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군과 군단 스토리와 연출이 욕먹는 이유 중 하나가, 엄청 위험하고 무지막지한 적이라고 광고 해놨으면서 실제로 상대해보니 호구스럽게 털려나가는 것 때문이었죠.
여기에서 판다 때의 스토리가 왜 좋게 기억되는 지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는 강철호드의 침공이라는 위협이 있었습니다. 어둠의 문을 통해 상륙한 강철호드의 군대가 저주받은 땅을 휩쓸고, 검은바위 산까지 진군했죠. 이에 위협을 느낀 호드와 얼라이언스는 정예부대를 파견해, 어둠의 문 너머로 강습했죠. 그리고 당장의 침공을 저지했고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드레노어가 강철호드 천지일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죠. 신록지기, 파괴자, 아라코아, 등등 다른 세력도 많았죠. 그러니까 강철 호드가 자기 집안단속도 안하고 아제로스로 쳐들어온 셈인거죠. 게다가 스토리 진행하다보면, 정말 호구같이 털리기만 털리지 우리 쪽에는 그렇게 위협을 느낄만한 타격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굴단에게 굴복하고 말죠.
군단도 비슷합니다. 군단 침공 이벤트로 아제로스 곳곳이 침공받고, 부서진 해변 전투에서 엄청난 역공을 받으면서 불타는 군단의 위협을 강력하게 어필 했습니다. 그런데 부서진 해변의 뒷마당인 부서진 섬 와보니 생각보다 훨씬 평화롭고 깨끗하네요? 게다가 토착 세력들이 건재하기 까지 해서 높은 산의 경우는 아예 자기들끼리 치고받습니다. 발샤라는 아예 악마 하나만 던져놓고는 손을 안쓰죠. (유물 무기 퀘에서는 다른 악마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삽질 해대면서, 직업 연맹의 공격을 결국에는 저지 못하고 직업 수만큼이나 계속 털립니다.
위의 두 사례에서의 공통점은 확장팩 나오기 전과 직후에 엄청난 허세와 과장 광고가 있었다는 거죠. 강철호드는 마라아드가 길길이 날뛰면서 바리안에게 설파하고, 군단은 고대의 전쟁을 뛰어넘는 규모라고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명확한 타도의 대상과 목표가 있으면서도, 드레노어와 부서진 섬에서 여유부릴 상황이 아닐텐데도, 여유롭게 잡일을 하게 되었고요.
이와 반대로 판다리아의 안개는 스토리적 목표와 명분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급하지도 않았죠. 판다리아 진입퀘를 해보면, 평화로운 동네에 호드와 얼라이언스가 난입, 깽판을 쳐서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확장팩의 무대 자체가 비교적 평화로웠던 거죠. 플레이어는 판다리아를 누비면서, 잡일을 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장 급할 게 없었으니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판다리아에서의 스토리 흐름은 오리지널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명확하게 드러난 세계적 위협이 없이, 당장 보이는 주어진 일들을 계속 해내다 보면, 비로소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문제와 위협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말이죠.
간단하게 말해서 판다리아 때는 '이러고 있으면 안되는데...'하는 공통의 위협과 명분, 목표가 없었다는 거죠.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여러 사소한 잡퀘들을 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상당히 덜어냈고요.
물론, 판다리아의 안개가 마냥 평화로운 확장팩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마귀족, 모구, 샤,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갈등 심화, 그리고 가로쉬의 광기라는 위협이 분명히 존재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위협들은 스토리를 진행하다보면, 파헤치고 걷어내면서 찬찬히 알게 되는 것이었죠. 당장 들이닥치지는 않았습니다.
즉, 플레이어가 납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줬었다는 것이죠. 이게 결론이 될 거 같네요.
혹시, 리치왕의 분노와 대격변의 스토리도 당장의 큰 위협과 명분이 있지 않았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한데, 그 두 확장팩은 그래도 최소의 선은 지키면서 스토리를 풀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월드의 분위기도 함께 말이죠.
퀘스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