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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온 제독 2부 6장-바다 위에서의 두번째 이름

아이콘 하자와츠구미
조회: 43
2025-11-25 17:38:33

깊은 물속을, 아주 오랫동안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끝이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건지, 위로 빨려 올라가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귀 안쪽에서 물소리가 웅웅 울렸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가도, 곧 멀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전혀 다른 소리로 바뀌었다.


“…야. 숨 쉬어라, 이놈아.”


거친 말투였다. 물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대신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와 나무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눅눅한 천 냄새와 약초 냄새도 섞여 있었다.

연후는 눈꺼풀이 무겁다는 걸 먼저 느꼈다. 눈을 뜨려고 애쓰자, 말라붙은 속눈썹이 서로 들러붙는 느낌이 났다.


“눈 뜨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지독하게 감고 있느냐.”


이번엔 아까보다 더 가까운 목소리였다. 늙은 것도, 젊은 것도 아닌, 벌판에서 평생 바람을 맞은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연후는 겨우 눈을 떴다.

먼저 보인 것은, 거칠게 깎인 나무 천장이었다. 나뭇결 사이로 검은 틈이 드문드문 있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그 틈 사이로 아주 작게 빛이 스며들었다.

그 다음으로,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들어왔다.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사내였다. 피부는 거칠게 그을렸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깊었다. 입가에 걸친 상처 하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듯 붉게 남아 있었다.


“살았네.”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이놈, 물 두어 대접은 삼킨 얼굴인데.”


연후는 입을 떼려다가, 먼저 갈증을 느꼈다.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 겨우 소리를 냈다.


“…여긴…”

“배다.”


사내가 딱 잘라 말했다.


“바다 위 배.”


그는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물이다. 천천히 마셔라. 또 바닷물을 들이키고 싶지 않다면.”


연후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바로 어지럼증에 휘청거렸다. 사내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받쳤다.

바가지는 입술에 살짝 기울어졌다.

맑지는 않았지만, 분명 민물이었다. 비린내 대신 약간의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연후에게는 그 어느 물보다도 달게 느껴졌다.

몇 모금 삼키자, 가슴까지 뜨거워졌다.


“천천히.”


사내가 바가지를 치웠다.


“한 번에 많이 마시면, 너 토하는 꼴 또 봐야 한다.”


연후는 거친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목이 아직 쓰라렸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숨 쉬기가 수월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긴 선창도, 관아의 방도 아니었다.

좁은 선실이었다. 벽과 천장이 모두 나무판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한쪽 벽에는 작은 둥근 창이 하나 뚫려 있었다. 창 밖으로는 바다가 아니라, 회색빛 하늘이 기울어진 채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어깨와 옆구리 곳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손목은 덮어 둔 헝겊 아래로 아직도 쓰라렸다.

연후는 문득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포승줄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그 위로 누군가 헝겊을 감아둔 듯했다.

사내가 그 시선을 따라왔다.


“손목은… 묶이고, 또 한 번 더 묶였던 놈의 팔이구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 이제 묻자. 넌 누구냐.”


연후는 잠시 침을 삼켰다. 목이 뒤틀리는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


“…최 연후입니다.”

“최 연후.”


사내가 이름을 한 번 따라 했다.


“고을 어디 출신이냐.”

“…그건…”


연후는 말끝을 흐렸다.

‘조선 어디’라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사내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그의 손목으로 옮겼다.


“형틀에 한 번 묶이고, 배에서 또 묶인 자국이다.”


그가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


“조운선이다, 죄인이다 하는 소리가 윗놈들 입에서 나오는 걸 얼핏 들었다. 맞느냐.”


연후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형조로 끌려가던 중이었습니다.”

“죄명이 뭐냐.”


이번 질문에는, 대답이 쉽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그 단어가 또다시 자신을 감싸 올 것 같았다. 이미 관아에서, 마을에서, 사람들 입에서 수십 번이나 들었던 단어였다.

그럼에도, 입술은 결국 제 마음대로 움직였다.


“…패륜이라 합니다.”


사내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는 연후를 훑어보듯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그래서 바다에 뛰어들었냐.”


연후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다에 뛰어들었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난간, 번개, 물결, 그리고 허공.

사내가 다시 말했다.


“관에서 내려온 조운선이 왜구한테 습격당했다. 필경 쌀운반선인줄 알았겠지. 폭풍까지 겹쳐서, 배가 어떻게 됐는지는 우리도 정확히 모른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물 위에서 허우적대는 놈 하나를 건졌다. 그게 너다.”


연후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구조된 배가, 조운선이 아니라는 것을.


“여긴… 누구의 배입니까.”

사내는 그 질문에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걸 알면, 네 운명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만… 일단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관의 배는 아니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현감의 관아도, 형조의 문도, 형장의 마당도 아닌 곳.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장님이 널 보자고 하신다.”

그는 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 잠시 돌아보았다.

“네가 여기서 살아남을지, 아니면 다시 바다로 던져질지는, 그 사람이 결정한다.”


선실 문이 열리자, 더 강한 바닷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연후는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좁은 복도를 따라 올라갔다.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갑판이었다.

조운선에서 올랐던 갑판과는 조금 달랐다. 이 배는 더 넓고, 옆구리가 더 불룩했다. 돛대는 두 개였고, 돛의 생김새도 조금 달랐다. 나무는 짙은 색깔의 기름을 칠한 듯 반들거렸고, 밧줄은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소리가 달랐다.

조선말도 들렸지만, 그 사이사이로 낯선 말이 섞여 있었다. 억양이 다른 말, 혀를 굴리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중국말 같기도 했다.

연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난간 쪽에서, 누군가가 그를 보고 중국말로 무슨 말을 했다. 그 옆에 있던 조선 사내가 대충 알아들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계시는 분이 선장님이다.”

아까의 사내가 턱으로 갑판 중앙을 가리켰다.

돛대 뒤쪽, 난간을 등지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나이는 마흔 언저리쯤 되어 보였다. 이마에는 깊게 그을린 자국이 있고, 눈매는 매서웠다.

그는 연후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냐.”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목소리는 바닷바람을 타고 또렷이 들렸다.

“예, 선장님. 물에서 건져 올린 놈입니다.”

아까 연후를 깨우던 사내가 허리를 약간 굽혔다.

“숨은 붙어 있고, 정신도 돌아왔습니다.”

선장이 연후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연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손목에 남은 자국, 아직도 젖어 있는 옷의 흔적, 바다에 오래 있던 사람의 잿빛 안색.

“이름이 뭐냐.”


연후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최 연후입니다.”

“연후.”


선장이 짧게 그 이름을 따라 했다.

“어디 배에서 떨어졌느냐.”

“조운선입니다.”

“조운선.”


선장의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그럼 관의 배에서 떨어졌다는 말이냐.”

“예.”

“스스로 뛰어내린 것이냐, 아니면 떠밀린 것이냐.”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입술이 마르게 느껴졌다.

연후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뛰어내렸습니다.”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바람과 돛의 소리만이 갑판을 채웠다.

선장은 연후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손목으로 옮겼다.


“형틀 자국이다.”

그가 중얼거렸다.

“죄인이었군.”

그 말에는, 추궁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의 무게만 실려 있었다.

“무슨 죄냐.”


연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런 다음, 아까 선실에서처럼 대답했다.


“…패륜이라 합니다.”

선장 주변에 서 있던 선원들 몇이 작게 술렁거렸다. 누군가는 불쾌하다는 듯,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듯 눈길을 보냈다.

선장은 그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죄가 진짜냐, 아니냐.”

그의 다음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연후는 잠시 선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관아 마당에서 자신을 찍어누르던 현감의 눈빛과는 다른 것을 보았다.

그건, 다른 이의 죄를 판단하려는 눈이 아니라, 거래할 물건의 상태를 살피는 눈에 가까웠다.

“저는…”

연후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선장은 “믿고 있다”는 말에 잠깐 입꼬리를 비틀었다.

“믿고 있다,라.”


그는 어깨를 조금 돌려서, 옆에 서 있던 사내를 돌아보았다.

“들었느냐, 도식아.”

아까부터 연후를 부축하던 사내가 웃음을 삼켰다.

“예, 선장님. 요즘 죄인들은 죄를 지은 것도 믿음으로 하는 모양입니다.”

선장은 다시 연후를 향했다.

“좋다, 최 연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죄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와는 상관 없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연후의 가슴을 쿡 찔렀다.

관에서는 모두가 그 질문만 했다. 죄를 지었냐, 안 지었냐. 했느냐, 안 했느냐.

여기서는, 그게 상관 없다고 했다.

“내게 중요한 건 딱 두 가지다.”


선장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첫째, 너를 이 상태로 조선 관아에 되돌려 보내는 게, 내게 이득이냐 아니냐.”

그는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 너를 여기 남겨두고 손발 하나로 쓰는 게, 내게 이득이냐 아니냐.”

나머지 손가락이 접혔다.

“그뿐이다.”

연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선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배는 명나라 쪽으로 간다.”

그 말에, 갑판 위 다른 선원 몇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선의 관아 사람이 들을까 두려워하는 몸짓이었지만, 여기에는 그런 시선이 더 이상 없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운선이건 뭐건, 관의 배와 너무 가까이 붙으면 우리도 귀찮아진다.”

선장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있는 건 짐이든 사람이든, 웬만하면 외면하는 게 상책이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너는 건졌다. 우리 배 사람이 ‘그냥 두면 죽는다’고 소리쳤고, 내가 허락했다. 그러니 지금 넌…”

그의 시선이 연후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네 목숨 값을 나에게 빚진 셈이다.”

연후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선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살고 싶으냐.”

이번 질문은 짧았다.

연후는 거의 생각할 시간도 필요 없었다.

“…예.”

선장은 대답을 한 번 되뇌었다.

“그래. 죽고 싶어서 바다에 뛰어든 놈이면, 굳이 건지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얕은 웃음이 스쳤다.

“여기서 살아남고 싶다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연후는 고개를 들었다.

“무엇입니까.”

“이 배의 사람이 되는 것.”

선장이 대답했다.

“노를 젓든, 밧줄을 당기든, 갑판을 긁든, 물을 퍼내든. 네 손발이 이 배에 붙어 움직이는 동안엔, 아무도 네 목에 줄을 걸지 못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신, 도망치는 순간엔, 네가 스스로 택한 바다로 다시 보내주겠다.”

그 말은 위협이면서도, 동시에 약속 같았다.

육지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선택을 주지 않았다.

여기서는, 최소한 선택의 말은 던져주고 있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최 연후.”

선장의 질문이 다시 한 번 떨어졌다.

연후는 잠시 바닷바람을 들이켰다.

소금 냄새와 타르 냄새, 젖은 밧줄 냄새가 뒤섞여 폐 안으로 들어왔다.

형조의 마당과 형틀, 곤장, 교수형의 밧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신이 떨어져 있던 물 속의 어둠이 다시 떠올랐다.

그 둘 사이에, 지금 이 배가 있었다.


“저는…”

연후는 천천히 말했다.

“이 배에서 살겠습니다.”

선장의 눈빛이 아주 잠깐, 만족스럽게 빛났다.

“좋다.”

그는 옆에 서 있던 도식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이놈은 우리 배 사람이다.”

“이름 그대로 쓰시겠습니까?” 도식이 물었다.

선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조운선에서 떨어진 죄인의 이름을 그대로 올렸다가, 나중에 귀찮아질지 모른다.”

그는 연후를 흘끗 보았다.

“여기서는, 네 죄도, 네 집안도, 아무도 모른다. 그게 너한테도 덜 고역일 것이다.”

도식이 웃었다.

“그럼… 새 이름을 하나 주시지요, 선장님.”


선장은 잠시 바다를 보았다. 파도가 낮게 배 옆을 두드렸다.

“연후라 했지.”

그가 중얼거렸다.

“연(然)은 둘째치고, 후(厚)… 두터울 후자.”

그는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바다 위에서는, 너무 두터워도, 너무 얇아도 오래 못 산다.”

선장이 다시 연후를 향했다.

“이 배에서는, 너를 ‘하후(河厚)’라 부르지.”

“하…”

연후가 나직이 따라 했다.

"물 하(河), 두터울 후(厚).”

선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처럼, 어딘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름이었다.


선장이 덧붙였다.

“육지의 최 연후는 이미 죽었다. 네가 바다에 던졌으니까.”

그의 말이 바람을 타고 귀에 꽂혔다.

“이제 이 배 위에는, 하후만 있다.”

연후는 그 말을 가슴속에서 한 번 더 되뇌었다.

‘육지의 최 연후는 죽었다.’

관의 문서 위에 적힌 ‘패륜’이라는 글자와 함께, 불타버린 집과 잿더미 속에 남겨두고 온 이름.

여기,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하후.”

도식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부터 넌 그거다. 물길 따라 굴러다니는 놈.”

연후 아니 이제는 하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조선의 죄인이었던 이름은, 파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물 위에서 다시 태어난 이름 하나가, 이제 명나라 쪽을 향해 나아가는 이 배의 장부 맨 아래에,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적히기 시작했다.

Lv75 하자와츠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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