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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지휘관은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Erkenia
댓글: 6 개
조회: 1428
추천: 19
2017-08-22 17:45:55
 잠이 부족한 몸은 끊임없이 수면을 요구한다. 지휘관이 잠에서 깨니 시계는 어느새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힘껏 기지개를 켜곤 일어섰다. 어둑어둑한 저녁, 조금 떨어진 번화가의 불빛이 흐늘거리고 있었다.

 마른 목을 축이려 부엌으로 가자 냉장고에 붙어있는 자그만 쪽지가 보였다. 먼저 가볼게요, 저녁 챙겨드세요. 유려한 서체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스프링필드 씨가 있었지. 묘하게 깔끔해진 집 안이 오히려 그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폐를 끼쳤다. 나중에 저녁이라도 한 번 사줘야겠네, 그리 생각하고 마는 것은 자연스레 그녀가 유도한 것이리라. 그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꽤나 영악한 것이다.

 간만에 온 집에 저녁 찬거리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원래 저녁은 바깥에서 먹기로 했다. 그렇다해도 이제 막 자다 깬 추레한 모습─그의 전술인형들이 봤으면 색다른 모습이라 평했겠지만─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우성치고 있는 배가 하다못해 물이라도 끼얹고 나갈 때까지 버텨주길 바라는 수 밖에.

 나름 깔끔하게 입는다해도 너저분해 보이는 것은 평상시에 입던 옷이 제복이었던 것의 대비일 것이라. 아무리봐도 썩 맘에 들지 않는 사복 차림을 거울로 바라보던 지휘관은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훌륭한 자기도피였지만, 어차피 그가 얼굴이 팔린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라, 설마 아는 사람이야 만나겠는가, 그리 생각했고, 실제로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집 앞 거리에 나서기 전까진.

 "늦잖아. 내 시간이 얼마라고 생각하는거야?"
 "……내가 약속을 했던가요?"

 땅거미가 짙게 깔려 어두워진 밤 가로등 아래에서도 그녀의 자줏빛 머리칼과 적안은 선명히 빛났다. 아니, 그녀의 하얀 피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만은. 지휘관은 잠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프링필드도 그렇고, WA2000도 그렇고, 내가 모르는 약속을 그녀들과 잡았던가, 하고.

 "그, 그건 아니지만……."

 얼굴을 살짝 돌리며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다행히 약속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면 문제가 또 생긴다.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가, 하는.

 "저녁 혼자 먹을거 아냐. 내 지휘관씩이나 되서 궁상맞게 그러면 내가 남들에게 태가 안선다고."
 "WA2000 씨도 휴가셨나요?"
 "딱히 지휘관이랑 맞춘 건 아니거든."

 어두운 공간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살짝 발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용케 부끄러운 걸 참고 말하는 그 모습에 지휘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말하면 화내겠지만, 꽤나 기특했다.

 고압적인 언동 때문에 부대 내에서도 겉돌고 있던 때가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여린 속마음에 꽤나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배속된 초창기에 그녀가 힘들어하던 걸 보다못한 지휘관이 상담도 꽤나 자주하곤 했었다. 본인도 그러고 싶진 않은데, 라고 눈물을 보이던 때가 생각났다.

 그런 그녀의 나름대로의, 용기를 낸 저녁 권유에 어울리지 못할 건 없었다. 조금 더 신경써서 차려입고 올걸 그랬나, 하고 자그만 후회가 들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주길 바라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다지, 오히려 내가 약속도 없이 온 거고……."

 솔직하게 그리 말하는 지휘관의 모습에 되려 당황했는지 WA2000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흐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살짝 웃은 그가 "언제까지 서있기도 뭣하니, 갈까요." 하고 길을 재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좀 더 신경쓸 걸 그랬네요."
 "아니, 그, 지휘관의 사복, 신선해서 괜찮다고 생각해."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딱히 빈말은 아닌 걸."

 걸으면서 하는 대화는 그런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렇기에 주변에선 연인으로 보이겠지. WA2000은 주변에 걷는 연인들의 모습과 지휘관과 자신의 모습이 썩 다르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무심코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지휘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아무 것도 아냐!"

 돌아보며 그리 말하는 지휘관의 모습은, 그녀가 항시 보아왔던 제복 차림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평소의 모습이 아닌, 지금은 그저 사복을 입은 일개 청년의 모습일 터인데도 미덥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얼굴이 좀 더 달아올랐다만은. 

 "따로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없다면 제가 안내할게요."
 "그럼 부탁할게. 설마 이상한데는 아니지?"
 "딱히 기대하지는 않는걸 추천해요."

 애써 태연한 체 그리 대답하는 것이 한계. 달아오른 얼굴이 그에게 보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걷는 길은 조금은 힘들었지만, 동시에 그없이 기쁜 것이었다. 수없이 보아온 쓴웃음을 짓는 그의 옆모습을 또 다시 눈으로 쫓게 되는 것은, 여기에 그의 휘하 전술인형 누가 서있더라도 똑같을 것이라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전술인형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녀에게 약간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작은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울리는 종소리가 청아했다. 꽤나 오래 장사한 듯, 고풍스럽다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세월의 흔적이 녹아 들어가있는 장소였다. 한 구석 자그맣게 들려오는 골동품 오르골 소리와 낡은 책장에 꽂혀 있는 색바랜 책들이 식당 주인의 취향이 그러한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었다. 차분해지는 분위기였다.

 "단골 레스토랑이에요. 못 온지 한참인데 달라진게 없네요."

 창가에 자리잡은 지휘관은 익숙한 듯 메뉴판을 펼쳐보였다. 한 귀퉁이가 헤져있는 메뉴판 한 장 넘긴 그가 그녀에게 메뉴판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의 이야기보다는 손가락에 눈이 갔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었던 지휘관의 손가락, 그 길죽한 검지 한 구석에 박여있는 굳은살과 잉크 자국은 그가 그녀들을 위해 노력한 증거였다.

 "듣고 있어요?"
 "응? 아, 지, 지휘관의 추천으로 할게."
 "가장 어려운 주문이네요."

 그가 혹여나 그녀의 시선을 눈치챌까 놀라 급한대로 주워섬긴 말에도 지휘관은 그리 말하며 웃을 뿐이었다. 테이블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주인을 불러냈다.

 "이런 부분까지 구식이라니까요."
 "구식이라 미안하네. 오랜만에 왔어?"
 "일이 좀 바빠서요."
 "어디 취직했는데 그래? 밥 한 번 못 먹을 정도야?"
 "남 부럽지 않은 직장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일은 많지만요."
 "부러운 소리 하는구만. 내 아들 놈도 그러면 좀 좋겠어."

 푸근한 얼굴의 중년 여성은 익숙한 듯 지휘관과 이야기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이 레스토랑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이 여성 때문일거라 알 수 있었다. 지휘관과 이야기하던 그녀가 WA2000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훑어본 여성은 능글맞은 웃음을 띄우며 지휘관을 툭 쳤다.

 "그래서, 이 아가씨랑 데이트라도 온 거야?"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리 생각해줄지는요."
 "데, 데이트……."
 "아가씨, 요 근래 보기 드문 우량품이야. 잘 잡아둬."
 "그렇게 띄워주셔도 아무 것도 안나와요."
 "비싼 술 한 병 정돈 시켜줄거잖아?"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발갛게 달아오른 WA2000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얼굴을 본 여성이 깔깔 웃으며 지휘관의 등짝을 몇 번 툭툭 쳤다. 지휘관도 곤란한 듯 따라 웃었다.

 "추천 메뉴로 주세요. 말씀하신 조금 비싼 술도 한 병."
 "술은 내 맘대로 가져와도 되겠지?"
 "바가지 씌우실 건 아니잖아요?"
 
 한바탕 웃은 여성이 "실력 좀 발휘해보지."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지휘관은 조금 지친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아니, 그, 음……. 저, 지휘관."

 "왜 그래요?"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향해 그가 되물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녀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녀 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것따위 지금은 그녀에게 썩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그, 데이트, 데이트라는 그거……."
 "아, 불쾌하게 했나요? 미안해요. 조금 농담이었는데."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 WA2000은 조금 가라앉은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 걸 느껴졌다. 이번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만은. "됐어!" 다만 그리 말하고서 후회하는 것은 과연 어떨까.

 획 돌린 시야 너머로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 안절부절한 듯한 그 표정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농담이야?"
 "반쯤은 진심이지만요."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구나,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눈 앞에 놓인 물컵을 양손으로 잡고 마셨다. 지휘관은 그런 그녀를 살짝 웃음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지휘관 뒤, 창문에서 스프링필드가 보였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더니 WA2000을 보곤 살짝 윙크했다. 죽 보고 있었던 듯 했다. WA2000도 지휘관 모르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한 발짝, 등을 밀어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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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쟝아 또 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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