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은 수많은 발전을 이루며 격동기를 거쳤습니다.
그중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던 하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저희에게도 친숙한 해적입니다.
동양에서 해적은 단순히 도적떼 집단이였지만 식민지시대 유럽의 해적들은 정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가 프란시스 드레이크, 로로노아, 호니골드 등으로 유명한 사략해적입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는 않으나 적대국에게 타격을 주고 자국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며,
전쟁에도 참가하는 비공식 사병집단이였습니다. (예: 스페인 계승전쟁의 경우 다수의 사략해적과 일반 해적들이 참전)
이런 해적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때가 식민지시대였으며 해상교역이 크게 발전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이당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각 지역에 식민지를 정착시킨 뒤 막대한 부를 착취하기 시작했으며,
남미 잉카제국과 현대 멕시코의 아즈텍을 정복한 뒤 개발한 은광산들은 중국이나 일본, 한국과 같은 극동의 경제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5~17세기 중국 명조의 경우 농업중시인 사회에서 농민들은 은으로 세금을 지불했는데,
이 은의 대부분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중국까지 건너온 것이라는것을 보면 그 장대한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역선들을 털던 해적들의 규모는 밸런스를 맞춰야하는 대항해시대 게임과 같은 스케일로는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실제 예를 들자면 에드워드 잉글랜드와 같이 커다란 한탕을 노렸던 해적같은 경우 가장 컸던 한탕 수익이 나포한 배값을 제외하고도 75000파운드,
당시 상회등의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파운드가량인것을 감안해 볼때 요즘 한국돈으로 추산하면 750억가량입니다. (한탕에요. 해적선 하나가.)
이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경우 1년간 30척, 최다선박 나포 기록을 가진 검은 바트의 경우 4년간 456척을 나포했으니 한 해적이 한 국가에 가져다줄수 있는 부나 피해는 엄청난것이였습니다.
(검은 바트의 경우 포르투갈의 왕에게 진상할 세계최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털어서 달고다닐 정도였습니다.)
이런 해적들의 공적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해적들이 국가로부터 존경받고 사략해적이 아닌 정규적인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까지 생겨납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호니골드)
또한 이때는 민주주의와 같은 유럽의 정치 사회구조가 크게 발달한 시기였으며 해적은 그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받은 극단적인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바르톨로뮤 로버츠, 속칭 검은 바트 선장의 선상규율11조를 보면 당시 해적들은 세계 어느 사회보다 민주적이였으며,
당시 서민들이나 일반적인 선원들과 비교해봤을때 훨씬 좋은 대우(급여, 투표권)를 받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와 같이 흑인을 부관으로 두는 경우도 있었으니 당시 흔재했던 인종차별또한 해적들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선장으로서는 죽음뿐이였기 때문에 이들 선장들은 선원들에게 대단히 사랑받거나 대단한 베짱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요즘식으로 능력자였던듯 합니다.
(예: 검은 바트의 경우 그가 해군과의 전투중 전사하자 그의 장례를 치루게 해준다는 조건하에 선원들이 항복.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의 경우 "가끔씩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까먹는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해적들은 전사하거나 체포되지 않았을 경우 그 최후가 밝혀지지 않거나 미심쩍은 경우가 많습니다.
전사했거나 체포되서 처형된 해적들(예: 검은 바트,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의 경우 확실한 기록이 있으나 나머지 구설로 전해지는 최후의 경우 신빙성이 낮은 경우,아니면 아예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프랑소와 로로노아와 벤자민 호니골드입니다.
범죄자들의 행동특성을 봤을때 거물급 범죄자들은 또다른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숨기려고 하고 과거를 세탁하려고 합니다.
특히 원한이 많은 경우 더더욱 그럴것입니다.
프랑소와 로로노아의 경우 스페인인들을 매우 증오해서 스페인령 식민지마을을 공격해서 마구 죽이거나 심지어 포로의 심장을 꺼내서 뜯어먹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였고,
벤자민 호니골드는 1718년 우드 로저스의 대사면 이후 함께 '영업'하던 해적동료들을 체포하기 시작해 해적들로부터 원한을 많이 샀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부관이던 검은수염 티치와 에드워드 잉글랜드등은 친했었는지 놔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소와 로로노아의 경우 그의 최후는 같은 해적이였던 알렉산더 엑세메런의 아메리카 버커니어의 역사에서 "남미 연안 어딘가를 탐험하던 중 그곳의 식인 원주민 쿠나족에게 잡혀먹었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기록의 신빙성이 너무 낮습니다. 첫째로 쿠나족은 식인풍습이 없습니다.
또한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왜곡해서 식민사관을 심어주려던 유럽의 기류를 보았을때 이것은 아마 누군가에 의해 생겨난, 잔인했던 프랑소와 로로노아에게 어울리는 입소문으로 보입니다.
둘째로 지역 원주민들과 분쟁이 있었다고 해도 전력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에르난 코테즈의 경우 겨우 500명으로 아즈텍을 정복했으며 그정도로 대포와 총기의 효과는 그것을 처음 보는 원주민들에게는 뛰어났습니다.
프랑소와 로로노아는 바다에서 싸운것 뿐만아니라 육상에서도 전력이 있고 (600명으로 마라카이보 공략) 본인도 무예에 능했다고 전해지니 패전 혹은 제독이 포로가 되는 상황이 나올거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셋째로 프랑소와 로로노아는 예전에도 스페인군에 기습당했을때 피와 모래를 덮고 시체사이에 끼어 "죽은척"을 해서 살아남고 해적으로 복귀한 전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정컨대 아마도 그가 죽었다는 입소문의 발상지는 프랑소와 로로노아 자신이며, 그런 소문을 낸 이유는 궁지에서 빠져나가서 재기를 노리거나, 아니면 죽은척하고 모아둔 재산으로 평온한 은퇴생활을 보내기 위한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버커니어로 활동하다가 귀국해서 버커니어의 역사를 쓴 알렉산더 엑세메런이 프랑소와 로로노아 본인이였을지도 모르지요 ㅎㅎ
벤자민 호니골드의 경우 그는 우드스 로저스에게 관직을 얻은뒤의 기록에 여러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스페인 군함과 전투하다 사로잡혀 죽었다, 상선대를 이끌고 태평양으로 가다 태풍을 만나 죽었다 등.
그러나 모든 소스에서 공통적인 점은 사라진 시점은 알려져있지만 죽은 위치나 시점의 기록이 없다는것입니다.
해적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호니골드같은 거물이 죽었는데도요.
스페인군에 사로잡혀 죽었다면 그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있었을것이며, (대사건이니 축제라도 벌였겠지요)
상선대를 이끌고가다 태풍을 만나 죽었다면 생존자들로부터 적어도 난파된 위치나 목적지라도 증언이 있었을텐데 어느쪽도 없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해적들의 최후는 기록되지 않았거나 미심쩍은 구전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걸출한 인물들의 기록의 여백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해적이 재밌는것이지요.
아마도 수많은 거물 무법자들은 대사면 이후로, 혹은 실종이나 애매한 사망기록 이후로 모아둔 자산으로 자리를 잡고 꽤나 평안한 은퇴를 즐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님들 해적하세요 해적.
3/20/2012
Hell-ios '해적' 네메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