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소설/카툰

전체보기

모바일 상단 메뉴

본문 페이지

동쪽에서 온 제독 1부 2장-패륜의 이름

아이콘 하자와츠구미
조회: 40
2025-11-23 03:29:25

포승줄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연후의 손목을 감고 있는 새끼줄은 마치 일부러 살을 헤집으라고 꼬아 만든 것 같았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문질러져 따끔거렸고, 땀이 배어 나오자 그 위로 재와 먼지가 달라붙었다.

“고개 숙여. 죄인이 얼굴을 빳빳이 들고 다니는 법이 어디 있느냐.”

앞에서 걷는 군졸 하나가 툭, 그의 등을 발로 쳤다. 연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더 숙였다. 발끝에만 시선이 고정되자, 흙먼지가 일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밟아온 길인지, 끌려가는 길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길가로 비켜서서 그를 구경했다. 누군가는 입을 가리고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대놓고 손가락질을 했다. 자신이 잘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모두가 낯설게 느껴졌다.

“저 놈이래.”

“저 패륜한 자식이래.”

말들은 그의 등을 향해 날아와 꽂혔다. 연후는 그 말들을 피할 수 없었다. 포승줄로 묶인 두 손 때문에,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관아의 붉은 대문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문 위로 걸린 현판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평소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글자가, 오늘따라 더 크게 보였다.

‘衙門.’

관아. 관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리는 곳.

연후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관이라는 건 말이다, 연후야.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울부짖는 곳이기도 하지만, 억울함이 더해지는 곳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걸 가르는 건… 사람이지.”

그때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포승줄에 묶여 그 문턱을 넘으며, 연후는 어렴풋이 그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군졸들이 그를 끌고 대청마루 앞에 세웠다. 관청 마당은 생각보다 넓었다. 가운데 우물이 있고, 한쪽에는 형틀과 곤장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바닥은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이리 끌어와라.”

대청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지는 않지만, 말끝에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군졸들이 연후를 마루 밑 그늘 앞으로 끌어당겼다.

대청 위에는 관복을 입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관의 품계는 잘 몰랐지만, 주변 아전들의 태도를 보아 현감인 듯했다. 그 옆에는 서리를 몇 명 거느린 아전들이 서서 대나무 패를 들고 있었다.

“이 아이가 연후냐.”

현감이 물었다.

군졸이 고개를 숙였다.

“예, 고을 최 세윤의 장남 연후입니다.”

현감의 시선이 연후에게 옮겨 왔다. 연후는 무릎을 꿇으라는 눈치를 느끼고, 그대로 털썩 앞으로 엎드렸다. 바닥에 닿는 무릎이 아렸지만, 그것마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을 들라.”

연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현감의 눈빛이 그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애도도, 연민도 없었다. 마치 진흙의 상태를 살피는 것처럼, 차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네 이름과 나이를 말해라.”

“최… 연후. 열여덟 살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최 세윤입니다.”

현감은 옆에 있는 아전을 돌아보았다.

“맞느냐.”

아전 하나가 서류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곡 창고 관리 서리 최 세윤. 부인과 자식 셋. 큰아들 연후, 맞습니다.”

현감은 다시 연후를 향했다.

“너는 네 집안에서 이제 혼자 남았다.”

그 한마디가 마치 판결처럼 마당 위에 떨어졌다. 연후의 심장이 한 번 움찔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네 입으로 말해 보아라.”

연후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첫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어젯밤, 어머니와 동생들이 많이 앓았습니다. 형조에서 하인이 약을 가져왔다고 해서… 어머니가 그 약을 물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저는… 아직 앓지 않아 먹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말을 잇는 사이, 기억은 다시 불빛 쪽으로 흘러갔다. 막내가 기침을 하던 모습, 약 냄새, 깊은 밤의 공기, 그리고 불길.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불이 나서… 모두…”

연후는 끝을 맺지 못했다. 목이 메어, 그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감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옆에 선 아전에게 턱짓을 했다.

“약에 관한 조사부터 보고하라.”

아전이 앞으로 나섰다. 대청 아래에 서 있던, 아까 장독대 주변을 살피던 바로 그 아전이었다.

“예.”

그는 종이를 한 장 펼쳐 들어 읽기 시작했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 봉지가 장독대 근처에서 발견되었사온데, 봉지의 반은 이미 불에 그을려 글자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부분에서 ‘형조에서’라는 글귀를 확인하였습니다. 봉지에서 나는 냄새는 약초의 냄새라기보다, 독에 가까운 자극적인 냄새였으며, 저를 포함한 아전 둘이 맡아 보았을 때 같은 소견을 냈습니다.”

마당이 술렁거렸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 독일지도 모르는 약. 그 말들이 사람들의 입술 사이를 오갔다.

현감은 그 소란을 잠시 내버려두다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조용히 하라.”

소리가 가라앉자, 그는 다시 연후를 내려다보았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이 독일지도 모른다. 그 약을 제일 먼저 먹인 사람이 누구냐.”

“어머니입니다.”

연후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어머니께서… 먼저 맛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막내에게, 둘째에게… 차례로 주셨습니다. 저는… 먹지 않았습니다.”

“왜 너는 먹지 않았느냐.”

“전… 아직 괜찮다고, 나중에 먹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셔서…”

현감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집안 모두가 앓고 있다 했는데, 너만 멀쩡했다는 말이로구나.”

그는 손가락으로 대나무 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럼, 불은?”

연후는 멈칫했다.

“불이 난 것을 네가 제일 먼저 알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너를 봤다는 사람이 있더구나.”

현감의 시선이 마당 한켠으로 향했다. 아까 마당에서 말문을 열었던 상인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밤이 깊었을 때, 이 집 큰아들 연후가 우물가를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을 뜨는 것도 아니고, 한참을 서 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이런 화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 탄식은 연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를 ‘그런 놈’으로 굳힌 채, ‘어쩌다 이런 놈이 나왔나’ 하는 탄식에 가까웠다.

현감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연후와, 상인을.

“연후.”

“예…”

“네가 가족을 해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냐.”

그 질문에 연후는 입을 열었다가, 바로 다물었다.

‘나도 알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변명으로만 들릴 것 같았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간신히 짧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현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모른다.”

그는 그 말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약을 먹인 것도 너, 살아남은 것도 너, 우물가에서 서성인 것도 너다. 그런데 어찌 전후 사정을 모두 모른다 하느냐.”

현감의 말투는 여전히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 서서히 짜증 섞인 기색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대청 뒤쪽, 문살 너머에서 또 다른 아전 하나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가 작은 종이뭉치를 들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모습이 잠깐 비쳤다.

연후는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릎 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조에서 약이 내려온 시각, 누가 받아갔는지, 드나든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하였는가.”

현감의 물음에, 아까의 아전이 다시 나섰다.

“예, 나리. 어제 저녁 무렵, 형조에서 파견된 하인이 약봉지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이 집안의 친척 되는 윤 이첨이라 하며, 그가 약을 건네받아 부엌에 두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윤 이첨이라…”

현감은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당 반대편, 사람들 틈 사이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지켜보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향하는 시선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일부러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숨지도 않았다. 그냥, 적당히 가운데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자는 어디 있느냐.”

“저기, 서 있습니다.”

아전이 손짓하자, 윤 이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관복 대신 소박한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자세는 어딘지 익숙하게 절도 있었다.

“윤 이첨, 네가 약을 먼저 받았다 하지 않았느냐.”

현감의 물음에, 윤 이첨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예, 나리. 형조에서 보낸 하인이 관아에 들렀다가, 저를 통해 약을 전해 달라 하기에, 제가 부엌으로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 뒤로는, 집안 사람들이 알아서 썼을 터입니다.”

“봉지를 바꾸거나, 다른 약을 섞거나 하지는 않았느냐.”

현감의 질문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윤 이첨의 대답은 부드러웠다.

“소신이 어찌 그리 큰 죄를 저지르겠습니까. 나리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세윤 형님 댁에 늘 신세를 지던 몸이오니. 감히 그런 짓은 상상도 못 합니다.”

그의 말투는 담담했고, 표정에는 억울함 같은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현감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형조에서 내려온 약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윗전에서 따질 일이다.”

그는 그렇게 말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 약을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먹였는지는, 이 집안의 일이요, 널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다, 연후야.”

현감의 시선이 다시 연후에게 꽂혔다.

“너는 약을 나눠 먹인 자이고, 그 집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다. 게다가 누군가는 밤중에 네가 우물가를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했다. 이만하면 의심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확신.

그 말이 연후의 가슴팍에 돌처럼 떨어졌다. 그는 숨이 턱 막힌 것 같았다.

“저는… 정말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를 짜내듯 말했다.

“어머니랑 동생들을 살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약이 독일 줄 몰랐고, 불도… 제가 지른 것이 아닙니다. 제 목숨이 남았다고 해도, 그게 저 때문에 그런 건…”

“그만하라.”

현감이 손을 내저었다.

“모든 죄인이 다 그렇게 말한다. 본디 죄라는 것은 누구도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기에, 어찌 너만 다르다고 하겠느냐.”

대청 위, 서리 하나가 붓을 들어 종이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먹물이 종이를 적시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현감은 연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최 연후.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족에게 독을 먹이고, 불을 일으켜 죄를 감추려 한 패륜의 죄를 범하였다.”

‘패륜의 죄.’

방금 전까지 사람들 입에서만 맴돌던 단어가, 이제는 관의 문서 위에 올라갔다. 이름처럼, 제목처럼, 꼼꼼하게 쓰여 내려갔다.

“앞으로 형조에 올려 더 문초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 알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죄를 뉘우쳐라.”

현감의 마지막 말은, 연후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

‘문서로… 남았다.’

이제부터 자신을 따라다닐 이름은, ‘최 연후’가 아니라 ‘패륜의 아들’일 것이다. 종이에 한 번 적힌 글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글자였다.

대청 아래에서 군졸 둘이 다가와 연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어서라.”

연후는 무릎에 힘을 주려 했지만, 잘 일어나지지 않았다. 마치 무릎과 바닥 사이에 진흙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군졸들이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마당을 나서는 동안, 아까의 상인, 이웃들, 친척들이 그의 옆을 스쳤다. 누군가는 눈을 피했고, 누군가는 또렷이 그를 노려보았다.

한 친척 여인이 입술을 떨며 연후를 바라보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형님, 저 아이가… 정말…”

그 말끝은 들리지 않았지만, 연후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연후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를 가리키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패륜.

군졸들이 그를 관아 뒷마당 쪽, 죄수를 가두는 초라한 방으로 끌고 갔다. 숨 냄새와 곰팡이 냄새, 오래 묵은 습기가 한데 섞인 좁은 공간이었다.

문이 덜컥 닫히고 빗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연후는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팔은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채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불타던 집, 장독대 위의 약봉지, 마당에서 적히던 글자들, 대청 위에서 붓을 휘두르던 서리의 손목.

‘나는 하지 않았다.’

입술을 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한 글자씩 되뇌었다.

‘나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아 마당에 적힌 글씨는, 이미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남겨진 이름은, 죄인의 이름뿐이었다.

Lv75 하자와츠구미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지금 뜨는 인벤

더보기+

모바일 게시판 리스트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글쓰기

모바일 게시판 페이징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