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1- <기만자의 아들>
군단은 몰락과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르거스에서 맞이한 패배가 결정적이었다. 드레노어와 아제로스에서 겪은 잇따른 실패도 모자라 본거지를 필멸자들에게 침공당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군단은 패배했고, 지도부를 상실하고 말았다.
암흑티탄 살게라스와 악마군주들은 강대한 힘과 지도력으로 오랜 세월 악마들을 하나로 결속해왔다. 그들의 부재는 혼돈의 상징이었던 군단을 혼돈에 빠트렸다. 권력욕에 눈이 먼 악마들은 저마다 지도부의 빈자리를 탐냈다. 그 결과 군단은 여럿으로 쪼개져 내전에 돌입했다. 뒤틀린 황천에서 악마들이 피를 흘리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뒤틀린 황천의 수많은 행성 중 하나인 킬제데른에 한 악마가 있었다. 그는 검붉은 피부의 에레다르처럼 보였다. 등에 돋은 날개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녹색 눈은 영락없이 젊은 시절의 기만자였다. 그는 기만자의 아들로 불렸다.
기만자의 아들은 킬제데른에 기념비처럼 세워진 성소에서 아버지가 처음 정복했던 세계를 감상했다. 지금은 지옥마력이 흘러넘치는 행성이지만 한때 이곳도 비전마법의 요람으로 여겨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아는 역사에 따르면 킬제데른의 이전 이름은 쟈스툴이었다.
사실 쟈스툴이란 이름도 본래 이름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 이름은 킬제덴이 이 행성을 찾기 오래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흉측한 존재가 붙인 이름이었다. 그래서 기만자의 아들은 역사에 기록되었던 이 행성의 찬란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킬제덴이 이 행성에 왔을 당시에 행성은 이미 공허에 거의 잠식되었다. 오랜 세월 저항민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고대신에게 대적했지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킬제덴은 행성을 면밀히 관찰한 후 저항민들에게 모습을 감춘 채 접근했다. 그는 저항민들에게 속삭였다.
“너희의 부질없는 저항은 곧 끝난다. 이 세계는 너희가 그토록 증오해왔던 적이 집어삼킬 것이다.”
저항민들은 그의 속삭임에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오랜 세월 투쟁해온 너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구나. 필연적인 패배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저항해온 너희의 굳센 의지와 강인함은 나를 탄복시켰다.”
저항민 중 일부는 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에게 기회를 주마. 너희의 굳센 의지와 강인함을 온전히 지켜내고 저 흉측한 것들을 정복하는 대의에 동참할 기회를 말이다. 난 너희에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으며, 거짓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 불타는 성전에 동참하겠다는 결의만 있다면 이 행성의 가장 높은 산에서 내 이름을 불러라. 나는 킬제덴이다.”
킬제덴의 속삭임은 저항민들에게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원로들은 고대신의 치밀한 계략이 틀림없다고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싸워왔던 젊은 저항민들은 산에 올라가 그를 불러야 한다고 맞섰다. 격한 논쟁은 원로들이 규율로서 산으로 향하는 걸 금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물론 이런 결정을 모두가 따른 건 아니었다.
젊은 저항민들 중 일부는 느라키라고 불리는 흉측한 적들에 맞서며 진군했다. 산에 도달하기 전에 절반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산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는 단 한 명만 남았다. 홀로 남은 저항민은 느라키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크트락시들이 산을 완전히 포위하는 모습을 내려볼 수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항민은 흔들림 없이 킬제덴의 이름을 외쳤다. 절박하면서도 처절한 외침이었다. 킬제덴은 그의 부름에 응했다.
저항민은 생전 본적이 없었던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붉은 피부의 거대한 존재는 한 쌍의 날개를 지녔고, 머리에는 한 쌍의 큰 뿔이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기운이 저항민의 몸을 뜨겁게 달구는 것만 같았다. 저항민은 경이로운 모습에 저절로 무릎을 꿇고 킬제덴이란 이름을 더 크게 외쳤다. 킬제덴이 듣기에 그의 외침은 환희와 경의가 가득 담겼다.
킬제덴은 양손을 하늘로 들어올리더니 처음 듣는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산이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하더니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녹색 유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색 유성이 땅에 떨어지자 대지가 요동쳤고, 녹색 불꽃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바위 괴물이 일어나 느라키와 크트락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후 땅에서는 수많은 차원문들이 나타나더니 그곳에서 여러 형태의 악마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물결처럼 흘러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쥐고 있는 무기로 고대신의 수하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경이로운 존재는 아나이힐란이었다. 이 거대한 악마들은 전차처럼 느라키들을 짓밟으면서 진격해 거대한 크트락시 장군들을 베어버렸다.
저항민들이 오랜 세월 두려워했던 적들은 처음 보는 악마 군단에게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했다. 킬제덴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저항민을 내려보았다.
“넌 굳센 결의를 지녔구나. 끝없는 투쟁 속에서도 결기를 잃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지혜도 갖추었다. 하지만 네 동족은 내 기대에 부응할 줄 모르는 녀석들이구나. 왜 동족 전부가 이곳으로 오지 않은 것이냐?”
킬제덴은 말을 끝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저항민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제 동족은 단지 주저했을 뿐입니다. 이제 위대한 킬제덴의 힘을 보았으니 기꺼이 성전에 동참할 것입니다. 제가 그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너의 말이 그러하니 네 동족에게 기회를 주겠다. 가서 네 동족 전부를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리하면 너희 모두 새롭게 태어나 위대한 사명을 다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마지막 저항민은 서둘러 동족을 찾아가 불타는 성전에 동참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원로들은 규율을 어긴 그를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홀로 살아남은 그를 비난하고, 킬제덴과 악마들에게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통한 마음을 안고 동족을 떠나 홀로 킬제덴 앞에 섰다.
“제 동족 중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던 이들은 모두 이미 쓰러졌습니다. 이제 저만 남았습니다.”
킬제덴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실망감보다 더 큰 기대를 품었다. 그래서 친히 지옥마력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지옥마력으로 다시 일어선 그는 고대신을 정벌하기에 앞서 동족을 찾아갔다. 그 날 그곳에서 일어난 지옥불꽃이 쟈스툴의 저항민들을 모두 불태웠다. 지옥불꽃 속에서 홀로 나온 그는 악마 군단과 함께 진격했다.
고대신은 자신의 모든 수하들을 동원해서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무한한 군단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마침내 고대신은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전쟁은 킬제덴이 고대신의 심장을 뽑아내는 순간 종지부를 찍었다. 고대신의 심장은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박동했지만 킬제덴이 일으킨 지옥불꽃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기만자의 아들은 그 날의 광경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킬제덴은 자신의 첫 승리를 기념하면서 쟈스툴의 생존자를 치하했다.
“넌 네 동족이 눈 감은 대업에 동참해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맛보았다. 우리 군단은 실패에는 벌을 내리지만 성공에는 큰 보상을 안겨주지. 이제 말해 보아라. 네가 원하는 보상을 말이다. 내 친히 너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제 소망은 단 하나뿐입니다.”
쟈스툴의 생존자는 킬제덴의 물음에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신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흉측한 공허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발붙일 수 없도록 성전의 기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영원한 충복이자 파멸의 전령으로서 대업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킬제덴은 그의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너의 굳건한 결의는 날 흡족하게 만드는구나. 하지만 그건 보상이 아니다. 네가 말하는 건 대업이자 사명이다.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쟈스툴의 생존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육신에 남은 나약한 흔적을 지워주십시오.”
“네 육신에 남은 나약한 흔적을 지워달라?”
“그렇습니다. 저는 패배자에 불과한 제 동족의 살과 피를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새로운 육신이라?”
킬제덴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흥미를 느꼈다. 이 자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을 혐오하고 있는 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동족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왔을 때 그가 더 굳센 결의를 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공허를 혐오하는 만큼 패배주의에 빠진 동족에게 강한 증오를 지녔다. 그런 점은 자신과 닮았다. 동족의 필연을 거부하고 도망친 오랜 친구 벨렌에 대한 증오심은 이자가 느끼는 동족에 대한 혐오와 다르지 않았다. 킬제덴은 왜 자신이 그에게 큰 동질감을 느끼는지 다시 한번 알 것 같았다.
“네 소망을 이루어주겠다. 네게 우리 에레다르의 육신을 허락하리라.”
“감사합니다, 킬제덴이시여! 저의 영원한 주인이시여!”
쟈스툴의 생존자는 감격한 듯 킬제덴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킬제덴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일어난 녹색 불꽃이 쟈스툴의 생존자를 향해 날아가 그의 육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쟈스툴의 생존자는 끔찍한 고통에 울부짖었다. 하지만 고통은 찰나였다. 지옥불꽃은 순식간에 나약한 육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불꽃이 사라지자 그의 영혼만 남았다. 킬제덴이 손을 뻗어서 그의 영혼을 움켜쥐자 강대한 마력이 그의 영혼을 휘감았다. 그는 육신의 죽음 이후 소생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뼈가 자리 잡고 살이 뼈를 감싸는 느낌은 그가 처음 느끼는 황홀함이었다. 몸의 혈관을 통해 불꽃처럼 타오르는 피가 흐르고, 뜨거운 숨결이 몸에 깃드는 것이 큰 환희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킬제덴이 손을 거두자 에레다르가 탄생했다. 킬제덴은 자신의 피조물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보아라. 내가 네게 선사한 선물을.”
킬제덴은 그가 자신의 형상을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마법으로 비추었다. 그는 머리에 난 한 쌍의 뿔과 등에 돋은 한 쌍의 날개를 직접 만져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강인한 손 모두 킬제덴의 형상과 비슷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킬제덴은 자신의 모습을 작게 만들어서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 모든 것은 네가 누릴 보상의 첫 단계에 불과하다. 넌 오늘 나의 불꽃에서 새롭게 일어섰다. 바로 내 아들로서. 이제 네 과거의 이름은 망각의 길로 사라지리라.”
킬제덴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녹색 눈을 번뜩이며 이어 말했다.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마. 너는 ‘아스타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우리 동족의 언어로 ‘불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니라.”
그 날 기만자의 아들은 아스타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논리왕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