툼레이더는 3인칭 시점의 캐릭터 움직임과 플랫폼 액션, 자유로운 움직임에 전투, 다층적인 레벨 디자인을 통한 수직 연출에 그리고 저리고 어쩌고 저쩌고... 물론 기술적, 디자인적 부분에서 수많은 혁신이 있었다. 하지만 툼레이더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이걸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뜻도 모른 채 걸죽한 '섹드립'을 따라하게 만드는 듀크 뉴켐이나 마리오, 요시 정도의 '애들용' 캐릭터 정도만 보던 시기. 화끈한 복장과 폴리곤의 뾰족한 삼각 가슴, 쌍권총을 들고 공중 돌기를 하는 라라 크로프트가 곧 툼레이더였다. 게임 캐릭터로 플레이보이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계 대표 섹스 심볼로 통했지만, 동시에 영리하고 독립적인 주인공으로 30년째 시리즈를 이끌어오는 인물. 이건 문화적 아이콘으로 시대를 이어가고 있는 라라 크로프트의 이야기다.
가능성이 만든 쿨한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
1994년 말. 작은 비디오 게임 스튜디오 코어 디자인은 소니의 신형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을 회사 미래로 삼아 새로운 게임 개발을 그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2D가 일반적인 시대에 3D 그래픽을 핵심으로 삼은 게임기 출시 소식은 이 작은 스튜디오에겐 기회이기도 했다. 문제는 어떤 게임을 만드느냐였다. 이때 같은 해 입사했던 신입사원 토비 가드가 아이디어를 꺼냈다. 피라미드 무덤(툼: Tomb)에 들어가 유물을 가져오는 이야기였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첫 작품이 '레이더스(Raiders)'이듯 '툼+레이드'라는 시리즈의 근간이 결정된 시기였다.
문제는 이 게임이 아직은 레이더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라라를 포함해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했던 토비는 첫 주인공의 모습으로 채찍과 모자를 쓴 남성을 그려냈다. 영락없는 레이더스의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너무 비슷해'라며 승인하지 않았다. '독창적으로!'라며 일갈한 대표 제레미 히스 스미스의 말에 토비는 '급발진'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다.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아이디어를 수정한 일이다.

주인공을 여성으로 선택한다는 것 자체는 당시만 해도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플레이어 다수는 남자였고, 여성 주인공에 대한 비전도 불투명했다. 당연히 회사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토비의 결정에도 이유는 있었다. 그는 오락실에서 잘나가던 버추어 파이터 플레이어가 대다수가 여성 캐릭터를 선택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여성 캐릭터가 잘 먹힌다는 가능성을 본 셈이다.
당장 제레미를 찾아간 토비는 설득을 시작했다. 여러 일본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의 인기를 언급하며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언급했다. 여기에 더 유연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면 남성 캐릭터가 할 수 없는 동작도 수행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절대 안된다는 제레미도 버티지 못하고 개발을 수락했다. 훗날 토비는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게 재밌어서'라고 라라 크로프트를 밀어붙인 이유를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반대했던 제레미의 지지가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주인공의 성별이 결정되자 라라 크로프트의 제작에도 속도가 났다. 몇차례 디자인 변화를 거친 끝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핵심 디자인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툼레이더의 프로그래머였던 폴 더글라스는와 함께 홍콩 누아르 영화 속 주윤발의 쌍권총 장면을 게임에 넣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여기에 라틴계 설정의 로라 크루즈(Laura Cruz)라는 이름도 그리스어로 성채를 의미하는 라라로 변경해 신비스러움을 더했다. 더비 지역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선택한 크로프트는 그의 성이 됐다.

특히 토비는 외모만 뛰어난 캐릭터를 넘어, 강인하고 '쿨'한 이미지의 히어로를 추구했다. 그래서 총을 쏘면서도 퍼즐을 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독립적인 인물로 캐릭터를 그려나갔다. 진취적인 음악 성향을 보인 영국 아티스트 네네 체리에 영향을 받았고, 무법자스러운 만화 캐릭터 탱크 걸 역시 참고했다. 뾰족한 삼각 가슴 역시 폴리곤 제약 속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헤어 연출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한계와 극복에 가까운 노력의 결과였다.
섹시함과 영리함이 함께 성장시킨 툼레이더
1996년, 여러 변화와 새로운 시도 속에서 툼레이더는 에이도스의 유통 아래 마침내 정식 출시됐다. 토비의 예상대로 툼레이더는 큰 성공을 거뒀다. 첫 작품만 750만 장이 팔리며 여성 주인공 게임으로서는 사실상 최초, 최대 흥행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토비의 의도와 다른 부분도 있었다. 회사는 섹시한 여성 주인공으로서의 라라 크로프트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다. 광고 문구로 은연 중에 캐릭터의 섹시함을 부각시키고,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린 모습을 게임 잡지에 싣기도 했다. 1999년에는 성인 잡지인 플레이보이에 라라의 3D 캐릭터를 출연시켰다. 이런 부분에 불만을 가져 일찌감치 회사를 떠난 토비는 회사가 누드 치트를 게임에 추가하길 강요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연구는 툼레이더의 성공에 라라 크로프트의 섹시함과 쿨한 히어로의 모습, 두 부분이 모두 영향을 줬다고 분석하고 있다.
분명 남성 플레이어가 더 많았던 시기 섹시한 라라 크로프트의 존재는 게임을 알리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계산이다. 반대로 게임 안에서의 라라의 모습은 훨씬 더 진취적이다. 괴물 앞에서도 농담을 내뱉을 정도로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인물이자, 영국 상류층 특유의 건조한 유머를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여기에 게임 내내 지독하리만큼 집념을 보일 때도 있고, 부모의 유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용병으로의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개발진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이중적인 매력은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핵심 포인트가 됐다. 그리고 이는 토비가 떠난 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첫 작품의 흥행에 이어 툼레이더2는 800만 장이 판매됐고, 6편까지 출시된 클래식 시리즈는 총 5천만 장이 팔렸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출시된 툼레이더 시리즈, 1~5편까지의 흥행은 같은 시기 출시된 파이널 판타지7~9편의 흥행을 능가하기도 했다. 툼레이더가 1990년대 비디오 게임 산업을 견인한 게임 중 하나였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거대한 흥행은 라라 크로프트를 게임 밖으로까지 나오게 계기가 됐다. 시리즈 초기에는 피자헛, 도미노 피자 등 게임 홍보를 위한 스폰서 광고가 이어졌지만, 이후 라라 크로프트가 모델로 여러 상품을 홍보하기 시작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스페인 자동차 그룹 세아트(SEAT)는 라라 크로프트가 직접 알함브라, 이비자 등 세아트 차량을 몰고 적들의 추격을 물리치는 광고를 선보였다. 프랑스 필기구 제조 업체 워터맨, 나이키 등도 관련 상품이나 광고에 라라를 등장시켰고 맥라렌 F1 팀은 F1 드라이버들이 라라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유하기도 했다.

독일 밴드 디 에어츠테는 1998년 곡 '멘너 진트 슈바이네'의 뮤직비디오에 라라 크로프트를 출연시켰다. 디 에어츠테 측이 에이도스에 직접 출연을 요청했는데 해당 곡은 독일 미디어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지켰다. 여기에 1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인기는 곧 광고 이상의 미디어 진출로 이어진다.
시대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라라
오늘날에도 할리우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연기 생활 초창기부터 꾸준히 준수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98년과 1999년에 '조지 월리스', '지아' 등 TV 시리즈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위노나 라이더와 함께 출연한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이런 안젤리나 졸리에게 부족했던 건 대중적 인지도였다. 이를 오늘날 위상으로 끌어올린 작품이 바로 영화 '툼레이더'였다.
게임 속 툼레이더를 옮겨낸 듯한 안젤리나 졸리의 외형과 화려한 액션은 그를 블록버스터 액션 아이콘으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북미에서만 1억 달러를 돌파하며 게임 원작 영화 최초의 1억 달러 흥행 기록을 세웠고,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이전까지 게임 원작 최고 흥행작 타이틀도 쥐고 있었다.
이미 수천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글로벌 팬층을 보유한 원작. 여기에 라라 크로프트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덕분에 실사 버전의 라라 크로프트를 볼 수 있다는 관심이 그대로 극장가로 이어졌다. 에이도스 역시 시리즈 신작이었던 툼레이더5와의 연계 마케팅으로 게임 판매와 영화 관객, 양쪽의 소비 텐션을 모두 끌어올리는 데 힘썼다.

사실 내용적인 차이나 원작 구현의 여러 허점에도 라라 크로프트의 실사 등장만으로 이 정도의 흥행을 가져왔다. 여기에 Top Cow가 선보인 코믹스 역시 2005년까지 50호가 나오며 원작에서 다루지 않았던 수많은 유물과 적들로 이야기의 폭을 넓혔다.
이후 안젤리나 졸리는 후속작 '툼 레이더 2: 판도라의 상자'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영화 외적인 변화가 생겼다. 코어 디자인을 인수했던 에이도스가 제작의 키를 크리스탈 다이내믹스에 넘기며 툼레이더의 새 시대가 열렸다. 크리스탈 다이내믹스는 2006년 툼레이더 레전드를 시작으로 1편의 리메이크작 애니버서리, 언더월드 등 새로운 설정으로 리부트에 가까운 3부작을 선보였다. 레전드 시리즈가 총 1,100만 장을 판매하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성과를 냈다. 여기에 2009년 스퀘어가 에이도스 모회사 SCi를 인수하면서 다시 한번 리부트가 이루어지게 됐다.
새롭게 리부트된 툼레이더는 라라 크로프트의 젊은 시절에 주목했다. 고고학과 졸업생인 라라가 고대 왕국을 찾으러 가던 중 난파로 홀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존하며 성장하는 모습에 집중했다. 생존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변화하는 모습은 기존의 이미 완성된 주인공과는 다른 서사를 그려냈다. 그리고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툼레이더에서는 탐험가다운 면모를 보이고, 2018년 작품인 섀도우 오브 더 툼레이더에서는 거만한 모습, 반성, 그리고 이를 극복하며 진짜 툼 레이더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캐릭터 변경에는 변화하는 요구 역시 담겼다. 레전드 시리즈의 이후 리부트에도 캐릭터 자체의 변화는 그대로였기에, 식상함과 시대상에 걸맞은 새로운 캐릭터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흥행 부분에서 이런 변화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2013년 리부트된 툼레이더는 48시간 만에 100만 장이 판매됐고, 누적 1,500만 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3부작 전체도 4,000만 카피로 역대 툼레이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높은 판매 비중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라라의 모습은 미디어로 이어졌다. 2018년 알리시아 비칸데르 주연의 새로운 영화 '툼레이더'는 리부트 3부작 시리즈의 라라 모습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넷플릭스는 애니메이션 '툼 레이더: 라라 크로프트의 전설'로 리부트 3부작 이후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높은 품질을 중시하는 걸로 유명한 만화 출판사 다크호스 역시 2013년부터 리부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툼레이더 만화책 제작을 이어갔다.


변화와 과거 모두 수용한 30주년 툼레이더, 새 시대로
리부트 3부작 이후 툼레이더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 아마존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집중한다. 그 시작은 2026년 툼레이더 시리즈 30주년 기념작인 '툼 레이더: 레거시 오브 아틀란티스'로 시작된다.
툼레이더 애니버서리에 이어 다시 한 번 리메이크되는 이번 작품은 라라 크로프트의 과거를 다룬 리부트 3부작, 그리고 6편까지 출시된 클래식 툼레이더 시리즈의 연결 고리를 새로 이으며 통합 타임라인을 그린다. 또한 2027년 출시되는 '툼레이더: 카탈리스트'는 완전 신작으로 시기상으로는 가장 최신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여기에 트레일러에서 리부트 툼레이더의 용의 삼각지대, 시리즈 첫 작품 배경인 아틀란티스를 언급하며 이들 이야기의 사건이 하나의 시대 속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소피 터너 주연의 드라마 역시 이러한 새로운 타임라인 안에 그려진다. 아울러 프랜차이즈의 대대적인 재창조, 그리고 실사 TV 시리즈와 비디오 게임의 통합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클래식 팬들에게는 시리즈의 연속을, 신규 팬에게는 툼레이더라는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그렇게 30년간 이어지는 라라 크로프트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2026년부터 다시, 새롭게, 그리고 친숙하게 새로운 길을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