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하자마자 와우부터 켰다. 2년 가까이 휴가증 한 장씩 아껴 가며 하던 게임을 이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세상은 이미 리치왕의 분노였다.
노스렌드로 향하던 내 손에는 불타는 성전 때 카라잔에서 먹은 활이 들려 있었다. 이름에 불사조가 들어가던 에픽 활. 에픽이니까 좋은 거라고 믿고 77레벨까지 그 활을 끼고 다녔다.
그러다 100골마 형이 내 캐릭터 창을 봤다. 형이 한마디 했다. "이 활이 이렇게 좋았냐."
그제야 알았다. 내가 이 게임을 정말 못하고 있었다는 걸. 왜 퀘스트 몹 하나 잡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렙업이 남들보다 한참 더뎠는지. 전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전구라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그래도 만렙을 찍고 나서는 낙스라마스에 갔다. 용을 타고 싸우는 레이드에도 갔다. 거기서 먹은 무기를 한참 동안 들고 다녔다. 이번엔 정말 좋은 무기(활, 총이 아닌 보조무기)였다.
울두아르가 나오기 전 잠시 와우를 접었던 100골마 형이 복귀했다. 레이드도 다니고 나름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 내 캐릭터를 보고 형이 흐뭇해하던 게 기억난다.
메아리섬에서 랩터 사라고 골드를 쥐여주던 그 쪼렙이 이렇게 컸다는 게 형도 신기했나 보다.
4월, 울두아르가 열렸고 막공으로 몇 번 따라갔다. 보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바닥에 얼음이 깔리고 거인이 나오던 곳, 나의 울두아르는 거기서 멈췄다.
그 무렵 복학생의 정신이 돌아왔다. 군대에서 차린 정신이 아직 남아 있었는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학이며 공수며 새로 배우는 것들 중에 모자란 부분은 고등학교 EBS 강의까지 찾아 들었다. 나는 와우 대신 도서관으로 갔다. 그렇게 버틴 성적이 꽤 괜찮았고, 성적 장학금도 받았다.
2학기쯤 여자친구가 생겼다. 시험이 끝나면 잠깐 들어와서 마상 레이드를 한두 번 간 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와우 역사상 가장 재미있었다는 리치왕 레이드를 건너뛰었다.
아서스가 얼음왕좌에서 쓰러지던 시절,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2009년과 2010년, 대학교 2학년과 3학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영국 어학연수를 위해 휴학을 앞둔 2011년 1월, 나는 다시 와우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