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하루 종일 흔들렸다.
크게 뒤집히거나 요동치는 건 아니었지만, 땅 위에서라면 느끼지 못했을 미세한 기울기와 흔들림이, 선창 안에 앉아 있는 몸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엔 그게 견디기 어려웠다.
눈을 감으면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 같고, 눈을 뜨면 천장이 기울어 보였다. 속이 울렁거려, 빈속에서 위액만 치솟았다. 구역질을 참지 못한 죄수 하나가 옆에서 바닥에 토해내자, 다른 이들도 연달아 기침과 욕설을 터뜨렸다.
“바다 멀미 아직 안 해본 놈들은 다 저 꼴이지.”
한쪽에 기대 앉아 있던 죄수가 코웃음을 쳤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사내였다. 팔뚝에는 오래전에 족쇄를 찼던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연후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키며, 선창 위쪽 틈에서 들어오는 빛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조까지 얼마나 걸릴까.”
누군가 투덜거리듯 물었다.
“사돈 집 가는 게 아니라, 죄인 끌려가는 길이니, 빨리 가겠지.”
다른 죄수가 대답했다.
“거기 가면 곤장 몇 대 맞고 끝날 놈들만 부럽구나. 난 채무가 얼만데, 그냥 맞고 끝나지는 않을 것 같으니.”
한숨과 미련, 체념이 뒤섞인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넌?”
옆에 앉은 사내가 연후를 흘끗 보며 물었다. 이틀 전에도 말을 걸던 그였다.
“형조까지 가면, 네 죄는 어찌 되겠느냐, 패륜아.”
“몰라서 묻느냐.”
앞쪽에서 누군가 냉소를 던졌다.
“가족을 몰살한 놈이라는데, 거기서 살려 보내겠느냐. 교수형이든 능지든, 골라 받겠지.”
그 말에 몇몇이 킬킬 웃었다. 잔인한 농담이라기보다, 남의 비극 위에라도 웃어야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연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형조에 가면 진짜를 가려 줄지도 모른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수십 번이나 되뇌어 보았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말이 너무도 허망하게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발 아래 선창 바닥을 바라보았다. 틈 사이로 바닷물이 아주 조금씩 스며들어, 축축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무 판자 아래에서,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쿵, 쿵 울렸다.
해가 기울 무렵, 선창 안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위쪽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하게 오갔다. 누군가 돛대 쪽에서 고함을 질렀고, 곧이어 밧줄이 우지끈, 힘주는 소리를 냈다.
“뭐야, 폭풍이라도 오나.”
죄수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까 갑판으로 올라가던 놈이 그러더라.” 다른 이가 받아 말했다. “바람이 바뀌었다고. 이대로 가면 왜구가 어슬렁거리는 물길이랑 겹친다느니 뭐라느니…”
“왜구?”
연후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왜구.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단어였다. 바다에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고, 배를 불태우고, 사람을 잡아간다는 두려움의 이름.
“조운선 노리는 놈들이지 뭐.”
말을 이어가던 죄수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곡식만 실려 있으면 좋겠는데, 죄인까지 실려 있으니, 우릴 건져다 노예로 팔든 죽이든 하겠지.”
누군가 혀를 찼다.
“형조로 끌려가 죽는 거나, 왜구 배에 끌려가 죽는 거나, 죽는 건 매한가지지.”
“그래도 하나 다르지.”
조용히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죄수가 입을 열었다. 머리가 희끗했고, 눈 주변 잔주름이 깊었다.
“형조에 끌려가면 죽는 데도 순서가 있다. 곤장 맞고, 팔다리 부러지고, 며칠을 버티다가 죽지. 눈 부릅뜬 놈 앞에서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게 웃었다.
“왜구 배에 끌려가면, 그 많은 절차가 없어. 팔려가거나, 바로 목이 잘리든지. 어떻게 죽든, 그 자리에서 끝나는 거다.”
“그게 뭐가 좋다는 말이오, 영감.”
“좋다는 게 아니고.”
늙은 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차라리 그 쪽이 낫겠다는 거지.”
선창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연후는 그 말들을 들으며,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다.
형조. 곤장과 교수형, 능지. 누명이 벗겨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관청의 문서에 적힌 ‘패륜’이, 과연 뒤집힐 수 있을까.
‘아버지는… 바다가 정직하다 했다.’
육지는 이미 그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럼, 바다는.
위에서 또 한 번 큰 소리가 났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판 위를 누군가 쿵쿵 달려가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돛을 더 내리지 못하겠느냐!”
“바람이 이상합니다! 그대로 올렸다간, 돛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헛기침 섞인 고함과 함께, 밧줄이 팽팽히 당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배는 조금 전보다 더 세게 흔들렸다. 선창 안의 죄수들이 동시에 한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누군가는 균형을 잃고 의자 아래로 미끄러졌다.
“젠장, 진짜 폭풍 오나 보다.”
누군가가 욕을 내뱉었다.
선창 안쪽에서, 또 다른 죄수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럴 때 배가 부서져서, 얌전히 다 같이 물에 빠지면 좋으련만…”
그 말은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연후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와 등을 조금 세웠다. 포승줄에 묶인 팔이 뻐근했지만, 몸을 최대한 의자에서 떼어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그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밤이 되자, 선창은 더 어두워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빛줄기는 거의 사라졌고, 대신 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이 선창을 채웠다. 파도가 더 거칠어졌다. 배의 옆구리를 치는 물소리가 점점 크게, 더 잦아졌다.
쿵, 쿵, 쿵.
마치 누군가가 바깥에서 나무벽을 내려치는 것처럼.
천둥이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사이사이로, 갑판 위에서 사람들의 고함이 섞였다.
“노를 더 세게 저어!”
“돛을 접으라니까, 못 알아듣겠느냐!”
“저쪽 물길로 붙으면 왜구랑 겹친단 말이다!”
‘왜구.’
그 단어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연후는 등 뒤의 나무판자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불 대신 파도가 떠올랐다.
집을 집어삼키던 불길의 붉은색과, 배를 흔드는 물결의 짙은 먹빛이 마음 속에서 겹쳤다.
‘육지에서 불이 날 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부르고, 아버지를 찾고, 동생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어느 쪽에도 손이 닿지 않았다.
지금은, 바다 위였다.
역시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포승줄에 묶인 몸, 선창 안에 갇힌 발. 배가 기울어도, 노를 젓는 것도, 돛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모두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길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지금은 있었다.
파도가 배 옆을 칠 때마다, 그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쿵.
물이 밀려와 판자를 때리고, 그 떨림이 의자를 통해 엉덩이와 허리, 척추 위로 타고 올라왔다.
쿵.
배 바닥 아래로부터 전해지는 그 진동이, 마치 누군가의 두드림처럼 느껴졌다.
마치 물이, 바다가, 밑에서부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길이 있다.’
도망칠 길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다.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연후는 스스로도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냐. 바다로 도망치다니.’
형조로 가는 길에서 도망친다면, 대부분이 생각하는 건 육지일 것이다. 포승줄을 끊고, 숲으로 도망쳐 산 속으로 숨거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아나는 것.
바다로 도망친다는 건, 곧 물에 빠져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육지에서의 길은 이미 보였다. 형조, 재판, 형벌, 그리고 죽음.
바다로 도망친다면, 그 끝이 무엇이든,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묘하게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야.”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후에 말을 걸던 그 사내였다. 눈이 어둠에 익어,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안 자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연후가 답했다.
“나도 그렇다.”
사내가 벽에 등을 기대며 허리를 쭉 폈다.
“배가 이 정도로 흔들리는 날이면, 늘 생각이 많아지지.”
“자주 타 보셨습니까.”
연후의 물음에, 사내가 킥, 웃음을 흘렸다.
“자주 타봤으면, 여기 이러고 있겠느냐.”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천장을 올려다본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조금 더 탔지. 밀무역에 손을 댔다가 잡힌 적이 있거든. 그때도 이런 배를 탔지.”
밀무역.
연후는 그 단어를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을 하면서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조운선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곡식과 함께 따라붙는 것이 있다고.
“그때도 이렇게, 형조로 향하는 길이었습니까.”
“아니.”
사내가 낮게 웃었다.
“그때는 운이 좋아서, 중간에 왜구를 만났다.”
연후가 눈을 깜빡였다.
“왜구를 만났으면… 죽지 않으셨습니까.”
“죽었으면 여기 있겠느냐.”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도 오늘처럼 바람이 거칠었다. 배가 흔들리고, 돛이 찢어질 것 같았지. 수군들은 왜구를 피해 육지 쪽으로 붙으려 했고, 왜구는 우리를 깊은 바다 쪽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날, 배가 기울면서 선창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었다. 쇠사슬도 한쪽이 풀렸고. 그 틈으로 몇 놈이 밖으로 기어나올 수 있었지.”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선창에서 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난 두 가지를 봤다. 한쪽엔 왜구들이 타고 있는 작은 배들, 다른 한쪽엔 아직 완전히 수평을 잃지 않은 바다가 있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나는 배 위에서 칼을 집어 들 수도 있었고, 그냥 물로 몸을 던질 수도 있었다. 결국 후자를 택했다.”
“물로…?”
연후는 본능적으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래. 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그건 공평하거든.”
그 말은 어딘가 익숙한 말과 닿아 있었다.
바다는 정직하다.
아버지의 말과, 이 사내의 말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결국 죽지 않고 살아남았군요.”
연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물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 다른 배에 건져졌지. 살고 보니… 또 죄를 짓다가 여기까지 온 거고.”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육지에서 도망칠 길이 없을 때, 바다는 마지막 길이 될 수 있다.”
그 말은 단순했지만, 이상하게도 연후의 가슴속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
육지에서의 길은 이미 막혔다. 형조, 형벌, 죽음.
바다에는, 아직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렵고, 낯설고, 공평하기까지 한 길.
“죽고 싶은 게냐?”
사내가 묻는 듯한 톤으로 말을 덧붙였다.
연후는 잠시 침묵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다만…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명을 쓴 죄인으로, 패륜이라는 글자를 등에 달고, 곤장과 교수형 아래에서 천천히 부서져 가는 죽음.
그것만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직 길이 있는 거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선창 안에는 다시 파도 소리와, 멀찍이 들려오는 천둥 소리만이 남았다.
연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다는 여전히 배 옆을 두드리고 있었다.
쿵.
쿵.
마치, 그 물결 하나하나가 한 가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길이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배의 흔들림은 더 심해졌다. 선창 안에서는 여기저기서 신음과 욕설이 섞여 나왔다.
“배가 뒤집히는 거 아니냐!”
“이대로 가다간 돛이 날아가겠어!”
갑판 위에서도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그때, 선창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거친 바닷바람과 함께, 등불 빛이 아래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 더 갖고 내려와! 이놈들이 토해놓은 것 좀 치우고, 밑바닥에 물이라도 뿌려야겠다!”
군졸이 욕을 섞어가며 계단을 내려왔다. 다른 군졸 둘이 물동이와 걸레를 들고 뒤를 따랐다.
그들이 오르내리는 동안, 선창 문은 완전히 닫히지 못한 채 반쯤 열린 상태로 덜컹거렸다. 배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문짝이 함께 덜컹, 덜컹 요동쳤다.
연후는 그 틈으로 보이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았다. 번개가 멀리서 한 줄기 지나갔다. 짧은 순간, 비스듬하게 누운 돛대와, 물보라가 튀기는 갑판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저 위로…’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선창은 숨을 곳이었지만, 동시에 무덤이기도 했다. 문이 닫히면, 그들은 어디로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문이 열린다면. 쇠사슬이 끊어진다면.
배가 흔들릴수록, 선창 문은 더 헐거워지고 있었다.
군졸이 아래에서 욕을 내뱉으며 바닥을 치웠다. 물동이의 물이 이리저리 튀었고, 죄수들의 발밑이 더욱 미끄러워졌다.
“괜히 이 놈들 싣고 가느라 수가 늘었지, 죄다 바다에 던져버리면 속이 편할 텐데.”
군졸 하나가 투덜거렸다.
“헛소리 말고 치우기나 해라.”
다른 군졸이 대꾸했다.
“형조에서 분명히 일일이 인두장 찍어 올리라고 내려왔는데, 빠진 놈 있으면 우리 목줄이 먼저 날아가.”
“그럼 저 패륜아도, 거기까지 무사히 데려다줘야 한다는 말 아니냐.”
투덜거리던 군졸이 선창 안쪽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연후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놈 말이다, 최 연후인가 뭔가. 얌전히 끌려가기엔 눈빛이 영 마음에 안 들어.”
“눈빛이 어떻다고 그러냐.”
“죽을 놈 눈빛이 아니야.”
군졸은 그렇게 말하고는, 걸레를 대충 짜서 한쪽 구석에 던졌다.
연후는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저릿했다.
‘죽을 놈 눈빛이 아니라고…’
그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군졸들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서, 선창 문이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잠시 열린 틈 사이로, 바깥의 밤공기가 한 번 더 선창으로 쓸려 들어왔다.
짠내와 빗물, 그리고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나무 타는 냄새까지 섞인 공기였다.
“문 걸쇠 좀 제대로 걸어라!”
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배가 이 모양이라, 제대로 걸어도 지가 알아서 열렸다 닫혔다 한다!”
농담인지 푸념인지 모를 소리가 뒤따랐다.
선창 문은 완전히 닫히지 못한 채, 살짝 걸린 상태로 덜컹거렸다.
연후는 그 문을 바라보았다.
선창 안과 갑판 위, 갑판과 바다, 바다와 어딘가.
육지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길들이, 머릿속에서 얇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물길은, 단 한 곳으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만큼, 어쩌면 그 안에만 다른 길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폐 안에 짠 공기가 가득 찼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바다는 정직하다.”
육지는 그를 이미 죄인이라고 불렀다.
바다는, 아직 그에게 아무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연후를 두렵게 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끌어당겼다.
물길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직은, 속삭이는 정도로.
하지만 곧,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 같은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