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
강연자 : 넥슨코리아 강대현 공동대표
발표분야 : 키노트
넥슨코리아 강대현 공동대표는 8년 전 같은 무대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당시 그는 '즐거움을 향한 항해'라는 제목으로, 재미없게 여기던 컬링이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사례를 들었다.
규칙도 돌의 무게도 그대로였지만 달라진 것은 '맥락'이었다는 것이다. 응원할 팀이 생기고 역전 드라마가 있었으며 '영미'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가 8년 전 내린 결론은 "재미의 본질은 구현의 바깥에도 있다"였다.

강 대표는 "2018년에는 본질이 구현 바깥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2026년에는 구현이라는 장벽 자체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며 "그렇다면 본질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가 오늘의 질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구현이 쉬워진다'는 말이 구호가 아닌 당면한 사실임을 데이터로 짚었다. 넷플릭스를 켜고 볼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30분간 스크롤만 하게 되는 경험처럼, 선택지가 폭발하면 오히려 고르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발표에서 2015년 약 2800개였던 Steam 출시 게임이 2025년 약 2만 개로 10년 만에 약 7배 늘었고, 그중 리뷰 1000개를 넘기며 폭넓은 주목을 받은 게임은 608개, 전체의 약 3%에 불과했다고 제시했다. 반면 유저의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유저는 믿을 수 있는 곳에 머문다는 점도 통계로 뒷받침했다. 그는 시장조사기관 뉴주(Newzoo) 자료를 인용해 2024년 PC·콘솔 플레이타임의 57%가 출시 6년이 지난 게임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플레이어 시간의 절반 이상이 신작이 아니라 기존 게임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자본의 흐름도 같다고 봤다. 그는 스팀(Steam) 동시접속자가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 기록을 경신하며 지난 3월 4200만 명을 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업계 추정으로 지난해 매출도 사상 최대였던 반면, 게임 분야 초기 단계 투자는 최근 수년 내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시장은 커지는데 성공의 문은 좁아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강 대표는 여기에 AI가 더해진다고 했다. AI는 코드와 이미지, 프로토타입을 더 빨리 만들어주지만, "우리만 쉬워지는 게 아니라 모두가 쉬워진다"는 점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1865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가 '석탄 문제'에서 짚은 역설을 끌어왔다. 증기기관 효율이 좋아지면 석탄을 덜 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소비가 폭증했다는 사례다. 일이 쉬워진다고 경쟁이 끝나는 게 아니라, 판이 커지고 경쟁의 무게중심이 옮겨간다는 의미다.

그는 게임 업계도 같은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했다. 상용 엔진이 보편화되며 엔진 자체가 더 이상 우열의 척도가 되지 못하자 무게중심은 아트와 콘텐츠로 옮겨갔고, 디지털 유통이 보편화되며 게임을 내는 일 자체가 쉬워지자 이번엔 2만 개의 게임 속에서 '발견되고 선택받는 일'이 가장 치열한 싸움터가 됐다는 것이다. 브랜딩·개인화·마케팅·UA 등 새로운 경쟁이 거기서 생겨났다.
강 대표가 제시한 다음 무게중심은 '맥락'이다. 그는 "이제 게임은 구현의 수준이 아니라 맥락의 깊이로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용 AI에게 메이플스토리 캐릭터에 씌울 모자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럴듯하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모자가 나오지만, 메이플스토리가 20년간 쌓아온 스타일 가이드와 유저에 대한 이해를 더하면 비로소 '메이플스토리다운', 실제로 아바타가 쓸 수 있는 모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맥락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만 그는 스타일 가이드처럼 데이터로 옮길 수 있는 맥락은 AI가 점점 더 잘 다루게 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유저와 주고받아 온 살아 있는 관계, 지켜온 시간이 만들어준 신뢰처럼 데이터만으로 옮겨지지 않는 맥락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시간이 쌓아 올린 것을 '맥락 자본'이라 명명했다. 맥락 자본은 만드는 쪽과 즐기는 쪽 모두에 쌓인다. 만드는 쪽에서는 라리안이 20여 년 쌓은 감각, 프롬소프트웨어가 15년 넘게 단단히 다진 난이도 철학처럼 AI가 코드를 대신 짜줄수록 오히려 더 귀해지는 판단의 감각이다. 즐기는 쪽에서는 언더테일의 팬 이론, 다크 소울의 'You Died', 젤다의 스피드런처럼 유저끼리 맺은 관계와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감정이다.
그는 넥슨의 사례로 'BTS' 진과의 콜라보 이벤트에 유저가 한꺼번에 몰린 일, 롯데월드 전일 대관 행사 1만 석 1차 예매가 30초 만에 마감된 일을 들며 "20년간 쌓인 맥락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결과"라고 했다. 그러면서 "AI 모델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어도, 시간이 쌓아 올린 맥락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시간으로만 살 수 있다. 이것이 AI 시대의 진짜 자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 대표는 시간이 흐른다고 맥락이 저절로 자산이 되지는 않는다며 금융 개념인 단리와 복리를 빌려왔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단리이지만, 전작의 경험이 다음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게임 안의 경험이 게임 밖으로 번져 나가면 복리라는 것이다. 직접 플레이하는 시간, 영상을 보는 시간, 커뮤니티에서 떠드는 시간, 크리에이터가 콘텐츠를 만드는 시간이 서로를 키우는 구조다.
그는 특정 던전 보스에게 유저가 계속 죽는다는 데이터를 예로 들었다. 숫자만 보면 난이도를 낮추는 게 답이지만, 커뮤니티를 보면 유저들이 공략을 나누고 클리어 영상을 자랑하며 함께 축하하고 있어 그 보스가 골칫거리가 아니라 게임의 '문화'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데이터만 봤을 때 안 보이던 것이 맥락과 맥락이 연결되면 보이게 된다"며 "분석은 AI가 도와줄 수 있어도 난이도를 지킬지 말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은 결국 맥락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맥락의 연결이 복리처럼 작동해 일정 밀도를 넘는 순간 가치가 폭발한다고 봤다. 그 예로 축구를 들었다. 직접 뛰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많고, 적지 않은 이들이 실제 축구보다 게임으로 축구를 먼저 만나 이 세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직접 뛰고, 중계를 보고, 유니폼을 모으고, 게임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축구'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경험을 주고받으며 150년의 시간이 복리로 쌓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진정한 격차는 재미의 크기보다 경험이 복리로 쌓이는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넥슨이 지난해 개최한 '아이콘 매치'가 큰 감동을 준 것도 전성기를 지난 레전드 선수들이 이어 온 맥락이 터진 결과라고 봤다. 누군가 취미를 물었을 때 '게임'이 아니라 '던전앤파이터' '메이플스토리'라고 답하는 순간이 오면, 그 게임이 축구처럼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됐다는 뜻이라고 그는 말했다.
맥락이 만드는 세계의 사례로는 2006년 출시돼 20년이 지난 지금 하루 1억 3000만 명 이상이 접속하는 로블록스, 단순한 블록 위에 유저들이 풍요로운 세계를 세운 마인크래프트가 제시됐다. 그는 "뛰어난 그래픽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와 창작이 끝없이 얽히며 쌓아 올린 결과"라고 했다.

강 대표는 넥슨이 직접 겪은 두 장면도 공유했다. 하나는 지난해 말 고객센터로 도착한 청첩장이다. 한 게임을 5년간 함께 즐긴 커플이 게임 속 추억과 함께 결혼 소식을 전해 온 것으로, 두 사람은 다투고 말을 안 하던 날에도 보스를 같이 잡아야 해 게임 안에서만큼은 대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메이플스토리 '커닝시티 대참사'다. 한 유저가 이벤트로 받은 보따리를 커닝시티 한복판에서 열자 당시 초고레벨 몬스터였던 주니어 발록이 튀어나와 마을이 아수라장이 된 사건으로, 기획된 콘텐츠가 아니었음에도 유저들이 이름을 붙여 전설처럼 회자됐고 시간이 흘러 유저 창작 플랫폼 메이플스토리 월드의 한 창작팀이 '메이플랜드'에서 이 사건을 재현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유저는 게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안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코드로 만든 건 삶이 펼쳐질 무대였을 뿐, 삶 자체는 유저가 채웠다"며 "맥락은 개발사 혼자가 아니라 유저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게임이라는 매체만의 특별함"이라고 말했다. 팬이 작품 안으로 들어와 살며 그 삶이 실시간으로 작품 자체를 바꾸는 매체는 게임뿐이라는 설명이다.

강 대표는 "게임은 출력물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명제도 제시했다. 라이브 게임에서는 이 세계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패키지 게임에서는 완성된 세계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린다는 약속으로, 당신이 쌓은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는 "AI는 출력물을 점점 더 잘 만들겠지만 약속은 출력하지 못한다. 약속은 지켜질 때만 쌓이고 어긋나는 순간 가장 빨리 무너진다"며 "어제의 약속을 지켜야 오늘의 약속이 믿어지고, 그 신뢰의 연쇄가 바로 맥락 자본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맥락이 시간으로만 쌓인다면 오래된 게임을 운영해 온 큰 회사가 유리하고 신생 팀은 불리한 것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 강 대표는 "복리에서 격차를 만드는 것은 원금의 크기가 아니라 이자율, 즉 쌓는 방식"이라고 답했다. 라리안은 한때 파산 위기를 겪은 스튜디오였고 로블록스도 2006년 출시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작은 경험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고 다음 작품과 다음 유저로 이어 붙였기에 지금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은 팀일수록 결정이 빠르고 유저와 거리가 가까워 오늘 배운 것을 내일 더 빨리 재투자할 수 있어 '이자율'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그는 봤다. 그러면서 "넥슨이 가진 20년의 맥락 역시 완성된 자산이 아니라 오늘 쌓기를 멈추는 순간 빛이 바래는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강 대표는 두 개의 'AI'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하나는 우리가 매일 말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구현 비용을 빠르게 낮춰주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평등함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차이를 내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축적된 지능(Accumulated Intelligence)으로, 유저와 함께 보낸 시간·운영하며 쌓은 판단·커뮤니티와 만든 문화가 복리로 이어진 맥락 자원이며 돈으로 살 수 없고 프롬프트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직 시간으로만 쌓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첫 번째 AI는 모두의 무기이지만, 두 번째 AI는 맥락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의 것"이라며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에 우리가 들어야 할 무기는 첫 번째 AI를 누구보다 잘 쓰면서 그 위에 두 번째 AI를 누구보다 두텁게 쌓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유저와 함께 보낸 삶의 총합은 그 어떤 경쟁사도, 그 어떤 AI도 복제할 수 없다"며 "누구나 사서 쓸 수 있는 인공지능 위에 또 하나의 AI인 축적된 지능을 두텁게 쌓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AI가 만드는 모자는 세상에 수백만 개가 있지만, 여러분의 게임에서만 의미가 있는 모자, 유저가 보는 순간 미소 짓게 되는 모자는 오직 여러분만이 만들 수 있다"며 "중요한 건 시작점의 크기가 아니라 오늘 쌓기 시작했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컬링 고백으로 무대에 섰던 것을 상기하며 "경기는 그대로여도 맥락은 세계를 만든다. 여러분의 게임이 누군가에게 그런 세계가 되는 순간도 오늘 쌓기 시작한 시간 위에서 올 것"이라는 말로 키노트를 맺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