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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지휘관은 휴가가 필요하다

Erkenia
댓글: 3 개
조회: 1700
추천: 18
2017-08-17 18:48:47
 "휴가가 필요해요."

 꼬박 몇 시간 동안 적은 작전 보고서를 제출하러 왔을 때, 카리나가 지휘관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지휘관은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휙휙 넘겼다. 그녀의 솜씨야 의심할 바가 없으니 큰 맥락만 점검하면 되겠거니 싶은 것이겠지. 그런 신뢰가 썩 달갑게 다가왔다.

 "제 연가가 며칠 남아있죠?"
 "저번에 감기로 하루……. 그것도 병가처리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한 번도 안 쓴거네요. 총 28일 중에서 단 하루도."

 평탄한 어조였지만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보고서 점검을 끝마친 그가 도장을 쿵, 하고 찍었다. 합격 신호였다. 도장은 보고서 표지 한구석 제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카리나 씨, 지금이 몇 월이죠?"
 "그러니까, 8월……이네요."
 "벌써 1년의 반이 넘게 지났군요. 3분기도 중순에 접어들었고."
 "네, 그러네요. 요즈음 날이 좀 짧아지긴 했어요."
 "하반기 시작은 꽤 바빴는데 지금은 일이 좀 줄어들었네요."
 "대규모 소탕 작전이 있었으니까요. 한 동안은 조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 바빴죠. 일주일 동안 쪽잠이나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어요."
 "아하하……,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런데 그런 큰 일이 끝나고도 저는 연가를 하루도 못 썼구요."

 툭툭. 서류를 정리하는 솜씨도 탁월하다. 반듯하게 정리된 종이 귀퉁이에 클립을 끼워 갈무리하곤 그대로 서류철에 넣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이 언뜻봐도 열댓개가 넘게 그의 책상에 쌓여있었다. 시간은 이제 막 점심이 지날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서류 서너개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는 건 지뢰를 밟는 것이라 판단했다. 애매한 웃음으로 넘기자. 아하하, 그리 웃자 지휘관도 따라서 하하, 하고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사실은 정말 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가에 거뭇거뭇하게 올라온 피곤에 찌든 짙은 그림자 때문에 그리 보였는지도.

 "한동안 작전은 없죠?"
 "네, 일부 지역 군수 지원 요청 정도 밖에 없어요. 아이들도 휴식하고 있네요. 일부 휴가를 요청한 아이들도 있구요."
 "네, 그건 확인하고 승인했어요. 고생하는 부대원들이니까 이럴 땐 편히 쉬어야죠."

 편히. 그는 그리 뇌까렸다. 카리나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빨리 지휘관실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한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가 인사하기에 앞서 지휘관이 먼저 일어섰다.

 "보고서 수고했어요. 커피 한 잔 드릴테니 시간 괜찮으시다면 말 상대나 좀 해주실래요?"

 망했다. 마음 속으로 그녀는 머리를 싸맸다. 지휘관실 한 구석 은은한 커피 내음을 풍기고 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저 커피 포트가 이리도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커피를 내리는 솜씨는 기가 막히는지라 또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설탕은 테이블에 있어요."
 "가, 감사합니다……."

 다시 자기 자리에 앉은 지휘관은 서류를 훑어보며 커피를 마셨다. 카리나도 그에 따라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향을 즐긴 뒤 나오는 한숨으로 포장해서 깊게 내쉰다. 곱게 가긴 글렀다.

 "카리나 씨는."
 "네."
 "며칠 전에 휴가를 갔다오셨죠."
 "네에……."

 톡, 톡, 톡. 지휘관이 펜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들겼다. 그게 그의 버릇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 소리가 그녀를 책망하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이리도 바쁜데 너는 놀러 갔냐, 하는, 그러한 것의. 상사의 압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가 바쁜 것은 사실이었고, 그녀가 할 일을 최대한 정리해서 주는 것도 그였다. 다른 부대의 보급관은 지휘관실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마실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즐거우셨나요?"
 "아뇨, 그, 뭐랄까, 친구들과 한 약속이 죄다 파토나서 말이죠. 거의 집에만 처박혀있었달까……."
 "그런 것치곤 피부가 많이 타셨네요. 해가 많이 뜨거웠나보죠?"

 카리나가 움찔했다. 지휘관은 괜히 지휘관이 아니라는 듯 눈썰미가 꽤나 날카로웠다.

 "가족! 가족끼리 바다를 갔어요. 그치만 차라리 집에 있는게 나았는걸요."

 급하게 변명을 주워섬겼다. 지휘관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톡, 톡, 톡. 죄인이 된 기분으로 카리나는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사실, 한창 바쁜 걸 알면서도 지휘관을 졸라 휴가를 받아냈다. 어지간해선 휴가를 받아주는 지휘관이 난색을 표하는 상황임에도, 이 여름, 바다를 한 번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휴가를 신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간 모든 업무는 당연하지만 지휘관에게 집중됐고.

 "바다 좋죠. 하지만 전 휴가를 간다면 집에서 하루 종일 자고 싶네요. 아침 늦게 일어나서 느즈막히 아침식사를 하고, 책이나 좀 읽다가, 저녁 즈음 되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싶어요. 음, 늦잠을 잔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그딴엔 농담처럼 웃은 것이었을테지만 카리나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게 만드는 웃음소리였다. 다름 아닌 오늘 아침만해도 그녀는 출근 시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이다.

 딱. 그가 마지막으로 처리한 서류를 내려놓고 펜으로 탁자를 쳤다. 그녀는 어깨를 흠칫했다. 어느새 그의 책상 위 모든 서류가 정리되어있었다. 혀를 내두를만한 처리 능력이었다. 과연 내가 저기까지, 하다못해 절반만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도 조금은 쉬어도 괜찮겠죠?"
 "무, 물론이죠."
 "8월인데도 연가가 20일 넘게 남아있으니, 5일 정도는 써도 되겠죠."
 "주, 주말 끼고 말씀이신가요?"
 "어라, 카리나 씨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녀가 벌벌 떨었다.

 "평일은 5일 뿐이잖아요. 요샌 일도 그닥 없구요."

 그의 기준에 따르면 열댓건 정도의 공문처리는 일이 그닥 없는 셈이었다. 그녀에겐 다를지 모르겠다만.

 "토요일엔 돌아올게요. 앞으로 일주일 간 잘 부탁해요, 카리나 씨."
 "네에……."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곤 그리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

 "지휘관이 휴가를 간다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은 언제나 맞아들어간 듯 했다. WA2000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눈 앞에 두고도 그걸 먼저 물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5일 간이라고 해요. 주말이 껴있으니 실질적으론 9일인 셈이네요."

 마주 앉은 스프링필드가 그리 대꾸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여간 그 일 많은 지휘관이었다. 작전이 계속될 땐 눈가에 내려앉은 다크서클 때문에 그 성격 드세기로 유명한 WA2000마저도 "쉬어가며 하는거지?" 하며 걱정하는 말을 할 정도였다. 저번에 스프링필드가 한 번 억지로 무릎베개를 해주고 잠깐 재우긴 했지만, 그 정도로 피로가 풀릴 턱이 없는 것이다.

 "그걸 부대원하고 말도 없이 결정하는거야?"

 무심코 WA2000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쉿. 스프링필드가 주의를 줬지만 이미 다른 전술 인형들에게 시선이 쏠린 뒤였다. 부대 한 구석에 마련된 카페는 이래저래 인기가 많은 장소였다. 스프링필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지휘관이 휴가를 가는 걸 부대 내 모든 전술 인형이 알게 되는 건 머지 않은 일인 듯 했다.

 "큰 작전이 예상된 것도 없고, 앞으로의 군수 지원과 자율 작전도 다 짜놓고 간댔어요. 흘러나오는 소문이지만요."
 "으, 확실히 지휘관이라면 그런 부분은 철저하겠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스프링필드가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았다. 주변이 묘하게 조용했다. 모두 귀를 쫑긋하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부끄럼타는 WA2000을 위해 그녀에게만 말해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곧 휴가 전쟁이 일어날 듯 했다.

 벌떡. 여기저기서 전술 인형들이 일어섰다. 가장 먼저 뛰쳐나간건 G41이었다. "주인님하고 휴가!" 귀를 쫑긋거리며 우다다 달려가는 그 모습은 흡사 프리스비를 쫓아가는 강아지의 모습과 유사했다. 한 구석에서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건 9A-91과 AS Val은 언제 사이가 좋았냐는 듯 서로 말도 없이 일어서 카페를 나섰다. 묘하게 걸음이 서서히 빨라지는 것 같은 건 눈의 착각이 아닐 터였다. 디저트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95식과 97식 자매도 썩 다를 건 없었다. 아니, 그래도 그들은 서로 웃음을 잃지 않고 대화를 하며 나섰으니 좀 나을지도.

 "안 가봐도 되겠어요?"

 어느 새 절반 가까이 사람이 사라진 카페에서 스프링필드가 WA2000에게 그리 물었다. 나머지 전술 인형들의 테이블에서도 느긋하던 페이스는 어디갔는지 디저트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WA2000의 초코 아이스크림은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다.

 "내, 내가 왜?"
 "어머, 뺏길텐데."

 평탄한 어조로 그리 말하니 WA2000이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알기 쉬운 아이라니까. 스프링필드는 쓴웃음을 짓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깐 고민하던 WA2000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오늘은 아이스크림이 영 입에 안맞네."
 "드문 일이네요."

 스프링필드가 빙긋 웃었다. 그녀가 초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전술 인형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덤으로 지휘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는 이가 몇 없는지 알고 있었고, 지휘관은 까맣게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미, 미안한데 몸이 안좋아서 먼저 들어가볼게."
 "네에, 천천히 들어가세요. 저는 좀 더 쉬다갈게요."

 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그리 말한 WA2000이 뒤돌아섰다. 그 걸음은 빨라지다, 문을 나서곤 이윽고 달음박질 소리로 바뀌었다. 스프링필드는 슬쩍 웃었다. 귀여운 아이라니까.

 커피가 딱 알맞게 식어있었다. 그녀는 눈 앞에 남기고 간 초코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먹었다. 그녀는 그 소문이 돌자마자 이미 지휘관의 휴가 날짜에 맞춰 휴가를 신청해놓은 상태였다. 한참 전에 신청한 휴가가 우연히 지금 시기에 맞아떨어진 인형들을 제외하곤 아마 그녀가 가장 빠르게 신청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외로 영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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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오오오오오오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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