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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인물소개 - 갑옷 & 의복편

아레스써버
댓글: 1 개
조회: 946
2006-02-01 16:29:02

안녕하세욥 ~ CapTain입니다.

설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

이번에는 갑옷과 의복의 주인들을 묶어서 쓰겠습니다.

Ctrl+F로 갑옷이나 의복의 이름을 검색하셔서 보셔두 됩니다 ~!

역시 출처는 네이버 백과사전입니다.

◇목차

- 사자왕 갑옷

- 성왕 갑옷

-데메트리오스 1세의 갑옷

-알렉산더 대왕의 갑옷

-프리드리히 1세의 갑옷

-카이사르의 갑옷

-다리우스 3세의 갑옷

-에파미논다스의 갑옷

-하트셉수트의 가슴장식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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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갑옷

리처드 1세 [Richard Ⅰ, 1157.9.8~1199.4.6]

플랜테저넷 왕조의 영국 왕(재위 1189~1199).
별칭 사자왕()
국적 영국
활동분야 정치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이다. 프랑스의 아키텐지방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으나, 어머니 및 형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켜 부왕()과 싸웠다. 1183년 형 헨리가 죽고 1189년에 부왕인 헨리마저 죽음으로써 왕위에 오른 리처드는 부왕의 대륙정책을 계승함과 동시에 프랑스왕의 누이동생과의 약혼을 취소하여, 그와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이 고조됨으로써 두 사람의 공공연한 적대관계는 연기되었다.

왕은 1190년에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제휴하여 제3회 십자군을 편성, 이를 주도하여 출정하였다. 그 동안 십자군을 위하여 약 8,000의 병력과 100척의 수송선을 준비하였다. 1191년 리처드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적왕() 살라딘을 격파하여 3년의 휴전을 맺고(1192), 그의 용맹성으로 사자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귀국하는 도중 빈에서 오스트리아왕에게 붙잡혀 많은 액수의 몸값을 바치고 1194년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프랑스왕의 뒷받침으로 이미 왕위를 찬탈한 아우 존을 몰아내고 다시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제후들의 반란도 진압시켰다. 그 뒤에 본국의 통치를 유능한 행정관 H.월터에게 맡기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2세와 싸우다 1199년 4월 리모주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리처드 1세는 재위 10년 중에서 본국에는 반 년밖에 있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프랑스에서 또는 십자군원정으로 허비하여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였다. 또, 자신의 몸값으로 무거운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징수하였고, 정치에도 무능하였으므로 부왕시대에 눌려 있던 제후()들의 세력이 재위 중에 다시 대두하는 일도 있었지만, 전투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는 중세기의 전형적인 기사로서 좋은 평을 받았다.

성왕 갑옷

루이 9세 [Louis IX, 1214.4.25~1270.8.25]

프랑스 카페왕조의 왕(재위 1226~1270).
별칭 성왕()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정치

별칭 성왕(). 정의에 입각한 평화, 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한 왕이다. 카페가() 역대의 왕이 확대한 왕령()을 계승하였고, 봉건제후 영내에 국왕직속의 관료를 두어 국가적 기관을 정비하여 중세 프랑스의 집권적 왕정을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영국과의 싸움을 종결시켰고, 여러 국왕과 제후 사이의 평화수립에 노력하였다. 왕은 십자군 원정 도중에 사망했으나, 이 시기에 프랑스는 서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데메트리오스 1세의 갑옷

데메트리오스 1세 [Demetrius I, BC 336~BC 283]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293~BC 287).
별칭 공성자()
국적 마케도니아
활동분야 정치

별명 공성자(). 부왕 안티고노스 1세의 구()알렉산드로스제국 재통일정책의 실현을 위하여 각지로 전전하였으며, 살라미스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제해권()을 빼앗아 BC 302년 코린트동맹을 부흥시켰다. 입소스전투그리스 본토에서의 왕국 경영에 노력을 기울여 BC 293년 정식으로 마케도니아 왕위를 획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갑옷

알렉산드로스대왕 [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6]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별칭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
국적 마케도니아
활동분야

정치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립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또는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 ·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부왕이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니,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때마침 마케도니아의 북방에 만족()이 침입하고 서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친정()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그리스가 동요하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테베를 토벌하고 테베시()의 전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BC 334년에 그는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먼저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으며, 사르디스 그 밖의 땅을 점령한 뒤 북()시리아를 공략하였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 ·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를 건설하고 1,000 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여기서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이후로 그는 만인동포관()을 지니게 되었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하여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 중의 지원자만을 거느리고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의 인더스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려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프리드리히1세의 갑옷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1122 ?~1190.6.10]

슈타우펜왕조의 신성로마(독일) 황제(재위 1152∼1190).
국적 독일 신성로마제국
활동분야

정치

 

붉은 턱수염 때문에 ‘붉은 수염’이라 불렸다. 즉위 후에 우선 독일 국내의 치안확립에 힘쓰고, 이어 6차에 걸친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롬바르디아도시동맹의 반항에 부딪히고, 1176년 레냐노 전투에 패하여 화의를 맺었다.

만년에는 그의 사촌이며 독일의 가장 유력한 제후() 작센공() 하인리히 사자공과 대립하였으나, 마침내 1180년에 사자공을 추방하고 그 봉토()를 몰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1세 치세기()에 오랜 부족태공()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제국제후()가 등장하게 되었다. 제6차 이탈리아 원정(1184∼1186) 후, 제3차 십자군(1189∼1191)을 거느리고 소아시아를 원정 중 세우레키아에서 사레프강을 건너다가 익사하였다.

무장()으로서의 완전한 자질과 예리한 웅변술을 갖추었으며, 인재등용에도 뛰어나 라이나르트, 폰 프라이징 등의 성직자를 등용하였다. 궁정기사 문화를 한몸에 모은 인물로 찬양되고, 중세 말기 이후에는 곤궁과 오욕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으로서 황제 전설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갑옷

카이사르 [Caesar, Gaius Julius, BC 100.7.12~BC 44.3.15]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
별칭 시저
국적 로마제국
활동분야 정치, 군사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주요저서 《갈리아 전기()》,《내란기》

로마 출생. 시저라고도 한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의 하나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 : 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하였다.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BC 46년 4월)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다. 다시 BC 45년 3월에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BC 49년 이래의 내란의 막을 내렸다.

이로써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M.J.브루투스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년 3월 15일).

다리우스 3세의 갑옷

다리우스 3세 [Darius III, ?~BC 330]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 최후의 왕(재위 BC 336~BC 330).
국적 페르시아제국
활동분야

정치

궁정의 음모와 암투 속에서 환관 바고아스가 세력을 잡고 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그 아들을 죽인 뒤, 왕조의 친족인 다리우스를 왕위에 앉혀 임의로 정권을 농락하려 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리고 독립하였다. 그러나 미처 제국을 통치할 겨를도 없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수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서 페르시아는 패배하였다. 액바타나로 도망쳤으나 끈질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추적으로 다시금 박트리아로 쫓겨갔다. 그곳에서 재기를 꾀하다가 끝내 그곳의 총독인 베수스에게 살해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에파미논다스의 갑옷

에파미논다스 [Epaminondas, BC 410 ?~BC 362]

고대 그리스 테베의 장군 ·정치가.
국적 고대 그리스
활동분야 정치, 군사

초기의 경력은 불분명하다. 피타고라스학파의 류시스에게 사사하였고, 뛰어난 변설의 재능과 기지()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BC 371년 보이오티아 연맹위원에 선출되어 스파르타평화회의에 참석하였고, 그 회의에서 보이오티아연맹의 해체를 노린 스파르타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반감을 사 침입한 스파르타군을 레우크트라에서 맞아 싸웠는데, 새 전술인 사선진전술()을 사용하여 적군 1만에게 결정적 타격을 줌으로써 스파르타의 패권을 빼앗았다. 이듬해 펠로폰네소스에 원정하여 아르카디아메세니아를 스파르타로부터 독립시켰고, 그 뒤에도 친구 펠로피다스와 협력하여 테베의 패권 확립에 노력하였다. BC 362년 4번째의 펠로폰네소스 원정 때 만티네이아전투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테베의 패권도 잃게 되었다.

하트셉수트의 가슴장식

하트셉수트 [Hatshepsut, ?~?]

이집트 제18왕조 제5대의 여왕(재위 BC 1503?∼BC 1482?).
국적 이집트
활동분야 정치

투트모세 1세의 장녀로, 이복형제인 투트모세 2세의 왕비이다. 그들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서출()의 조카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조카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왕은 정통왕위 계승권을 주장, 22년간 공동통치를 하였다.

조각이나 벽화에서 보면 그녀는 파라오(이집트 왕의 칭호) 복장을 하고, 턱수염이 있다. 오직 내정()에 전념하였던 그녀는 시나이 광산()의 채굴과 교역()을 위하여 푼트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녀의 총애를 받은 신하이며 건축가인 센무트가 설계한 다이르 알바흐리의 장제전(殿)과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殿)에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장식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BC 69~BC 30.8.30]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재위 BC 51∼BC 30).
국적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활동분야

정치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왕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이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오보에를 부는 왕)의 둘째 딸로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그 후 한때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G.J.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하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BC 41~BC 40년 M.안토니우스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의 기증).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그녀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재기를 꾀하였으나, BC 30년 옥타비아누스군의 공격을 받고 독사로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300년의 종말이고, 로마에 의한 지중해 세계 지배의 일단의 성공이며, 또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로마제국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의 여성적 매력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로마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간 여왕이었다. 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이 여성에 대해서는 단지 고혹적인 매력만이 강조되어, 오늘날까지 요부 ·간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제정()의 창생신화()를 형성하기 위하여 꾸며낸 설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많은 문학 작품의 좋은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안토니우스전》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G.B.쇼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68)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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