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영화 내에서 제대로된 설명 없이 스토리가 흘러간다는 점을 지적하시더군요. 메디브가 어쩌다가 타락한건지(그리고 어쩌다가 가로나를...), 굴단이 어떻게 그 힘을 갖게 된건지, 수호자가 뭔지, 알로디는 왜 상자안에 있었는지, 엘프랑 드워프는 왜나왔는지 등등.
배경 설명 하나도 없이 막 튀어나오고 지나갔고, 이 부분에 부정적인 글을 꽤 본 것 같습니다. 혹은 별로 의미 없는 장면들이 많아서 지루했다는 얘기도 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전 영화를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크게 거슬리지 않게 잘 봤고, 워크래프트는 전혀 모르는 저희 어머니도 푹 빠져서 재밌게 봤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뭘까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우선 워크래프트 세계관은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방대한 편입니다. 이걸 영화 안에서 다 납득시키면서 스토리를 진행 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 워크래프트1가 발매되었던 딱 그 시절 수준의 이야기만 다룬다면 몰라도 현재 이야가기 많이 확장되어서 그 시절에도 복잡한 뒷이야가기 많아졌죠.
일단 3부작, 성공하는거 봐서 더 만들 생각인 만큼 첫 영화부터 이런 요소들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영화에서 티탄의 천지창조부터 설명할 수는 없듯이 그 모든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다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이 아니라 '워크래프트: 다큐멘터리'가 되었겠죠.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하시리라 봅니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에서 포인트로 잡는 스토리의 중심축을 잡고 그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설명을 빼버렸다고 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왜 오크와 인간이 전쟁을 시작했는지이며, 로서, 가로나, 메디브, 레인, 카드가, 듀로탄, 굴단, 블랙핸드, 오그림 등의 인물들이 사건에 엮이고 엮어나가는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이들의 과거는 버려둔 채, 현재 행동하는 것에 필요한 설명만 제시함으로써 워크래프트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인지할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배경 지식이 없는채로 영화를 보면 설명을 다 해주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단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게 그렇게 원래 설정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게 되어있습니다. 또 그러한 부분이 판타지 영화스럽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지옥마력은 영화 내에서 메디브가 타락한 원인이자 드레노어가 황폐화된 원흉으로 침공의 발단이 됩니다. 영화 내에서 해준 설명이라곤 생명력을 빨아들여서 강력한 힘을 발휘 한다는거랑 사용자를 타락으로 이끈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초록색이라는거. 눈이나 피부가 초록색이 되고. 너무 심하면 악마같이 외형이 변한다는 것도 있군요.
워크래프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원래 그런건가보다하고 넘어갈 부분입니다. 강력하지만 그 대가가 어마어마한 사악한 힘이라는, 판타지에서 낮설지 않은 힘입니다. 또한 영화에서는 알로디가 카드가에게 알려주길, 빛은 어둠이 되고, 어둠은 빛이 된다고 했고, 이 말을 떠올린 카드가가 지옥마력에 범벅이 되었을 때 그걸 전부 빛으로 바꿔서 타락하지 않고 견뎌냅니다. 이 역시 모르는 사람에게는 '원래 그런건가보다'.
실제로 지옥마력은 비전마력과 동일하면서 일종의 다른 스펙트럼의 힘이라고 최근 설정이 밝혀졌죠. 고로 작중 카드가는 실제 워크 스토리상으론 대량의 지옥마력을 비전마력으로 변환한 것인데, 제어는 못하고 터트려서 일대 숲을 날리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합니다. 와우에서도 이런짓 하는 캐릭터 못본거 같은데...(이거 왠지 하이잘 산에서 아키몬드 레이드 때 또 써먹을거 같은 기분이...) 실제 어둠과 빛은 지옥마력과 비전마력과는 별개의 힘이지만, 그걸 관객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이해하기 쉬운 빛과 어둠으로 단순화 했다고 봅니다.
작중 중반까지 메디브가 빌빌 거리는 것도 후반부에 지옥마력에 무릎꿇은 이후로 생생해지는 연출로인해 지옥마력에 저항하거나 먹히는 중이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충 넘겨짚을 수 있습니다.
메디브가 언제 어쩌다가 지옥마력에 손을 대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설명이 없지만 호기심이 강해서 이것저것 탐구하고 다녔다는 대사에서 '그러다가 손댔구나' 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도 처음 블랙핸드와 마주쳤을 때 익숙하게 지옥마력을 역이용하는 모습에서 직접 다룰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게 깊이 빠져들어서 먹히고 말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불타는 군단의 간섭이 없을 수 없지만 굴단의 경우도 그렇고 악역이 분산되지 않고 집중되도록 악마들의 배후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게 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굴단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지옥마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죠. 이 역시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사악한 마법사 이미지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영화 보는데 지장은 없습니다. 그냥 '나쁜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수준이죠. 굳이 추측한다면 메디브가 드레노어에 갔을 때 굴단에게 지옥마력을 전수 했고(혹은 그 반대로) 둘이서 쿵짝이 잘맞아서 차원문 여는 것까지 꾸미게 된게 아닐까 하는 정도라고 봅니다.
지옥마력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설명이 없는 부분들이 몰라도 영화 흐름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입니다. 궁금한 사람들에겐 나중에 찾아 볼 수 있도록 따로 자료를 마련하거나 그냥 워크래프트 팬들에게 물어보면 될테니까요.
달라란 및 키린토는 그냥 카드가가 예전에 도망쳤던 마법사들이 모인 곳 정도의 느낌이었을테고 그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스토리에 크게 지장을 주진 않으니까요. 다만 알로디의 존재를 제외하고 스토리상 비중이 거의 없는 달라란과 키린토를 영화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서는 영화의 점수를 깎는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굳이 달라란을 소개하지 않고 알로디가 어떻게 해서든 카드가에게 연락을 취해서 진실에 접근하게 만들었어도 "영화"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카드가가 별 비중도 없는 달라란까지 가게 만들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일테니까요.
비단 달라란 문제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한편의 영화로서는 별로 필요 없다고 여겨질만한 장면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들이 평론가들의 박한 평가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워크래프트를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평가했을테니까요. 그들의 평가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므로 단순 추측입니다만 어떤 전하고 싶은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어떤 작품이던지 그렇다고 봅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는 일단 사건이 먼저고 의미를 찾는 것이 나중으로 뒤바뀐 상태입니다. 게임 태생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로서의 가치는 애초부터 높을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처음 계약했던 샘 레이미 감독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평론가들은 만족하고 팬들은 잔뜩 실망하는 영화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사악한 오크의 잔혹한 침공 속에 단결하여 이겨나가는 휴먼 드라마 같은) 하지만 워크래프트는 단순한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워크래프트 이야기를, 그 세계를 스크린에 담는다는 의미 역시 지녔습니다. 그 시간대에 일어난 일 중에서 주인공들과 주요 사건에 관련된 일은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걸 전제로 일반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빼거나 단순화 했을 뿐입니다. 그 장면이 왜 나와야 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건은 벌어졌으니까 보여주기는 하지만 중요하진 않으므로 많이 다루진 않는다는 쪽이라고 봅니다. 관점이 전혀 다르죠.
만약 다른 영화에서 그랬다면 감독 혼자 만족하는 망상의 영화를 찍었다고 욕먹어도 할말 없는 수준일겁니다. 하지만 이미 워크래프트 라는 많은 팬층을 거느린 세계관이 존재하고 그 세계관을 영화로써 일반 관객들과 이어준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똑같이 봐서는 안된다고도 생각합니다. 워크래프트라는 세계관은 영화에서 소재 이상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영화로서의 평은 박했지만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작품으로 나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큰 스토리 흐름도 지키면서 그리고 일반관객들에게도 그 세계를 부담을 주지 않은채로 그럭저럭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잘 선사했다고 봅니다. 물론 반지의 제왕 때 처럼 방대한 원작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지의 제왕만큼 못했다고 해서 영화 워크래프트가 안만드는 편이 나았던 작품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편에 등장했지만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이 2편, 3편에 재등장하면서 워크래프트를 몰랐던 팬들이 1편에서 그들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고싶어집니다. 그롬마쉬나 킬로그 같은 인물들을 말이죠. 안타깝게도 얼라이언스 주요 인사들은 아직 안나온 로데론에 많아서 같은걸 기대할 수는 없겠네요. 혹은 1편에서 비중없이 지나간 장소나 장면이나 사건들이 차기작에서 재등장하면서 '어 저기 전에 나왔던 곳인데' 같은 반응도 기대됩니다.
얼른 2편 3편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