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아레스섭 프랑스 군인 앙리에트입니다. 오베때 쓴 글들인데 썩히기 아까워 그림과 함께 올려봅니다.(...) 오베 이후 접었다가 최근 다시 시작했는데 인벤에서 정보들을 접하다 발견하게 됐네요, 잘 구경하고갑니다. ㅎㅎ 그림으로 올릴까 글로 올리까 하다가 걍 글로 올립니다. 그림은 서비스입니다.(...) 앙리에트라는 캐릭터는 포르투갈에서 시작해서 프랑스로 망명한 것으로, 처음 만들떄 프랑스가 없던것에 좌절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포르투갈에서 시작했다지요. orz 22/22/29로 그리 고렙은 아닙니다만 나름 천천히 즐기고 있습니다. 1장의 제목은 메인 이벤트에서 따온것입니다. 재미없더래도 걍 즐겁게 봐주세욤 ^^;;
대항해일지 #1. 리스본의 앙리에트#0. 만나다"한잔 하실래요?"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그에게 주점의 여급이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려했지만, 여급은 대답도 채 듣기전에 그의 앞에 럼이 든 잔을 내려놓았다. 아무 주점에나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고 눈 앞의 여급을 바라보았다. 왠만한 남자만큼이나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아니. 아마 글래머인게 맞을 것이다) 어딘지 위압감 있는 느낌의 여성이었다. 보통 주점의 여급들이 여성스럽고 사근사근한 것에 비하면, 그녀는 말하자면 뱃사람에 가까운 바다 냄새가 났다. 그는 기분이 나쁜 것을 잠깐 속으로 눌러죽이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는데."
"걱정마요. 당신더러 사라는건 아니니까."
여급은 그의 잔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잔을 한번에 주욱 들이켜 비워버렸다.
"어디에서 오셨죠? 리스본에서 봤을법한 분은 아니어 보이시네요. 혹시 프랑스인?"
정곡을 찔린터라 당황했다. 평정을 찾으려 한 순간 당혹스러움이 표출되었는지, 여급은 재미있다듯 미소지었다.
"같은 바다의 내음이 나거든요. 나도 적은 리스본에 두고 있지만 본래 프랑스인이니까. 가끔 동향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서 먼저 말을 걸곤 해요. 별 다른 의미는 없으니 신경쓰지 말아요."
"어디 출신이지?"
"마르세이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름없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지금은 없는 장소죠. 어렸을 때 마을을 떠나 리스본에 온 이후로 죽 포르투갈 사람으로 살고있어요. 사실은 실향민인 셈이죠."
"그런가."
조금은 고혹적인 그녀의 표정과 어조에는 깊게 가라앉은 슬픔이 감돌아 있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것 같았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바람같은 고독이다. 그는 말없이 럼주를 목구멍으로 흘려넣고 물방울 맺힌 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여급의 모습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2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였다. 아마도 자신보다는 연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입술의 왼쪽에는 눈에 띌 정도로 큰 점이 하나. 적당히 올려묶은 머리는 밤빛을 닮은 깊은 청보라색이었다. 얼핏 보자면 엄하고 무섭게 생긴 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아하고 여성스러웠다. 흐린 녹색의 눈이 살짝 치켜올라가 자신을 향한다.
"배를 타시나보죠?"
"아아."
"지금은 어느 배에?"
"아쉽게도 실직했어."
"복장을 보아하니 일개 선원은 아닌듯 보이시는군요. 혹시 일항사(일등 항해사)?"
이 여급은 자신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걸까. 그는 낭패를 감추지 못하고 여급을 응시했다. 그녀는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조금은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
"관심이 많거든요. 거기다 10년정도 여급으로 일하다보면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보는 눈이 생긴답니다."
"그건 그렇겠군."
"그래서, 왜 실직 한거죠?"
"배가 난파됐었어. 리스본을 고작 이틀 앞두고서, 그 이틀을 참지 못하고 태풍이 부는걸 감내하고 무리하게 항해하려고 했었기 때문이었지."
여급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태풍이 몰아칠 때에 버젓히 돛을 올리고 항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어린 아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건 나쁘군요. 선장을 설득하진 않았었나요?"
"설득? 하. 설득이 먹힐만한 사람이었으면 배가 난파됐을리가 없잖아! 한두번이 아냐. 몇번이나 그러는데다 사람 말은 말같지도 않게 들으니 같이 일할 맛이 날 리가 없잖아. 때려치고 나온거지."
"그것 참, 고생하셨겠군요. 다음 일자리를 찾을건가요?"
"그래야겠지."
여급을 상대로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닫고 그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빈 잔을 다시 럼으로 채우며 말했다. 담담하고 경쾌한 어조였다.
"제가 괜찮은 일자리를 알아봐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슨?"
"이제 대양 곳곳을 누비고 다녀야 할 해군 준사관 한명이 일항사를 구하고 있어요."
"경험 없는 사람은 질색인데."
"글쎄요, 먼 바다의 항해가 익숙지 않다는걸 본인이 잘 알고 있을테니까. 오히려 고분고분 말에 따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보수는 상선에 비해 그리 후하게 주지는 못할테지만. 신의는 있는 사람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는 럼을 한모금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멋대로 배에서 뛰쳐나온 이상, 당분간은 리스본 내에서 다른 배에서 일항사직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소문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는 법이다. 특히 리스본 근해에서 태풍에 난파돼버린 배의 우스운 이야기 따위는. 소문은 내막을 따지지 않는 법으로 분명 그 어리석은 일의 대부분의 잘못은 일항사였던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실직한 채로 얼마간 빈둥대며 놀바에야 바다를 잘 모르는 풋내기 사관과 함께하며 바다를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날 수 있을까."
"해보시겠어요? 당장에라도 소개해드릴 수 있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결정하고 싶다."
"꼼꼼하신 분이군요."
"이제부터 꼼꼼해지려고 하는거야. 다시 그런 바보같은 선장을 만나긴 싫으니까."
천연덕스러운 그의 대답에 여급은 소리내 웃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곧 데려올테니."
그렇게 말하고 여급은 주점 주인에게 뭐라 이야기 하고선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대부분의 주점이 숙식을 겸하고 있는 것 처럼 이 곳 역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여급의 애인이나 기둥서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망나니 같은 사내가 아니길 빌며 럼 한잔을 추가로 주문해 마셨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에 쥔 잔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 했다. 테이블 건너편으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급이 버젓히 사관복을 갖춰입고, 허리에는 에스터크까지 차고 나타난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잡는다.
"앙리에트 시오라. 일항사가 필요한 준사관이 바로 나일세."
"......길레스......라고 한다. 서(Sir), 아. 아니, 맴(Ma'am)."
"염치없지만 부탁할까 하는데 괜찮을까? 앞으로 서 지중해 깊이 들어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항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 물론 나는 태풍이 불 때 돛을 올리는 바보같은 선장은 아니니까."
그 때 뭐라고 답했는지 길레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성들이 진출하는 일이야 최근에는 흔해졌지만, 주점의 여급이 한 배의 선장이라는데에 적잖은 컬쳐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뭐라 대답했건간에, 그 이후 길레스는 앙리에트의 배에 오르게 되고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봄의 일이었다.
#1. 맞잡다앙리에트의 배인 퍼플 세이렌은 선상 규모가 크지 않은 군용 캐러벨이었다. 보일 듯 말듯하게 칠해진 보라색의 선체 페인팅과, 보라색을 바탕으로 그려진 세이렌의 돛이 그녀의 배의 상징이었다. 승선 인원은 총 28명, 16개의 포문이 장착된 작은 배는 주변의 크고 화려한 배들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기개가 있었다.
"전투용 캐러벨이군."
"작아서 실망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돼. 사실이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실망하긴 했다. 전에 승선했던 상인의 배는 갤리온급이었기에 갑자기 줄어든 일자리가 낯설어 보였다. 아쉬움과 수준 격하에 대한 씁슬함이 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 밖으로 내지 않으려 가슴속으로 눌러두었을텐데, 옆에서 등을 곧게 펴고 자신의 배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너무나 쉽게 간파해냈다. 지금 뿐만이 아니다. 첫 만남 이후로 계속 그러하고 있다.
"아직은 작은 배지만 말야. 몇 년 안으로는 자네가 탔던 갤리온급의 배도 탈 수 있게 될거야. 일등 항해사로써 배를 키워 나간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나?"
"흐음......"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로군."
"그런게 아니다."
"뭐 이해해. 조금 걷지."
길레스는 아까부터 계속 페이스를 잃고 있었다. 제멋대로였던 상인의 곁에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소신을 지켰던 그였다. 그런 소신이 일개 선원에서 일등 항해사로 격상하는 믿거름이 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무던함과 소신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앙리에트에게만은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길레스의 마음과 생각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다듯이 여유롭게 응수하며 그의 굳건함을 무너뜨려갔다. 길레스는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북적이는 항구와 상업지대를 벗어나 앙리에트는 길레스를 전망이 트여있는 망루로 이끌었다. 향하는 도중 앙리에트를 알아보는 몇 사관들과 모험가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는 소탈하게 웃으며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개중에는 그녀의 준사관 임명을 축하한다는 축하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보아하니 여급 시절부터 알던 이들 같았다.
"신기한가? 주점의 여급이 느닷없이 군인이 된다는게."
경치 좋은 망루의 돌로 쌓아올린 단에 걸터앉으며 앙리에트가 물어왔다. 퍽이나 짙은 소금내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뒤에서 길레스를 향해 불고 있었다. 적당히 틀어묶은 짙은 청보라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의 길을 따라 작게 흔들렸다. 배경으로 펼쳐진 늦은 오전의 연청색의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선없는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길레스는 그 광경과 그녀, 둘을 동시에 한 시야에 집어넣으며 답했다.
"솔직히 그렇네."
"어릴 때부터 군인을 동경했어. 아버지께서 군인이셨거든. 프랑스의 해군이셨는데...... 죄를 지어 도망쳐 나오셨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리스본에 정착한거야. 불명예스러운 죄를 짓게 되셨지만 나는 군인인 아버지를 존경했기에 언젠간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었지."
담담한 목소리는 어스름한 회한을 담고있어 길레스의 감정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뭐라 말할 것을 찾지 못하고 있음에, 앙리에트는 작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드리고 싶기도 했어. 아버지는 죄를 사해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그 뒤를 따르듯이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그게 10년전인가 그래. 그 뒤에 줄곧 돌봐주신게 아까 그 주점의 주인이야. 아버지와는 어렸을적부터 친구셨다더군. 도망친 아버지를 받아주신 것도 그분이고. 홀로 남을 날 거두어서 보살펴 주신것도 그분이거든. 그래서 그만큼 보답하기 위해서 주점에서 일하기 시작한거야."
"헌데 왜 이제와서?"
"꿈을 접은건 아니었거든. 10년이나 일했으면 충분하다 생각지 않나? 더 늦으면 꿈에 접근도 하지 못하겠다 싶어서, 최근 여자들도 대양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졌고 여자 사관들도 하나 둘 생기고 있으니 그 틈을 타서 지원한거지. 이래뵈도 후보생 중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임명된거야. 아버지의 피가 몸에 확실히 흐르고 있나보더군."
털털하게 웃으며 고개를 바다쪽으로 돌린다. 옆에서 바라본 모습은 바다를 보는게 아닌, 바다 그 너머를 바라보는듯 했다. 멀찌기서 파도소리와 시끌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이 공간이 저쪽과 다를 바 없는 현실의 공간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혔다. 길레스는 만약 그 소리마저 없었더라면 이 고요한 공간은 완전히 이(異)차원적인 공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다는 지겹지 않아. 나는 훌륭한 군인이 되고싶어. 어린 나이부터 진출하는 이들도 많아.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누구나 인정해주는 군인이 되어 언젠간 프랑스로 돌아가 아버지의 불명예를 벗어나게 해드리고 싶다."
"당신의 항해의 목적은 그러한가?"
"물론- 그뿐만은 아냐. 딱히 국가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려는건 아니지만, 20여년을 살아온 포르투갈에의 보답과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의 시도."
"---바로 그걸세. 바다로 나가는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바다는 가능성이며, 도전이다. 위험이기도 하며, 힘없는 자를 가차없이 묻어버리는 산 무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바다에 도전하려는 젊은이들은 그 치기과 오기, 그리고 용기를 비난받음과 동시에 칭찬받았다. 무엇보다 길레스 자신도 그러했다. 그는 말하자면 일종의 성공한 케이스였다. 그녀의 말에 어린 시절의 치기와 용기가 일순간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나 앙리에트의 말은 그 시절의 어린 자신이 말했던 '가능성'과는 달랐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말의 무게를 느꼈다. 책임과 각오가 담긴 '가능성'. 그녀는 진실로 모든 것을 건 것이다. 저 바다에.
"해 보지. 앞으로 3년."
"3년?"
"3년안에 당신은 지금보다 두 배 더 큰 배에 두 배 더 많은 선원들을 이끌고 인도로 향하고 있을거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염려의 말이었지만 염려의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길레스가 작게 미소를 띄우며 앙리에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리라 생각하는 그 순간 지게 되는겁니다. 선장님. 설마 자신없다고 말씀하시는건 아니시겠지요?"
앙리에트는 어이없다듯 웃더니 길레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조롱조로 정중함을 가장한 그의 비꼼을 맞받아쳤다.
"설마. 그럴리가. 일항사 주제에 선장보다 포부가 더 크길래 놀랬을 뿐이라고?"
#2. 배우다해양 조합은 리스본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다를 누비는 이들을 위한 조합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들을 통합하여 세가지로 칭하는 것이 해양과 모험가, 그리고 상인조합이었다. 그 중에서 해양조합은 군인들이나 용병, 인근해의 해적들에게 국가나 개인의 의뢰를 알선해주고 문제점을 처리하는 대표 기관이었다. 국가에 소속된 정식적인 사관과 병사들을 제외하고서, 자유롭게 활개하는 준사관이나 용병, 해적들은 그 나름의 수입과 명성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양조합에서 의뢰받곤 했다. 또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의 공유처 역시 해양조합에서 이루어졌다.
앙리에트가 처음 군인의 등록 절차를 밟은 곳 역시 해양조합이었다. 군인이 되기 위한 국가의 정식 허가서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준이 되지 못했기에 해양조합의 중개와 보고를 꼭 거쳐야만 했다. 국가가 제시한 테스트를 조합을 통해 지시받고,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간 후 그녀는 군인의 딱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유로운 준사관으로 승급한 이후에도 그녀는 종종 국가의 부름을 받거나, 다른 의뢰를 받기위해 해양조합에 들렀다.
"이게 누구야. 앙리에트 선장이로군."
"오랜만이군요, 마스터."
해양조합의 커다란 이름과는 달리 조합의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나무 냄새가 강한 실내에는 은은한 촛불이 일렁이고 있어 오히려 낡은 서재나 오래된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주변에 비치된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포커를 즐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을 한번 훑고 해양조합의 마스터 앞까지 걸어갔다. 나무재 바닥은 걸을때 마다 유난히 걸음걸이 소리를 크게 울리게했다.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초로의 노인이 웃으며 앙리에트를 바라보았다.
"그간 잘 지냈나?"
"덕분에. 건강하신거같아 기쁘군요."
"아직 죽을때는 멀었어. 요즘 것들은 하나같이 군기가 빠져서 말야. 쉽고 비싼 의뢰만 받을려고 잔머리를 굴리니, 그놈들을 어떻게 요절내기 전까지는 못죽지. 암."
"오---래오래 사셔야겠군요."
"비꼬는건가?"
"아시면서."
한바탕 웃음이 오갔다. 테이블의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을 잠시 돌렸지만 다시 자신들의 일에 매진했다. 앙리에트가 잠깐 몰린 시선에 헛기침을 몇번 하고 근처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일항사를 구했다고?"
"어떻게 아셨죠?"
"그만큼 소문의 대상을 일항사로 구했다니 소문이 안나겠나."
"태풍때 돛 안내린 배의 일항사였다는 것 말이군요."
"잘 알고 있군. 뭐 자네가 선택한 녀석이니 알아서 하겠지."
"생각만큼 나쁜 녀석은 아니에요. 실력도 상당한 것 같고요. 덕분에 저는 매일같이 들볶이고 있지만요."
길레스가 앙리에트의 배의 일항사가 된 후, 배의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변해버렸다. 배의 상태부터 선원들의 기강, 심지어는 앙리에트 본인의 능력과 자질 역시 만만치 않게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3년안에 인도로 보낼 생각으로 열중이었다. 앙리에트의 그런 푸념을 들은 조합 마스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꼼꼼한 젊은이면 좋은 일이지. 그래서 우리 불쌍한 선장님은 어인일로 납셨을꼬?"
"전에 배우다 만 선원 통솔에 관한 강의를 듣고싶어요. 싸울때마다 묶어두거나 난전일 때 깃발을 흔들거나 하는 일은 긴급한 상황이면 힘들다고, 선장 선에서 다 해결할 수 있도록 해오라더군요."
"허허허, 뭘 좀 아는 젊은이군그래? 좋은 보조를 만났어."
조합 마스터의 놀림성 발언에 앙리에트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좋아서 문제랍니다. 그리고 전에 부탁하셨던 서 지중해 깊이 들어가는 의뢰도 슬슬 수락해볼까싶은데요."
"벌써 허가가 났나? 빠르군. 아직 두달도 되지 않았을텐데. 그보다도 브라간사 공작은 어떻게 만났지? 조합을 통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조합 신청 순위가 너무 밀려있어서 다른 방법을 찾다가 살미엔트 길드의 도움을 받게 됐었어요. 디에고 대표께서 직접 소개장을 써주셔서 빨리 접견할 수 있었지요."
"허허, 이거 만만케 볼 사람이 아니군. 벌써 디에고 경과 안면을 튼건가, 응?"
"그렇다기보다, 그 아들분 덕택인거죠."
"알베로인가. 녀석 참 오지랖도 넓어."
살미엔트 길드는 포르투갈의 최고 정점에 놓여있는 길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앙리에트도 익히 들어 알고있는 길드로, 그녀로서도 그 커다란 길드의 대표를 직접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아직 준사관 임명을 받기 전, 소매치기 시비에 휘말렸던 알베로를 우연찮게 도와주게 된 것이 인연이었다. 하필이면 그가 살미엔트 길드 대표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좋은 느낌의 녀석이더군요."
"좋은 녀석이지. 가끔 너무 좋아서 문제긴 하지만."
"젊다는거니까요. 앞으로 크게 될거에요."
"거, 참. 늙은이 앞에서 늙은이 같은 소릴 하다니."
"하하하, 죄송해요. 우선 설명부터 해주시겠어요?"
조합 마스터가 궁얼거리며 뒷편의 책장에서 전술서 한권을 꺼내어 펼쳤다. 젊은 시절 수 많은 전투경험을 쌓고 은퇴한 조합 마스터는 많은 전법과 기술에 능통해 있었기에 실력이 모자란 풋내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초 교육은 받았지만 앙리에트는 뱃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에 선상위의 전술이나 전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함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최근 몇개월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배를 운영할 정도는 되었지만, 일항사인 길레스는 그런 앙리에트의 무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선박을 재편성 하는동안 그녀를 들볶아 조합으로 보내버렸다. 걸려도 단단히 걸린것 같다 생각하며 두시간 정도를 조합 마스터에게 설명을 듣고, 책을 읽었다.
"나머지는 실전에서 겪어보게. 선장이라는 자는 군인이건 아니건 카리스마가 중요한 법이니까. 누가 우위이고 고용주이고 또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자임을 확실히 각인시킨다면 선원들의 움직임은 자연 달라지게 돼 있어."
"10년 여급생활의 버릇이 쉽게 바뀌려나 모르겠군요."
"본인의 카리스마를 믿게나. 그리고 서 지중해로 들어가는건 마르세이유에 연락 문서를 전달하는걸세."
자신없게 대답하는 앙리에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조합 마스터가 서랍에서 두루말이로 말린 서신 한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마도 각 도시간 조합간의 상호 연락 문서일 것이리라. 받아들어 짐속에 잘 챙겨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30일이라고 했었지요? 해 보지요."
"빨리 도착하면 보수도 그만큼 세지. 하지만 기왕 한달의 항해 여정이니 중간중간 기항하면서 각 항구의 발길을 터놓게나."
"그렇게 하지요. 그럼 추후에 리스본에 돌아올 때 뵈어요."
"조심해서 다녀오게."
조합 마스터의 말을 뒤로하고 앙리에트가 해양조합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합 마스터는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알베로를 어리다고 했지만, 초로의 노인인 그의 눈에는 그녀나 알베로나 다를바 없이 어리고 어리숙한 풋내기였을 뿐이었다.
#3. 시작하다그날 바람은 출항하기 좋은 순풍이었다. 앙리에트는 손을 들어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선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이렇게 바람의 가호가 있다면 좋겠군."
"어떻게 될 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러길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녀의 뒤에서 마지막 점검을 지시하고 있던 길레스의 걱정어린 말이 대꾸로 돌아왔다. 한달 기한의, 프랑스 마르세이유까지의 항해는 상당히 장기 항해로 중간중간에 기항을 한다 쳐도 장기 항해를 해본 적 없는 앙리에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길레스가 일항사로 들어온 이후로는 그의 경험과 능력에 따라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긴 셈이었다. 식량과 기항지에서 거래할 교역품을 체크하고 대포의 상태와 선원들의 건강상태까지 챙기는 길레스의 역량에는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전의 선장은 좋은 일항사를 그냥 걷어차버렸군?"
"놀리시는 것이라면 그만 둬 주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 혼자였으면 어떻게 했을지 새삼 걱정스러워 지는데."
"모든 일항사가 이정도는 합니다."
저 정도면 겸손의 도가 지나쳐 오기다. 의외의 면에서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 진실을 그대로 입으로 말했다간 그의 반발을 살게 뻔해보여서 그저 웃는걸로 집어 삼켰다.
"그렇다고 해두지."
길레스가 불만 담긴 눈을 앙리에트에게 돌렸지만 그녀는 시침을 떼고선 갑판의 선수에서 배의 가장 높은 선상으로 올라갔다. 정리를 지시한 길레스가 뒤따른다. 인도로 향하는 상선의 출항식처럼 환대 인파는 없었다. 텅 비어있는 항구를 응시하는 앙리에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길레스가,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머지않을겁니다."
"아니, 그런게 아냐."
"그러면?"
"이게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처음 작은 바사로 시작했던 그 때보다, 지금이 더 처음같다는 기분이 들어. 이렇게 항구와 리스본의 정경을 배 위에서 바라보는게 처음이 아닌데도 이 모든 풍경이 낯설어보인다.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안에서 공존하는 기분이야. 알겠나?"
길레스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선장님께서 그 기분을 앞으로 계속, 변함없이 느끼시고 소중히 여기신다면 당신이 이 바다에서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을겁니다."
"어째서?"
"바다에 대해, 도전 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에 겸손함을 지니고 계신다는 의미일테니까요."
"그런가. 그러한가."
자신을 납득시키려듯 몇번 수긍의 말을 중얼거린 앙리에트가 곧 개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제 위치에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선원들을 둘러보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뿜는 바다는 환송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럽지 않을만큼 현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따스한 봄의 바람냄새를 한껏 음미하고 앙리에트가 외쳤다.
"좋아. 출항한다! 돛을 펼쳐라!"
선원들의 기분좋은 함성소리와 함께 세 개의 메인 마스트에서 커다란 삼각의 돛이 스르륵 펼쳐졌다. 보라색 바탕에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 앙리에트의 돛이었다. 이윽고 펼쳐지는 세 개의 보조돛이 펼쳐지고 육지와 연결돼 있던 유일한 연결고리인 밧줄이 하나씩 풀려갔다. 덜컹, 하고 조금 큰 진동과 함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의 위치를 결정하는 키가 뱅그르르 돌아가며 선수를 항구에서 대양쪽으로 유도한다.
"모두 자리를 지켜라, 진심으로 자네들이 운이 좋은 사내라면 태풍따윈 만나지 않겠지. 무사를 기원하고 있도록. 첫 기항은 세비야다!"
찬연한 태양이 수평선 너머까지 그 빛을 비추고 있었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육지를 아쉽게 바라보기 보다, 언젠가 향할 바다 그 너머를 지켜보기로 했다. 기쁨과 환희가 요동치고 있었다. 작은 일보에 지나지 않지만, 이 일보는 크나큰 천보, 만보의 시작임을 생각하자 오히려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시작'이었다.
"그럼 일을 시작해볼까, 일항사?"
의욕 만전인 앙리에트의 말에 길레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농담조로 답했다. 비아냥대는 어조도 기분나쁨은 전혀 내재하지 않았다.
"제 일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선장님?"
20051013 ra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