위쪽에서 어렴풋이 흔들리는 빛 하나가, 어느 쪽이 위인지 알려주려 애쓰는 듯 깜빡였다.

연후는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옷이 물을 머금어 무거워졌다.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위로…’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는 팔과 다리를 마구 움직였다. 폐 안의 공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목과 가슴이 타는 것처럼 아파왔다.

어렴풋이, 물 위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과는 다른, 나무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였다.

배였다.

그가 뛰어내린 배가, 폭풍과 바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대신,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거센 물살이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몸이 한 번 더 회전했다. 위아래가 다시 뒤섞였다.

숨을 참고 있는 시간이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어딘가에서 뿌연 빛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위쪽이었다.

연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듯 팔을 뻗었다. 물이 귀를 때렸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

갑자기, 손목을 무언가가 덥석 잡았다.

거칠지만, 분명한 감촉이었다.

사람의 손.

물 위에서 누군가가 그를 끌어당겼다.

연후의 몸이 물 위로 끌려 올라갔다. 냉기와 함께, 빗물과 바람이 다시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이쪽으로!”

낯선 언어가 아니라, 분명히 조선 말이었다.

중간중간 숨이 섞인 탓에 정확한 단어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투와 억양은 익숙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와 옷깃을 붙잡고, 또 다른 누군가가 허리춤을 들어 올렸다.

거친 나무판자의 감촉이 등 아래로 느껴졌다.

어딘가의 배 위였다.

연후는 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그 전에 기침부터 터졌다.

입 안과 코를 통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숨과 물이 뒤엉켜, 목 안쪽을 타고 오르내렸다.

눈을 겨우 떠보았을 때, 빗물과 등불 빛 사이로 어렴풋이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들은, 조선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살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 폭풍 속에서 떨어진 놈이 사는 것도 처음 보겠네…”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는지, 들어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연후의 시야는 이미 좁아지고 있었다.

바다, 번개, 찢겨 나가던 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던 손.

그 모든 것이 한 장면으로 겹쳐지며, 어두워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적어도, 스스로 길을 택했다.’

바다가 그를 죄인이라 부를지,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육지에서의 길은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연후의 몸은, 조선의 죄인에서, 바다의 도망자가 되어, 낯선 물길 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Lv75 하자와츠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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