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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온 제독 1부 3장-포승줄과 바닷바람

아이콘 하자와츠구미
조회: 35
2025-11-23 03:36:39

밤과 낮이 몇 번 바뀌었는지, 연후는 정확히 셀 수 없었다.

관아 뒷마당의 작은 방은 해가 떠도 어둑했고, 해가 져도 어둑했다. 빗장 아래 좁게 뚫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조금 밝으면 낮, 희미해지면 저녁, 완전히 사라지면 밤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처음 이틀은, 머릿속에 불길과 연기가 떠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안채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다시 살아났다. 눈을 떠도, 그 장면은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셋째 날 즈음부터는, 불보다는 글자가 떠올랐다.

‘패륜의 죄.’

서리가 입을 다물고 손목만 움직여 써 내려가던 그 글씨. 버틸 수 없이 매캐했던 연기 대신, 먹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연후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손목과 팔꿈치를 짧은 포승줄로 묶어놓은 터라,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줄이 문질러진 손목은 상처가 벌어져 딱지가 앉았다가,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문 밖에서 군졸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면, 연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 지금이 형벌이 내려지는 순간인가, 바로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먼저 들곤 했다.

그러나 문은 수라를 들여보내거나, 잠깐 심문을 덧붙이기 위해 열렸다가 다시 닫힐 뿐이었다. 짧은 질문 몇 마디, “혹시 더 생각난 게 없느냐” 같은 형식적인 말들. 연후가 하는 대답도 늘 같았다.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이 바뀌지 않자, 질문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주변에서 오가는 말들로, 연후는 자신의 앞날을 짐작해야 했다.

“형조로 올려야지.”

“패륜이라면, 곤장으로 끝나진 않을 거야.”

“멀리 유배를 보내든지, 교수형이 내려지겠지.”

유배, 교수형.

그 단어들이 연후의 가슴속 어딘가에 박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려앉았다.


어느 새벽, 아직 하늘이 완전히 밝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방 밖이 유난히 분주했다. 군졸들이 서둘러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짧게 외치는 호명 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연후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는 걸 느꼈다.

철 빗장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문이 바깥으로 열리며, 차가운 새벽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최 연후.”

군졸의 목소리가 문틀을 넘어 안으로 떨어졌다.

연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릎과 허리가 뻐근하게 저렸다.

“예.”

“일어나라. 길 떠날 준비 해라.”

그 말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관아에서 형을 집행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 다음은 한 곳뿐이다.

형조.

연후의 목이 저절로 말랐다.

군졸 둘이 안으로 들어와, 연후의 팔을 들어 올렸다. 포승줄을 확인한 뒤, 허리에도 새 줄을 둘렀다. 줄 끝은 밖에서 기다리던 군졸의 손으로 연결됐다.

“고개 숙여.”

익숙한 말이었다. 연후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문턱을 넘었다. 축축한 흙 냄새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관아 마당에는 이미 몇몇 죄수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모두 포승으로 묶인 채, 서로를 이어붙인 긴 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줄 맞춰 서라.”

군졸이 연후를 맨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세웠다. 앞에 서 있는 죄수의 등에는 옛날 칼자국인지, 곤장을 맞은 자국인지 모를 흉터가 어지럽게 나 있었다.

“이 사람은 무슨 죄인가요?”

연후는 본능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해 줄 사람도, 듣고 싶어할 사람도 없었다.

마당 한쪽에서 아까 보았던 현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복 위에 겉옷을 하나 더 걸친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형조로 가는 길이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 가면, 여기서 묻지 못한 것까지 모두 묻게 될 것이다.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피를 보게 될 것이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고 가거라.”

그 말이 위로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었다.

연후는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묘하게 고요했다. 마치 이미 그 말들을 밤마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어 본 사람처럼.

‘형조에 가면, 정말 진짜를 가려 줄까.’

그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억울함을 따져 줄 곳, 진짜를 밝혀 줄 곳이라는 말을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떠올리자, 그 생각은 곧바로 허망하게 느껴졌다.

여기서조차 진실이 글자 하나로 바뀌는 세상인데, 더 높은 곳에 간들 다르겠는가.

“출발!”

군졸의 외침과 함께, 줄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후의 몸도 그에 따라 앞으로 당겨졌다. 그대로 한 줄로 이어진 죄수들이 관아 대문을 빠져나와, 고을의 큰길로 나섰다.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길 위로, 포승줄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시장은 막 준비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상인들은 좌판을 펴고 있었고,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였을 길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람들은 길 양옆으로 물러나, 지나가는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연후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보고 걸었지만, 시선이 꽂히는 느낌은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끝에 있는 아이가 그 집 큰아들이라지?”

“그래, 그 패륜한 자식. 독을 먹이고 불을 질렀다더라.”

“가만 보면 멀쩡하게 생겨서 더 무서워.”

말들은 뒤섞여 그의 귀에 들려왔다.

언젠가 장에 따라 나왔다가, 같은 길을 아버지와 나란히 걸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아버지는 수고가 많다며 웃었다. 연후에게 떡 하나를 쥐여주던 상인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금 그 얼굴들은, 연후의 눈에 닿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길이 조금 높아지는 곳에 이르자, 죄수 행렬이 잠시 속도를 늦췄다. 자연스레 연후의 시야도 조금 더 멀리까지 트였다.

언덕 아래로 고을이 내려다보였다. 지붕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연후의 집이 있었던 자리는 허옇게 비어 있었다. 아직 재가 다 치워지지 않았는지, 그 자리만 색이 다르게 보였다.

‘저기였지.’

연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군졸이 눈치를 채고 등을 한 번 툭 쳤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말리지 않았다.

저 자리가, 며칠 전까지는 집이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마당을 쓸고, 막내가 마루를 뛰어다니고, 아버지가 저녁마다 장부를 펼쳐 앉던 곳.

이제는 잿더미와 흔적뿐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쥐어짜이는 듯 아파왔다.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연후는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울 자격이 있을까.’

마을 사람들 눈에는, 자신의 눈물마저 거짓으로 보일 것이다. 불을 질러놓고 우는 패륜한 자식으로.

“고개 숙여라 했지.”

군졸이 다시 한번 그의 등을 밀었다. 연후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시야에서 고향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낯선 냄새였다.


길을 따라 한참을 더 내려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먼지와 사람 냄새 사이에 섞여, 낯선 기운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더 이어질수록, 그 냄새는 점점 분명해졌다.

비릿한 냄새.

축축한 나무와 젖은 밧줄, 말린 생선과 썩은 해조류의 냄새가 한데 섞인, 바다의 냄새였다.

연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더 크게 들이켰다. 목까지 차오르던 울음 대신, 바닷바람이 폐 깊숙이 들어왔다. 짠 기운이 목 안쪽에 걸렸다.

‘바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멀리 포구를 따라 걷다가, 저쪽 끝에 푸른 선처럼 보이는 수평선을 본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늘 바다를 무서워했다.

“바다는 정직하다, 연후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또렷이 되살아났다.

“육지의 저울눈은 사람 마음 따라 움직이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바로 뒤집어엎어 버리지. 그래서 더 무섭다. 하지만 그렇기에, 거짓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 말이, 어릴 적에는 단지 “바닷일은 힘들고 위험하다”는 정도로만 들렸다.

이제, 형조로 끌려가는 길에 바다 냄새를 맡으며, 연후는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떠올리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저울이 틀어졌다.’

패륜이라는 글자가, 진실보다 먼저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바다는 어떨까.

“멈춰!”

군졸의 외침에, 줄이 한꺼번에 멈췄다. 연후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길 끝으로 포구가 펼쳐져 있었다.

작지 않은 포구였다. 여러 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있었고, 수군 깃발이 펄럭이는 배도 눈에 띄었다. 곡식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었고, 선창 근처에서는 인부들이 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그중 한 척, 다른 배보다 조금 크고, 돛대가 높은 배 옆에 군졸들이 모여 서 있었다. 죄수들을 태울 배인 듯했다.

“한 줄씩 세워!”

군졸들이 줄을 끊어, 죄수들을 몇 명씩 나누어 세웠다. 연후는 세 번째로 배에 오르는 줄에 섰다.

선착장 나무판자는 소금을 먹어 거칠게 부풀어 있었다. 맨발로 디디자, 거친 나무결이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그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스며 올라오고 있어서, 늘 축축했다.

“머리 숙이고 올라가라. 쓸데없이 둘러보고 다닐 생각 말고.”

군졸이 소리치며, 죄수들을 하나씩 배 위로 밀어 올렸다. 사다리는 좁고 가팔랐다. 손이 묶인 상태로 오르내리기에는 위험했다. 앞에 오르던 죄수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자, 뒤에서 군졸이 욕을 하며 등을 떠밀었다.

연후의 차례가 되었다.

사다리 앞에 서자, 순간 바닷바람이 정면에서 얼굴을 스쳤다. 시야 한가운데로,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결이 들어왔다. 육지에서 보던 작은 냇물과는 다른, 넓고 깊은 물이었다.

그는 숨을 한번 길게 들이켰다. 짠내와 나무 냄새, 타르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를 채웠다.

‘이 물길을 따라… 어디까지 가게 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뒤에서 군졸이 밀치는 바람에, 그는 허겁지겁 사다리에 발을 올려야 했다.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발 밑에서 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던 미묘한 흔들림이었다.

갑판 위에 올라서는 순간, 또 다른 군졸이 연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이쪽이다. 아래로 내려가라.”

그들이 가리킨 곳은 배 한가운데, 뱃속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이었다. 어둠이 아래로 길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는 이미 다른 죄수들의 숨소리와, 밧줄이 삭삭 끌리는 소리가 섞여 올라왔다.

“빨리!”

등 뒤에서 재촉하는 소리를 들으며, 연후는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선창은 낮았다. 허리를 조금 굽혀야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양옆으로 긴 나무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항아리와 물통, 포대들이 틈을 채우고 있었다. 곡식 냄새와 축축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군졸들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죄수들을 벤치에 앉혔다. 연후도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포승줄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군졸이 줄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형조까지 가는 동안,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도망칠 데도 없다.”

군졸 하나가 비웃듯 말하고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닫았다. 위에서 빗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갑판과 선창 사이의 작은 틈으로만 불빛이 들어왔다.

어둑한 빛 속에서, 죄수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자,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자, 얼굴 반쪽에 칼자국이 있는 자. 그들 각자에게도 사연이 있을 터였다.

한참을 침묵이 채우고 있던 선창 안에,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죄는 뭐냐.”

연후 옆에 앉은 사내였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지만, 눈빛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연후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패륜이라 합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선창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몇몇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눈빛에는 호기심과 혐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패륜이라.”

옆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가족을… 죽였다는 그거냐.”

연후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선창 앞쪽에 앉았던 다른 죄수 하나가 킬킬 웃음을 흘렸다.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여기서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

비웃음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연후는 그 말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얼굴들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때, 배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선창 안의 모든 몸이 동시에 좌우로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누군가 짧게 욕을 했고, 또 누군가는 “출항하는가 보다”라고 중얼거렸다.

선창 바닥 아래에서부터, 둔탁한 진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노를 젓기 시작한 건지, 돛을 올린 건지,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었다. 다만 배가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연후는 눈을 감았다.

귀를 기울이자, 배 바깥에서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판자를 통해 전달되는 물소리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육지에서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발 아래에서, 온몸 아래에서, 물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문득, 아버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바다는 정직하다.”

육지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면, 바다는 무엇이라 부를까.

답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그는 육지가 아닌 물 위에 있었다.

형조로 가는 길이라고 모두가 말하지만, 연후는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길이 여기서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선창 안 공기가 흔들렸다.

포승줄에 묶인 팔과, 바닷바람이 전해지는 가슴 사이에서, 연후는 처음으로 또렷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다시 육지를 밟을 때, 나는 여전히 조선의 죄인일까.’

배는 이미 포구를 떠나,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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