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3- <부관>
티콘드리우스가 돌아간 이후 아스타르는 홀로 성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무언가를 더 고심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이도록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고 했다. 자신의 부하 중에 누가 어떤 마음을 품는지는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충성을 바칠 부하도 있겠지만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을 부하도 있을지 몰랐다. 평상시에는 누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누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아스타르를 보좌하는 다섯 부관 중 셋이 제각각 그를 찾아왔다. 처음 찾아온 부관은 치르테였다. 그녀는 매혹적인 세이야드로 아스타르의 명에 따라 여러 세계에 잠입해서 적들의 지휘체계를 교란하거나 조종했고, 때때로 목표물을 암살했다.
“아스타르님. 저는 늘 당신께 말했지요.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이번 기회에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는 게 어떨까요?”
그녀는 자신의 매혹적인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아스타르를 유혹하듯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아스타르에게 자신의 연심과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치르테. 아직도 포기를 모르나?”
“그럼요. 당신은 너무 딱딱한 면이 있어요. 아 물론 딱딱해서 좋은 곳이 있지만 지나치게 완고해서 탈이에요.”
치르테는 아스타르의 옆에 들러붙어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 면이 참 매력적이지만요.”
치르테 다음 방문한 부관은 킨가로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볼카트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거의 기계로 개조한 모아그 기술병으로 군단 내에서도 가장 미치광이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그의 미치광이 기질은 군단에 여러모로 이익이 되었다. 그는 스승인 킨가로스가 그러했듯 수많은 함선과 전쟁병기를 고안하고 만들었다. 아스타르는 그가 만든 전쟁병기들이 효율적으로 적들을 몰살할 때마다 환희를 느꼈다.
“이봐. 제독 나리. 요즘 들어서 이 기술병의 혁신적인 발명품들을 볼 생각을 안 하는군. 설마 그토록 미쳐있던 성전을 접을 생각인가?”
“못본 사이에 몸을 더 개조했구나, 볼카트.”
볼카트의 오른손은 본래도 기계였지만 기계로 된 작은 오른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는 작은 오른손을 위로 쭉 뻗었다.'
“아 이거 말인가? 무거운걸 들기에는 큼직한 놈이 좋지만 섬세한 작업에는 이 작은 놈이 훨씬 더 좋지. 제독 나리도 말만 하라고. 악마의 손도 2개보다는 3개가 편하지 않을까?”
“사양하지. 대신 자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마지막으로 방문한 부관은 이크툰이었다. 이크툰은 모아그 출신 지옥군주로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다. 그는 언제나 적들을 가장 많이 살육했고, 그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적들의 피와 살점이 전쟁터에 흩뿌려졌다.
“군주시여. 우리를 기다리는 전쟁터가 수없이 많습니다. 왜 주저하시고만 있는 것입니까?”
아스타르는 이크툰에게 다가가 거대한 도끼를 잡았다. 금속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피의 탐식자가 취한 피가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저와 피의 탐식자는 피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는 전쟁에 나설 것이니 기다림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아스타르의 말을 듣자 이크툰은 자신의 왼 주먹을 오른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아스타르를 찾아오지 않은 부관은 둘이었다. 아주운과 하메라였다. 아주운은 에레드루인 출신으로 아스타르의 방패라고 불리는 파멸수호병이었다. 수많은 전장에서 그는 언제나 아스타르의 곁을 지켰다. 그의 임무는 오직 아스타르를 지키는 것이었다. 아스타르가 명령하는 순간만 전쟁에서 피의 학살을 즐길 뿐이었다.
아스타르는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킬제데른에 돌아왔을 때 아스타르가 그에게 맡긴 임무는 성소 주위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보나 마나 성소 밖에서 아스타르를 지키는 임무에 전념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명령하지 않은 일에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복종할 뿐이었다.
하메라는 부관들 중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그녀는 한때 제라라는 고위나루에게 빛으로 벼려진 드레나이 구원자였다. 그녀는 오랜 세월 아스타르의 계획을 방해했던 숙적이었다. 빛나는 검을 휘둘러 수많은 악마들을 뒤틀린 황천으로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용맹하고 충직한 빛의 투사도 아스타르의 마수를 피할 수 없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고위나루 제라는 작은 희생을 선택했다. 아직 전장에 빛의 용사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을 두고 제라의 함선이 도주했다. 하메라는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원망을 감출 수 없었다. 아스타르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악마의 칼에 찔린 채 서서히 죽어가는 하메라에게 아스타르가 속삭였다.
“네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널 배신했다.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빛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우...리는 사명을 완...수 했을 뿐이야... 이 악..마야...”
하메라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스타르는 그녀의 말에 크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네 마음에 자리 잡은 원망이 느껴진다. 넌 오랜 세월 빛의 군대를 위해 충정을 바쳤지. 하지만 너의 충정은 그 어떤 보답도 못 받는구나, 저들은 너의 희생을 이용해 도망갔다. 네가 지금 이 순간 원망하는 대상이 누구더냐? 너의 적이었던 나인가? 아니면 저주받을 빛을 강권해온 나루더냐?”
하메라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흐느꼈다. 아스타르는 하메라의 원망을 잘 알았다. 적보다 더 증오스러운 건 언제나 패배자에 불과한 동포였다.
“빛은 너에게 거짓을 고하는 존재들이다. 난 수없이 오랜 세월 성전을 벌이면서 나루가 공허에 잠식하여 세상을 삼키는 모습도 보았다. 빛과 공허는 서로 상반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타락의 씨앗이다. 하메라, 너에게 내가 과거에 얻었던 기회를 주겠다. 빛을 버리고 우리의 대의에 동참하라.”
하메라는 한참을 울었다. 그녀의 감긴 눈에서는 은빛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원망과 증오었다. 이는 아스타르가 동족에게 품었던 그 감정과 같았다.
“나...는... 빛이 증오...스럽습니다...”
하메라는 말을 마친 후 피를 토했다. 감지도 못한 두 눈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 푸른 빛이 나는 피가 아스타르의 얼굴에 튀었지만 아스타르는 그 피를 닦아내지 않았다. 그는 에레다르어로 지옥강령술의 주문을 외웠다.
녹색 불꽃은 하메라의 몸을 감싸면서 그녀의 몸에 걸쳐졌던 보호구들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백옥 같은 나신은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꽃 속에서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서서히 만아리로 변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등에 있던 빛의 문신은 서서히 녹색 빛을 내뿜었다. 하메라가 다시 눈을 뜨자 두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의 온화했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의 사나운 표정이 훨씬 보기 좋았다.
아스타르는 하메라가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와서 불만을 토로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녀는 그동안 아스타르가 주도하는 성전에서 빛에 대한 증오를 강하게 표출해왔다. 특히 아스타르가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빛의 군대를 추격할 때 가장 선두에 선 것도 그녀였다. 성전이 중단된 상황에서 가장 불만이 심한 부관이 그녀일 것이라고 예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스타르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스타르는 자신의 예측과 달리 행동하는 하메라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논리왕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